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리고 모험은 다시 시작된다(4)
밤길은 늘 그렇듯 적적했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과 고양이로서 느끼는 것은 조금 달랐지만 고영희씨, 시온은 어느 쪽이건 이 고요함을 즐겼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만 같은 감각.
도심을 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시온에게 그 고요는 자유였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 자유의 발걸음 끝에 닿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있다.
시후네 집.
- 시후야.
창 너머에서 들리지 않을 음성을 뱉어보았다.
저 투명한 것은 투명한 주제에 여러 가지를 막아버린다.
빗물, 발바닥, 낙엽, 목소리 등등.
그걸 깨닫게 된 것은 아직 길고양이던 시절이다.
시후의 몸보다 약간 작게 벽에 뚫린 창 안쪽으로, 모습이 보인다.
달빛이 비추는 시후의 얼굴.
눈이 약간 붉고, 부어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훌쩍 자라있었지만, 여전히 시후는 시후였다.
- 저기다 두었구나.
시후가 잠들어있는 침대의 반대편.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후를 위해 마련된 책상이 있다.
그 바로 윗편에서부터 눈에 익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시온의 마음을 담은 편지였다.
단 한 줄밖에 적을 수 없었지만.
그 한 줄이 모든 마음을 담았었기에 후회하진 않았다.
[넌 내 10년의 모험 끝에 찾아낸, 유일한 보물이야. 언제나 사랑해.]
- 낮간지럽네.
다시금 보니 닭살이 돋을 뻔했다.
물론 지금은 고양이의 모습이었으므로 닭살이 돋을 리는 없었다.
사실 저 편지를 적게 된 것도 그 남매의 덕분이었다.
- 윤슬이가 그랬던가.
‘몬가 남기므는 좋케써...!’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땐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형용하기 힘든 예감과 함께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
아무튼 시후에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주었다고, 자기 나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슬이와 주현이는 서울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사나운 인간들에 비하면 훨씬 유순하고 자상한 아이들었다.
그래서 더욱이 마음이 놓였다.
- 남기긴 뭘 남겨.
‘시후가 보구 시오니를 기억할 쑤 있게. 몬가를 남기는 게 조아. 꼭 그래이지 대.’
윤슬이가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기 전까지,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진 않았다.
홀가분했던 만큼이나 자기 스스로 놓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다섯 살짜리 꼬맹이의 말이 틀렸단 생각이 들진 않았고.
결국 그 고집에 따라 생에 처음 편지라는 것을 적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있어도 결국 글은 쓸 줄 몰랐고.
주현이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 아직까지 갖고 있어줘서 고마워.
포스트잇에 써두길 잘했다고, 시온은 생각한다.
그 덕에 책상 위쪽 벽에 단단히 붙여둘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시후네 부모님은 모를 것이다.
저 편지의 송신자가 누구인지.
- 저걸 직접 읽더라도 송주현의 배려심 깊은 거짓말 정도로 착각하겠지.
시온은 몸을 둥글게 말고는, 창가에 드러눕는다.
시후네 방의 창가는, 다소 비좁지만 몸을 뉘일 만큼의 공간이 있었고.
그곳은 종종 시온의 자리였다.
지금은 시후가 자고 있으니 이렇게 누워있어도 괜찮지만.
- 시후가 일어나기 전엔 오누이 식당으로 돌아가야지.
자신의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조금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 시온에게는 최선이었다.
언제까지인지는 알 수 없을 최선.
앞으로 영영, 이것이 최선인 채로 지내야할지도 모른다.
시후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성인이 되고, 어쩌면 시후만한 자식이 생길 때까지.
이렇게 지내야만 할지도 몰랐다.
만약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시온이 아니더라도, 고영희로서 시후를 만나게 된다면.
- 어떤 말로 인사를 해야할까.
한 번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던 시후에게, 저 작은 아이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건네야만 할까.
시온은 줄곧 그런 고민을 머리 속으로 되뇌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영히씨! 인나야지.”
- 으응?
“이제 일해야지 대거둔.”
다음날이 되었다.
새벽동이 틀 때쯤 관성처럼 오누이 식당 앞으로 되돌아왔었다.
그리고는 다시 잠에 들었는데, 어느새 남매가 돌아온 듯했다.
시온은 몸을 길다랗게 늘어뜨리며 기지개를 켜곤 남매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 아이고... 뻐근해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고영희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쭈욱 핀다.
- 밖에서 자고 나면 삭신이 쑤시다.
인간들이 왜 그렇게 집을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다야 집 안에 있는 푹신한 방석 위에서 숙면하는 게 여러 모로 일어났을 때도 개운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시후네 집에 들르는 것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영희는 뻐근한 몸을 가누며 주방으로 향한다.
포장용기를 정리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 식당에서 맡은 업무인만큼 제 역할은 해야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무튼 남매에겐 신세를 지고 있으니 말이다.
“영희씨 잠깐만 이리 와볼래?”
- 갑자기? 나 저거 정리해야 되는데.
“잔깐만 와보라구! 영히씨! 오래눈 안 걸리눈데.”
드물게도 남매가 장사 전부터 고영희를 불러세웠다.
보통은 점심 장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말이다.
부랴부랴 남매 앞으로 향한 고영희.
그녀에게 윤슬이는 무언가를 덜컥 내민다.
- 이게 뭐야?
“선물!”
- 선물? 윤슬 선배가 나 주는 거야?
“그렇타.”
고영희는 5세에게서 선물을 받아든다.
목재 조각상이었다.
자전거를 탄 고양이가 별을 들고는 신나게 웃고 있는 모형이었다.
자전거를 탄 고양이.
자전거를 탄 고영희.
누굴 보고 만든 건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 이거 나지?
“움...! 역씨 영히씨, 바루 알아써. 디게 똑똑허당.”
- 근데... 별?
고양이가 별을 보며 이쁘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조금 어색해보였다.
자신이 배달을 할 때 이토록 기뻐보이는 얼굴이진 않을 텐데 말이다.
또, 만약에 고영희가 배달하는 도시락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왜 굳이 별모양을 택했을까.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목이 모게?”
- 제목?
“웅, 이거 이름이 모게? 맞처바.”
대략 고영희, 자신을 보고 만든 것이란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그 조각상에 제목까지 붙였다면 거기까지 추측하긴 아무래도 어려웠다.
- 글쎄, 제목이 뭔데?
별 감흥 없이 묻던 고영희는 되돌아온 답에 잠시 숨을 죽였다. 그 답을 듣고 나서야 왜 고양이가, 고영희가 별을 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쪼끔 있으므는 시후가 올 꺼야.”
- 뭐?
“어제 약쏙해써. 시후 오늘 가게루 놀러오기루.”
올 것이 왔구나.
그것도 꽤나 갑작스럽게.
고영희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 식당에서 일을 한다면 결국에 한 번쯤은 시후를 마주칠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오늘은 배달 업무는 없어. 저거 포장 용기 정리 안 해도 돼.”
- 배달이 없다고?
젠장, 도망갈 길도 없어졌다.
배달 업무가 주어진다면 시후가 가게에 있을 잠깐 동안 나가 있을 핑계라도 되는데 말이다.
고영희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매는 기어코 시후와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계획이란 걸.
“이거 윤스리가 영히씨한테 준 거눈 비미리야.”
- 비밀?
“웅, 이거눈 영히씨가 만든 걸루 해. 그리구 시후한테 전해조.”
- 이걸, 내가 시후한테?
“웅, 그게 좋케써. 그게 윤스리 마음이야. 윤스리 마음을 담아서 열씨미 옵바랑, 해워니 언니랑, 여누 아저씨랑 만들어써. 그니깐 꼭 전해질 거야. 시후두 기뻐할 꺼야. 윤스리는 믿어.”
순수하게 고맙단 말밖에 전할 수 없었다.
가볍게 그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준비되어있건 그렇지 않건, 이 두 남매가 결국 시후와 자신을 위해준다는 사실은 변함 없었다.
정말이지.
- 고마워, 진심으로.
우연이다.
이 둘을 만나게 된 것은 시후와 만나게 된 것만큼이나 우연이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 둘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고영희 자신에게 보물이 되어있지 않을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생각한다.
“시후 오므는 꼭 전해조이지 대?”
윤슬이의 말에 고영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고양이는 원래 낮짝이 두꺼워서, 이런 역할엔 오히려 잘 맞을지도 몰라.
한 번은 상처를 주었던 그 아이에게 다시 다가가는 것은 뻔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전심전력으로 뻔뻔하고 싶었다.
그렇게 낮짝 두꺼운 것이야말로,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시온은 조소했다.
**
시후가 가게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고영희는 시후를 알고 있지만.
시후는 고영희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시후는 그녀와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가 왜 그토록 벅차오르는 듯한 표정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굳이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 누나는 누구에여?
- 나? 난 고영희.
- 고영희? 고영이?
- 고, 영, 희.
주현이가 지어준, 당혹스러운 이름을 한 글자씩 띠어 읊는다. 시후는 그 이름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지 동그란 눈만 껌뻑인다.
- 너는 시후지? 정시후.
- 응? 어뜨케 알았지?
- 윤슬이가 네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알아봤어.
- 응... 윤슬이가? 그렇쿠나. 근데 영히 누나는 여기서 모해여?
- 난 여기 직원이야. 앞으로 여기서 일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앞으로 조금 오랫동안 더. 날 보려면 여기로 오면 돼. 시후야.
- 응?
일곱 살, 정시후는 굳이 왜 이 여자가 그런 말을 구구절절 설명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에 애처로움이 어려있다는 게 어렴풋 보여서. 고개만 끄덕였다.
- 이거, 선물이야.
- 선물이여? 저한테?
- 응, 너한테. 네가 오면 꼭 주려고. 열심히 만들었어. 받아주라.
시후는 선물을 받아든다.
그것을 유심히 살피더니 눈썹을 까딱인다.
입술이 떨린다.
소리가 샌다.
- 시온...?
확실히.
그 조각상은 고영희를 본따서 만들었다.
시온을 본따서 만들었다.
자연스런 반응이다.
- 혹시 말이야. 이거 줄 테니까. 나랑 다시 한 번 친구해줄래?
- 친구...?
- 응, 친구. 그래도, 괜찮지?
다시 한 번.
그 네 글자가, 시후는 신경 쓰였다.
그러나 그런 것에 집중할 만큼 시후의 마음엔 여유가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조각상이 너무도 시온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또, 눈 앞에 있는 영희 누나.
이 누나도 이 조각상과 미묘하게 닮아있었다.
그래서일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 친구, 해주세여.
- 응.
- 저랑 친구해주세여, 영히 누나...!
-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 저두 사실 친구 별루 없어서 고마워여. 히히...
머쓱하게 웃는 시후의 머리를, 고영희는 쓰다듬는다.
그 머릿결이 손가락을 스칠 때마다 더욱이 그립고 정겹게 느껴진다.
- 잘 부탁해, 시후야. 앞으로도. 쭉. 되도록 오랫동안.
이윽고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시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원래는 아이 쪽의 손이 고양이 앞발보다 더 컸는데.
지금은 달랐다.
고영희의 손이 시후의 손을 뒤덮고도 남았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오누이 식당의 남매는 흐뭇하게 웃는다.
“윤슬이 마음이 전해졌네?”
“웅...! 다행이다. 진쨔루 다행! 옵바 말대루 윤스리 마음이 전해져써. 소중한 마음이 전해져써.”
시후의 품에는 목재 조각상이 들려있다.
우리가 지은, 이 목재 조각상의 이름은.
[모험가 고양이는 보물을 되찾았다. 그리고 모험은 다시 시작된다.]
요근래엔 제목이 길어지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 남매가 지은 이름치곤 제법 괜찮은 축에 들었다.
고양이의 보물, 그 반짝이는 별.
소행성 안에는 한 명의 외로운 어린왕자가 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외롭진 않을 것이다.
모험가 고양이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모험가 고양이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별에 사는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났으니까.
인연을 되찾았으니까.
송주현은 작게 읊조린다.
목재 조각상에 붙은 이름처럼.
“그리고 두 사람의 새로운 모험이 다시 시작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