137화: 그리고 모험은 다시 시작된다(3)
여우?
아니면 늑대일까?
곰일 수도 있겠다.
섣불리 무엇인지 맞추었다간 5세의 여린 마음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완벽한 피아식별을 기다린다.
혜원씨도 마찬가지로 그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는지 머쓱하게 웃고만 있다.
- 고양이잖아? 맞지?
“오오! 여누 아저씨가 바루 맞아써. 어뜨케 알았찌?”
- 그리고 이 밑에 고양이가 앉아있는 건 자전거인가?
“웅, 붕붕이 1호.”
붕붕이 1호.
그리고 고양이.
두 가지 단어를 통해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내게 단 하나뿐이었다.
연우씨가 단박에 알아맞춘 것을 보곤 혜원씨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어깨에 손을 얹는다.
‘어떻게 알았어?’
입 모양으로만 언어를 전달한다.
‘마음의 눈이 뜨이면 뭐든지 보이는 법이야.’
맞받아친다.
그나저나 마음의 눈이라니, 티벳 산에서 수행이라도 한 수도승의 발언이다.
아마도 연우씨가 보통보다 조금 섬세한 사람이기에 다섯 살의 낙서 같은 그림도 잘 알아맞히신 게 아닌가 싶다.
- 그런데 확실히 윤슬이가 창의력이 좋네. 고양이가 자전거를 타다니. 동화적이면서도, 뭐랄까. 은근히 감성을 자극하는 상상력이야.
“움? 상상이 아니야 진짜루야.”
- 진짜루? 상상이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이야?
“이거 영히씨야, 영히씨.”
이런...
여기까진 예상 못했는데.
- 영희씨? 이번에 주현씨네 가게에서 새로 뽑은 직원 아니에요? 배달하시는.
“네, 맞아요. 영희씨가 성함도 고영희고, 생김새도 은근히 고양이상이잖아요. 그래서 윤슬이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은데... 요.”
- 아하,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럴 듯하네요. 영희씨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구나? 우리 윤슬이.
감쪽 같이 속아넘아간 혜원씨는 귀엽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윤슬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반면 5세는 내 해명에 약간의 불만이 있는지 볼을 부풀렸다가도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무언가에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시온에 대한 것은 비밀이란 걸 잠시 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자기 실수를 확실히 인지했는지 이내 뒤통수를 긁적인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있던 내 팔뚝에 콩- 콩- 콩- 하고 머리를 찧는다.
5세가 머쓱함을 주체하지 못할 때 하는 행동이다. 이럴 땐 말꼬랑지를 쓸어내려주면 금방 진정한다.
- 그럼 자전거를 탄 고양이로 한 번 만들어볼까?
연우씨는 화재를 돌리며 스케치북을 들어 그림을 유심히 보신다. 그리고는 윤슬이에게 묻는다.
- 여기 고양이, 그러니까 영희씨는 어떤 포즈를 지었으면 좋겠어?
“영히씨 포즈?”
- 응, 자세 말이야. 자세.
윤슬이는 연우씨의 말을 듣고는 잠깐동안 움- 움- 하면서 생각하더니 의자 밑으로 팔짝 뛰어내린다.
자전거를 타는 다리를 표현하듯 허공에서 발을 구른다.
하지만 손모양만큼은 아직 정하지 못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는 채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고민한다.
쿵- 쿵- 쿵- 쿵-
쿵....
이윽고 무언가 떠오른 듯 양팔을 넓게 벌린다.
“이케 팔 벌리구 손에눈 별이 있으믄 딱이야.”
“손에 별이 있어야 되겠어?”
“웅! 그게 꼭 꼭 필요해. 그래이지 소언을 이루어주자나.”
아직 유성우를 보던 날을 잊지 못했는가보다.
별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하긴 그날 윤슬이가 빌었던 소원이 이뤄진 건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만큼의 사건이긴 하다.
- 그래... 조금 디테일이 많이 들어가긴 하네.
자전거를 탄 고양이가 두 팔을 벌리고, 그 손에 별을 얹고 있어야 한다.
확실히 공예품으로 만들려면 다소 난이도가 있어보이긴 한다.
- 우선 지점토로 러프하게 깎아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혜원씨는 내게 지점토가 드물게 묻어있는 조각칼을 쥐어주신다.
“제가 깎는 건가요?”
- 네, 저희랑 같이요.
“오오! 옵바, 힘내. 그거눈 꼭 이뿌게 만들어야 대. 선물루 줄 거란 말이야.”
작업 난이도를 한껏 올려놓은 5세는 뒤에서 부담을 팍팍 주고 있다.
“선물? 누구 선물?”
“영히씨 선물. 그리구 영히씨두 선물 주는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일까.
신경 쓰이지만.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하는 것은 지점토 쪽이었다.
혜원씨와 연우씨의 말에 따르면 이것으로 러프하게 형태를 잡고는 목재 공예 작업을 따로 들어간다고 했다.
아마 굳이 필요한 과정은 아님에도 체험 형식으로 진행하느라 넣은 과정 같은데.
윤슬이는 직접 참여할 수 없으니 꼼짝 없이 내가 하게 되었다.
이런 쪽엔 소질이 없는데 말이다.
“해워니 언니.”
- 응?
“이걸루 언니랑 여누 아저씨가 나무루다가 만들어주는 거지? 윤스리한테.”
- 그렇지.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언니가 윤슬이랑 주현씨한테는 공짜로 만들어줄 거야. 왜냐면 언니랑 연우 아저씨 도와주러 온 거니까 오늘은.
목재 공예 체험교실을 열기 전에 우리 남매와 함께 진행해보면서 그 과정을 보안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이번 작업물은 공짜로 해주시겠다고 제안했었다.
“공쨔? 움... 그거눈 갠짜는데. 이걸루 선물 주므는 조아하겠찌? 옵바.”
“영희씨한테 선물 줄 거라며?”
“웅... 그리구 영히씨가 선물 주눈 고야.”
글쎄.
영희씨가 선물을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아직 한글에 서툴러서 무언가 잘못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됐건 선물을 주는 거라면 기뻐하지 않을까요?”
“왜여?”
“왜냐면 윤슬이가 이걸 만들려고 같이 노력했잖아.”
“옵바가 지금 하구 있짜나. 윤스리눈 아무 껏두 안 해써.”
“아냐. 오빠는 그냥 윤슬이가 만들려고 했던 걸 도와주는 것뿐이잖아. 뭘 만들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윤슬이가 정했지?”
“그거눈 맞찌...”
“그게 중요하고, 소중한 거야. 왜냐면 그걸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부르거든.”
“마음?”
“응, 마음. 선물은 선물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비싼지보다 거기에 담긴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해. 그리고 그 중요한 걸 윤슬이가 담았으니까. 이 선물은 윤슬이가 만든 거야.”
“움... 윤스리 마음...!”
윤슬이는 작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는다.
5세는 마음이 가슴 속에 담긴 줄 아는가보다.
이에 대해선 대략 두 가지 견해로 갈린다고 알고 있다.
감정은 머리에서 기인한다는 부류와 가슴에서 생겨난다는 부류.
전자의 경우 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은 감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하고.
후자의 경우 슬픈 장면을 봤을 때 가슴이 옥죄이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예로 든다.
그렇게 깊은 사고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세는 후자인 것 같다.
“옵바, 요기가 뜨끈뜨끈 한디.”
“.... 그래.”
오늘도 어김없이 어휘가 풍부한 5세였다.
윤슬이에게 마음에 대해 몇 마디 얘기하다가 다시 지점토 작업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부부 두 사람이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 그냥요~ 윤슬이는 참 좋은 오빠를 뒀구나 싶어서?
혜원씨는 언제나 그렇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옆구리를 푹푹 팔꿈치로 찌르고.
연우씨는 힘을 주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 저 나중에 꼭 주현씨 같은 아빠가 될게요.
“그건 연우씨 뜻대로 하시면 될 거 같아요.”
- 저 그리고 노력 많이 했는데, 예전에 비해 많이 변한 것 같지 않나요?
변했다.
라고 말하면 확실히 그랬다.
윤슬이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자연스럽고 능숙해지시긴 했다.
“몇 달 전에 비하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지신 것 같은데요?”
- 그, 그렇죠?
연우씨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본인의 아내를 똘망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 나 주현씨한테 칭찬받았다!
- 어이구, 아주 잘하셨습니다.
혜원씨는 그런 연우씨가 약간 부끄러운지 건성으로 답한다. 반면 연우씨는
- 이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기는... 멀지 않았으려나? 크흠
라며 그녀의 등에 은근슬쩍 손을 올렸다.
너무 기뻤던 나머지 우리가 있다는 걸 잊으신 것 같다.
연우씨치곤 나름 용기를 낸 행동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혜원씨는 그 손을 거칠게 처내었다.
- 으이구, 이 양반아! 작업에나 집중해. 손님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움? 여누 아저씨 이제 아빠가 대눈 거야?”
그 짧은 사이에 윤스리는 주워듣고 말꼬리를 잡아버렸고. 신혼부부는 얼굴을 밝히며 작게 헛기침했다.
그런 행동을 보고는 5세는 이해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래도 동생이 이해하기엔 너무 이른 내용이었다.
**
시간이 흘러.
이전에 목재 공방에 부탁드렸던 공예품이 도착했다.
오늘의 장사를 끝내고 집에 도착하자 택배 박스가 문앞에 놓여있었다.
집에 도착한 우리 남매는 곧바로 택배 박스를 풀었다.
그날 부부와 만들었던 지점토 모형보다 훨씬 섬세하고 깔끔한 모형의 목재 조각상이 들어있었다.
“오오! 이거야.”
윤슬이는 곧바로 품에 소중히 안는다.
“이걸루 영히씨한테 조야지 대겠다.”
시온은 우리와 함께 귀가하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은 그러하듯, 오늘밤은 길에서 보내겠다고 말한 것이다.
또, 시후네 집 근처를 맴도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번에 은근슬쩍 시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다시 되돌아와서는 마주칠 엄두가 안 난다는 말을 했었다.
-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으로 시후를 봐야할까.
영희씨, 그러니까 시온은 지금 시후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다고.
그렇게 고백했다.
- 난 시후를 상처줬어.
윤슬이가 내 무릎을 배고 낮잠을 자던 때였다.
한가로운 오후.
가게엔 우리 세 사람밖에 없었다.
- 오래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더라. 삶이란 게 늘 자기 멋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이런 말하면 고양이 주제에 너무 건방진가?
윤슬이에게 들려줄만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온의 마음을.
- 그 아이는 내 보물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늘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배달을 다녀오면 늘 발코니 쪽 테이블에 널부러지거나.
윤슬이를 선배라고 부르며 부려먹는 시온이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처럼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 하지만 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있잖아. 늘 하늘 너머에서 지켜봤거든. 그 아이는 의젓한 척하면서도 아직 일곱 살밖에는 안 됐다는 말야. 그래서 늘 혼자 있을 때만 울어.
그녀의 쓴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누가 자기 걱정하는 게 미안하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 좋은 아이여서 그런지. 부모님이 늘 자기를 걱정했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자기가 우는 모습을 보면 걱정할까봐, 시후는 방에 혼자 있을 때만 울어. 그런 아이야, 시후는.
시후와의 추억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시온, 고양이의 눈가에 눈물이 얕게 맺혔다.
- 그래서 내가 숨을 거둘 때도, 내 장례를 치룰 때에도 울지 않던 시후는.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만 울어. 그것도 자기 전에. 부모님이 모두 잠에 들고. 자기 혼자 방에 남겨져있을 때만 울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래. 시간이 조금 지난, 아직까지도 그래.
고영희씨, 시온은 고백한 것이다.
밤에 우리와 함께 퇴근하지 않는 것은 사실 시후를 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그건 전혀 잘못도 아니었고.
실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태껏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전혀 그럴 일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시온...”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시온은 오늘 우리와 함께 귀가하지 않았다.
“움! 맞어.”
“응? 뭐가 맞어?”
내가 작게 시온이라고 중얼거린 것에 윤슬이가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윤스리가 영히씨한테 이거 선물루 주기루 해써. 윤스리 마음을 담아써. 이제 이걸루 영히씨가 선물 주므는 대?”
저번부터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다.
도대체 우리가 영희씨한테 선물을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영희씨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윤슬이가 내 궁금증을 읽었는지.
금세 말을 덧붙인다.
“이거 영히씨가 시후한테 주므는 대.”
“영희씨가 시후한테?”
“웅, 둘이 다시 칭구야. 이제. 한 번 헤어졌지마는. 이제눈 아니야. 이걸루 오래오래 다시 칭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