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훔~쓰?(1)
[내가 봤을 때는 그래. 저 남자는 지금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자를 식사에 초대한 거야.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남자의 손을 봐. 그는 농부야.]
와작- 와작-
부시럭부시럭...
[그래, 당연히 그것만 갖고 모든 걸 판단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각각 주문한 음식이 뭔지 보라고. 이미 대부분 먹어버렸긴 했지만... 명백한 건 저 여자 쪽이 훨씬 비싼 음식을 많이 주문했다는 거야. 남자가 체구가 더 큰 데도 말이지. 재미있지 않나?]
부스럭...
와작- 와자작!
[날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마.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것뿐이니까. 나도 이런 내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와작!
“움... 이거 팝콘 디게 마시써.”
5세는 눈을 TV 화면에서 떼지 않고 팝콘을 한 움큼씩 무호흡 취식 중이다. 그 기세가 엄청 나기에 나는 팝콘 봉지 안에 단 한 번도 손을 넣지 못하였다.
분명 TV 앞에 앉기 전에 저녁을 함께 먹었던 것 같은데, 이 먹성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우리 남매는 이벤트로 공개된 특선 영화를 보는 중이다. 평소에 집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인지라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그게 이번 건과 무슨 관계가 있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추리 영화다.
영국 소설가의 원작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한 것인데, 워낙 IP가 유명한 덕에 드라마나 만화 등으로 많이 번져나가기도 했다.
그 영화의 제목은.
“헤이 훔~쓰!”
마침 윤슬이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따라서 주인공의 이름을 따라부른다.
영화의 내용 자체는 아이들이 보고 이해할만큼 얕지 않지만 윤슬이는 본인 나름의 재미 포인트를 찾아냈는지 미간까지 좁혀가며 영화 관람에 열중하고 있다.
그 집중력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내려올 때까지 좀처럼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흐아...””
동시에 무겁게 심호흡하는 남매.
숨이 턱 막혀올 정도로 제법 긴장감 있는 영화였다.
방 안의 불을 키고 기지개를 켠다.
장장 2시간 동안 몸이 굳어있던 터라 어깨죽지부터 승모까지 찌뿌둥하다.
“으으으으윽....”
팔을 길게 위로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데.
내 감각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보세요, 5세.”
“움! 윤스리! 5세!”
본인을 부르는 것을 곧바로 인지하고 내 앞으로 쫄래쫄래 다가온다.
“이쪽으로 와봐, 오빠가 얼굴 닦아줄 테니까.”
입 주위를 보니 여지 없이 팝콘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먹었다. 어니언 플레이버의 팝콘에 촘촘히 묻어있는 가루가 인중부터 턱밑까지 골고루 흩어져있다.
닦으려고 물티슈를 뽑았더니 윤슬이가 한 손을 앞쪽으로 쭉 내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거 아니거둔.”
“응? 그게 아니라고?”
“그렇타. 잔깐만 바바.”
윤슬이는 자기 손으로 입가에 있던 가루를 툭툭 만져보며 위치를 확인하더니 혓바닥을 내밀어 입 주변의 팝콘 가루를 쓸어담는다.
핥핥핥핥...
“츄릅! 우물우물... 짜, 짜당!”
“그야 당연히 짜지.”
“근데 짠 게 마시써.”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한데.”
벌써부터 달고 짠 걸 그렇게 좋아해서야.
미래의 식습관이 걱정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편식은 그다지 안 하니까 다행이긴 하다만.
- 뭐가 짠데? 늬들만 먹니? 나도 좀 줘봐.
영화 관람 내내 우리 뒤쪽에서 잠을 청하던 시온이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로 입만 연다.
눈은 반쯤 열고 우리를 곁눈질한다.
“팝콘 가루야. 이걸 어떻게 먹어, 짜서. 절대 안 된다.”
아직 팝콘 봉지 안에는 부시러기와 함께 시즈닝을 위해 넉넉히 포함된 팝콘 가루가 들어있었으나 이걸 고양이에게 먹일 수는 없었다.
나는 녀석이 잽싸게 다가와 목을 들이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쓰레기통으로 가져가 버렸다.
“후... 이러면 못 먹겠지?”
그러나 윤슬이는 뭔가 불만이 있는가보다.
“영히씨만 못 먹는 거눈 넘무하자나! 이거가 을매나 마시 있눈데.”
라며 갑자기 고양이의 몸을 덥썩 들어올린다.
- 으응?
영문을 모른 채 시온은 윤슬이 품에 안겨버렸다.
팔을 부들부들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시온을 품에 안으면서 무언가 귀에다가 속닥인다.
속닥속닥-
속닥속닥-
- 아아... 그렇게 하라고?
“움...! 영히씨 출똥!”
두 꼬맹이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그러나 딱히 위협이 되진 않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일은 순식 간에 벌어졌다.
시온은 점프하여 내 팔을 타고 오르더니.
- 실례.... 핥! 핥!
“으악!”
내 입가를 핥아버렸다.
고양이의 핥기 공격에 정통으로 당해버린 나는 힘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고.
“바루 지금이닷! 옵바룰 공격해!”
기세 좋게 돌격한 5세는 시온과 함께 내 입 주위에 있는 어니언 맛의 팝콘 가루를 마구 핥아댔다.
지금 막 음식물을 잔뜩 섭취한 터라 더욱이 진한 침이 진득하게 입가를 적셨지만.
왜일까.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폼클렌징을 활용해 빡빡 세수를 해야만 했다.
5세와 함께.
**
다음 날이 되었다.
“윤슬아, 오빠 다녀올게. 영희씨. 가게 좀 보고 있어줘.”
- 오냐. 다녀와라, 사장.
“윤스리만 미더. 가게두 영히씨두 윤스리가 잘 보구 이쓰니까는.”
우산을 챙겨 가게 밖으로 나왔다.
흙과 섞인 물의 냄새.
비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이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윤슬이와 함께 우비를 입고 산책을 나갔던 순간이 강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묘한 안정감에 안겨든 채로 우산을 편다.
그리고 가게 저편에 있는 시장으로 향했다.
점심 장사가 잘 된 터라 채소가 조금 모자라졌다.
구매하러 가는 길이다.
“흐으... 춥구만.”
가을비는 공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가뜩이나 쌀쌀해서 이제 외투를 챙겨야만 하는데, 비까지 오니까 야외로 나가기 싫어지는 상황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윤슬이는 가게 안에 두고 출발하는 길이다. 영희씨에게 부탁했다가는 제대로 된 양의 재료를 사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애초 조리 담당은 나니까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되기도 한다.
“이 차가운 빗속에서 내 마음을 달래줄 것은 이것뿐인가...!”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 대충 쑤셔 박고 나온 것을 꺼내어 한 모금 마신다.
혼자 나서는 길, 입이라도 심심하지 않게 가게 냉장고에서 챙겨온 것이다.
“이러니까 윤슬이가 환장하지.”
바로 이 행동 때문에 우리 식당이 사건 현장으로 뒤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오누이 식당 사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
가게는 기분을 해하지 않을만큼만 어수선했다.
고영희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두 여자 때문이었다.
- 아하, 그러면 영희 언니는 여기 취직하기 전까지는 여행하고 다니셨던 거예요? 되게 로맨틱하네.
- 어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내가 원래 길바닥에서 궁구르는 걸 원래 좋아하거든. 가끔 가다가 웅덩이에 있는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 하하하! 무슨 언니가 고양이에요? 이름을 이용한 농담이죠?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권수영은 고영희를 보고는 계속해서 질문을 잇는 중이다. 그녀는 오누이 식당이 개업할 때부터 자주 들렀던 단골인 터라 새로운 직원이 생겼다는 게 반가운 것이다.
워낙 이 식당에 정도 들었으니 말이다.
- 그럼 왜 여행을 그만둔 거예요?
- 야, 권수영. 너무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는 거 아니야. 원래 나이 먹다보면 이런 사정, 저런 사정 하나씩 생기는 거라고.
옆에 있던 권수영의 담임, 김미정이 제지한다.
- 에이, 좀 물어볼 수도 있죠. 친해지자고 물어보는 건데요. 괜찮죠? 언니.
고영희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 여행의 목적을 이뤘거든. 되게 오랫동안 찾던 게 있었는데. 누구들 덕분에 운 좋게 발견해서 이제 여행할 필요가 없어졌어.
- 오오... 누구 덕분?
“움...? 윤스리?”
5세는 어른들의 대화에 한 마디 끼어들어주고는 갑작스레 갈증을 느낀다.
가을이 되면서 실내의 온도를 덥히기 위해 난방을 해두는데, 이것 때문에 여름보다 되려 갈증이 심하게 났다.
정수기를 너머 자연스레 냉장고로 향한다.
“쿠쿠... 지금 옵바가 업따는 말씀!”
슬쩍 눈치를 본다.
발코니 쪽 테이블의 세 여자는 떠들기 바쁘다.
지금이 기회라고 볼 수 있다.
“히히... 아까 쪼코 3개 다 묵었눈뎅.”
잠시 동안 잊혀져 있던 규칙.
5세는 하룻동안 섭취할 수 있는 초콜렛이 제한되어 있다. 이를 썩지 않게끔 정한 규칙인데.
가끔 누군가에게 간식을 선물 받거나 하면 그 규칙에 예외가 생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간식 섭취는 송주현에게 제지당한다.
허나 지금은 송주현이 식재료 조달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히히히... 흐하하! 아무두 눈치를 못 채구 있따.”
즉, 냉장고로 향하는 길은 현재 보안 상태가 매우 취약하다는 뜻.
순조롭게 주방 냉장고의 아랫 칸 문을 열어젖힌다.
그곳엔 아껴두었다 먹으려고 쟁여둔 맛짱짱 우유 초코맛이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었는데.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는데?
“왜... 업찌?”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두리번.
두리번.
“옵바가 딴 데루 옴겼나? ... 그치만.”
그럴 리는 없었다.
오빠는 냉장고를 정리할 때 나름의 규칙을 세워둔다.
늘 같은 칸에 같은 음식을 놓아둔다는 얘기다.
윤슬이의 간식에도 그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방 냉장고의 가장 아랫칸, 그곳은 반드시 윤슬이의 간식을 보관하는 곳이다.
신장이 짧은 5세가 이용할 수 있게끔 배려한 장소란 얘기다.
그 정도까지 배려해주었는데, 멋대로 간식을 옮길 리는 없었다.
“그렇타므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누가 윤스리 꺼룰, 마음대루 머거따...!”
마땅히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
“이것만쿰은! 요, 용서할 쑤 업따.”
보통의 초콜렛이라면 누가 먹는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 아량은 5세에게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5세가 가장 좋아하는 맛짱짱 우유 초코맛.
심지어 아껴 두었다 먹으려고 쟁여둔 것을 누군가가 멋대로 먹었단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중범죄였다.
중범죄.
범죄.
나쁜 일.
그리고 그 연상은 5세에게 지난 밤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움... 샬록 훔~쓰?”
정황을 잠깐 살핀 것만으로 누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며,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 그의 추리는 경이로웠다.
물론 5세는 그 내용 전반에 대하여 90% 정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훔쓰가 멋있어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5세는 멋있는 것을 매우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탐정으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
“쿠쿠쿠, 윤스리가 누가 버민인지 파헤쳐주겠따!”
5세는 어느새 자신의 최애 간식이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탐정스러운 도구들을 찾으러 주방 밖으로 흥겹게 걸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