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훔~쓰?(2)
“우우우으으...!”
- 응?
“이거가...! 넘무 노파... 안 닿눈다! 옵바! 도움!!”
애써 도움을 요청했지만 송주현은 현재 가게를 비우고 있었다. 그 탓에 자동적으로 5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 무슨 일이야, 윤슬 선배.
“영히씨! 도움! 저거가 안 닿눈다.”
고영희였다.
5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은 거치형 행거의 꼭대기였다. 그곳엔 이따금씩 아침에 머리를 감는 것을 잊었을 때 송주현이 활용하기 위해 비치해둔 볼캡이 있었다.
그것을 고영희가 꺼내어주자 윤슬이는 만족스럽게 받아들더니 머리에 얹어본다.
그러나.
훌렁-
모자는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잉?”
다시 얹어본다.
그러나.
훌렁-
다시 떨어져버렸다.
“이익! 안 써지자나.”
- 머리가 작아서 그래. 잠깐만 이리 줘봐. 이런 건 나도 할 줄 알거든.
5세의 두상이 지나치게 작은 나머지 송주현의 사이즈로 맞추어놓은 볼캡은 훌렁훌렁 벗겨지게 되었다.
고영희가 모자 뒤쪽의 끈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나서야 5세는 어떻게든 볼캡을 머리 위에 얹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헐렁거렸지만, 나이대에 비해 풍성한 머리카락 덕에 흘러떨어지진 않았다.
“하핫! 만죡.”
환히 웃으며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 세면대 앞의 앉은뱅이 의자를 밟고 오른다.
그 영화의 탐정, 주인공이 쓴 것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인었다. 그 탐정은 사냥용으로 제작된 헌팅 캡을 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챙이 훨씬 짧았다.
그럼에도 5세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아무튼 모자를 착용했다는 점이 그와 비슷했기에.
“그 다음으루는...”
케이프가 달린 코트가 필요했다.
바쁘게 뛸 때마다 바람에 뒤로 날리는 케이프가 특징인 코트, 그것 또한 탐정의 외모적 특징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코트는 근래에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다. 5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한 가지를 떠올린다.
“움...! 이거룰... 이케, 이케 하므는.”
길고, 크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갈색 레이싱 자켓에서 팔을 빼어 어깨에 툭 걸쳐본다.
코트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임에도 실루엣이 비슷했다.
워낙 윤슬이에 비해 커다란 외투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므는 나쁘지가 안 차나~!”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이프 담배였다.
탐정의 중후하고도 진중한 멋을 한층 더 살려주는 주요 소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담배를 현대에 와서는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5세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두 그게 업쓰므는 안대눈뎅.”
아무리 모자와 자켓을 활용하여 비슷한 코디네이트를 연출했다고 하더라도 파이프 담배와 유사한 외형의 무언가가 없다면 모자란 느낌이었다.
그래서 5세는 어쩔 수 없이.
“이거룰 머그는 수밖에 업따. 나뿐 게 아니야.”
편의점에서 500원에 판매하는 자그마한 막대사탕으로 타협했다. 입술의 왼쪽으로 빼어물었더니 그럭저럭 담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탕을 먹는 장면을 오빠가 본다면 “윤슬이 오늘 단 거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은데?”
라며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가게에 없으니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 타임어택으로 쪽쪽 빨아먹으면 그만이다.
“쿠쿠... 모든 거시 계획때루다.”
마치 빌런처럼 음흉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사를 뱉어본다.
그리고 유유히 세 명의 여자가 떠들고 있는 발코니 쪽 테이블로 걸어나갔다.
“잔깐만! 윤스리를 바바!”
엄청난 기세로 다가온 5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주얼만 보더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다.
평소에 잘 착용하지 않는 모자를 쓴다던지, 레이싱 자켓을 걸쳐 입는다던지, 막대사탕을 불량하게 물고 있다던지.
그리고 신경질적인 중년 형사처럼 인상을 팍 쓰고 있다던지.
- 윤슬이, 그건 무슨 놀이야?
“노리가 아니거둔. 지금 심각캐.”
- 심각하다구?
권수영이 나름 다정하게 물어보지만 5세는 한층 더 무게를 잡는다. 폐에 공기를 불어넣으며 목소리도 깔아내리는 중이다.
“지금 누가 윤스리 꺼룰 훔쳐먹었거둔.”
- 윤슬 선배, 뭘 훔쳐 먹었길래 그래?
“윤스리가 젤루 아끼구 조아하는. 맛짱짱이 초코맛...!”
- 흠... 그건 확실히 심각한 사태구나. 지금 보이는 진정성, 인정하도록 할게.
권수영과 김미정의 경우 고작 초코 우유 하나 갖고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을 일인가, 싶었지만 상대는 5세였다.
또, 고영희가 동조한 것도 흐름을 타게 만들었다. 그녀는 5세가 얼마나 맛짱짱 우유 초코맛을 아끼는지 알고 있었으며 간식의 문제는 고양이들에게도 꽤나 중대한 일이었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윤스리 기억은 분명해. 아까 옵바가 나가기 금방 전까지만 해두. 맛짱짱이는 있어써. 윤스리가 직쩝 확인해따.”
- 윤슬 선배 말은 즉?
“여기 있눈 세 사람 즁에 한 명이 범이니야!”
5세는 사뭇 진지하고 박력있게 말했으나 김미정 선생은 조소하고 말았다.
진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 그럼 윤슬이 생각엔 누가 범인인 거 같아?
“움...? 그거눈 지금부터 생각을... 해바이지 대눈뎅.”
- 크흐흡... 그래.
기세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탐정이었고, 이 상황에서 웃음을 찾는 것은 고문이었다.
움-
움-
5세는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단서를 더 얻기 위해서 심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영히씨부터! 영히씨눈 특히 수상해.”
- 내가 수상하다고? 이거 섭섭하네.
“잉? 섭섭하무는 안대눈뎅... 아, 앗. 그게 아니지. 훔쓰는 이러믄 안대. 섭섭하무는 안대지마눈, 그래두 이유가 있따!”
- 이유?
“저번에 윤스리가 맛짱짱이 초코 맛을 먹는 거룰 보구. 무슨 맛이냐구 물어바써. 궁금하다구. 그니깐 영히씨가 궁금해서 머겄을 가능성이 있따.”
5세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해본다.
그러나.
- 그건 그랬지. 하지만 난 그때까지 그게 초코맛인 줄은 몰랐어.
“잉? 초코 마시라서 맛이 조은 건뎅.”
-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야.
고영희는 다섯 살짜리 탐정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 고양이는 초콜렛을 먹으면 몸이 아파져... 병원 가야될지도 몰라. 그래서 먹을 수가 없거든.
“아, 아앗!”
그건 아무리 탐정이라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고양이가 초콜렛을 먹어선 안 된다면 결코 고영희씨는 범인일 수 없었고.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거짓을 말할 것 같진 않았다.
“잉... 그렇타므는, 다음으루는.”
김미정 선생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그러자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 나도 아니야. 특별히 증거로 댈 건 없지만,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움...”
이것만큼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만약 옆에 조수가 되어줄 6세 차유민군이 있었다면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현재는 부재 중이었다.
“도우미가 안 대눈 조수로군!”
통탄스러운 5세는 이마를 한 대 비장하게 때려본다.
생각보다 너무 쌔게 때린 탓에 얼얼했다. 몰입이 지나쳤던 것 같다.
- 근데 아마도 사실일 거야, 윤슬아.
“움?”
- 왜냐면 선생님은 저번에 같은 반 애들이 발렌타인데이라고 초콜렛 선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걸 아직도 다 안 드셨거든.
그 옆에 있던 권수영이 나서서 김미정을 변호했다.
발렌타인데이는 2월.
그리고 지금은 11월이었다.
물론 5세는 그 시간의 간격을 정확히 파악해낼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지능을 지닌 탐정은 아니었으나.
단 네 개의 단어만으로도 그 증언을 인정하기로 했다.
초콜렛.
아직도.
안 드셨거든.
“어뜨케 그럴 쑤가 있찌?!”
선물 받은 초콜렛을 안 먹는다는 것은 5세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분명 선생님은 초콜렛 맛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마지막 용의자는.
“수영이 언니가 버민이구나!”
- 애석하게도 이번만큼은 아닌 것 같다.
“그럴 리가 업써. 왜냐믄 영히씨랑 선샌님은 절때루 버미니가 아니야. 그러믄 남은 거눈 수영이 언니밖에눈 업거둔.”
- 아아... 그 말은 맞긴 한데. 그래도 언니가 범인일 수는 없을 거야.
“잉? 또 이유가 몬데.”
- 언니 유당불내증이야.
“움? 유...”
- 유당불내증.
“유당불래... ㅉ... 깨물.”
혀를 강하게 씹어버렸다.
“아앙! 혀 씹어쪄!”
얼얼하다.
혓바닥을 메롱하고 꺼내어 손끝으로 툭- 툭- 건드려본다. 다행히 잘려나가진 않았다.
앞으로도 초콜렛과 옵바의 음식을 먹는 데는 문제 없을 것 같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취조를 이어간다.
“유딩... 그 모시기가 몬데.”
- 우유만 먹으면 배가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돼서 힘들어. 빙수 같은 데 들어가는 정도면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은 한데. 우유를 직접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더라고.
“움...? 그니까는 수영이 언니눈 우유를 못 머근다는 거야?”
- 응, 언니 우유 먹으면 배 아야해.
권수영의 증언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칠 위인은 아니었다.
꽤나 오랜 기간 지내온 사이기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건은 더욱이 미궁으로 빠진다.
“이거슨... 완벼기 범재!”
이것은, 완벽 범죄!
- 윤슬아, 잘 생각해봐.
“모를여?”
- 네가 한 사람 빼먹은 거 같은데?
김미정 선생은 넌지시 힌트를 던지고, 꼬마 탐정은 그 의미를 어렴풋 눈치챘다.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다.
“우리 옵바가 그럴 리가 업써!”
오빠가 자신의 간식을 결코 빼앗아먹는 법은 없다.
더 사주면 더 사주지 뺐어먹는 사람은 아니라고, 강력히 믿고 있는 5세였다.
그런데 신의 장난일까?
때마침 송주현이 되돌아왔다.
덜커덕-
문이 열리고, 바지 자락에 붙은 물방울을 털던 스물 다섯 식당 사장의 움직임이 경직된다.
“분위기가 왜 이래?”
발코니 쪽 테이블에서 네 사람이 모여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들고 있는 손을 머리 뒤쪽으로 올려 머쓱하게 긁적인다.
“오, 옵바.”
“응?”
“설마 옵바가 윤스리 꺼 맛짱짱이를 머근 거눈... 아니겠찌?”
“아, 맞아. 내가 하나 빼갔어.”
“츄... 츙격!”
믿는 도끼에 발등을 쌔게 찍힌 5세였다.
결코 오빠가 가져갔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다.
큰 배신감이 감정을 휩쓸었고, 절망감에 다리가 풀렸다
털썩-
“그럴 쑤는 업써... 옵바를 믿었눈데!”
“아, 뭐야 설마 그것 때문에 누가 먹었는지 얘기하고 있던 거야?”
맞은 편에 서있던 고영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 모습을 보며 송주현은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런 거라면 이미 사건은 해결됐는데요, 탐정님?”
“우움?”
“왜냐면 오빠가 맛짱짱 초코 우유 3개 사왔거든. 2+1 행사 하길래.”
“아, 아앗!”
그렇다면 얘기가 아예 달랐다.
결국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니 말이다.
아무튼 맛짱짱 초코 우유만 마실 수 있다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았다.
“윤스리가 미안해써여. 아무래두 윤스리는 훔쓰가 댈 쑤는 업써.”
엄한 사람 잡을 뻔했던 것에 5세는 배꼽인사를 하며 사죄한다. 세 사람은 꼬마 탐정을 너그러히 용서해주기로 했다.
용서 받은 꼬마 탐정은 오빠의 손에 들려있는 맛짱짱 초코 우유를 뺏어들며 취식을 준비한다.
빨대를 꽂으려는 순간.
“잠깐만요, 5세.”
“움?”
오빠로부터 제지가 들어왔다.
“너 오늘 초콜렛 잔뜩 먹었잖아. 그거까지 먹으면 이가 어떻게 될까요?”
“이잉... 다 썩어버려여.”
“그럼 내일 먹어야 되겠지?”
“하지마는...”
여태껏 맛짱짱 초코우유를 마시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너무도 허무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코 우유의 빨대 구멍을 튿어 오빠의 손에 조금씩 흘렸다.
“응? 뭐하는 거야...”
몇 방울 흐른 초코 우유를 핥! 핥! 핥아먹었다.
최근 핥아 먹는 재미를 배운 5세였다.
“이러므는 맛짱짱이를 머그는 게 아니야. 옵바 손에 묻은 거룰 닦아주는 거지롱.”
배실배실 웃으며 꾀를 부리는 동생에게 두 손 든 송주현은.
“오늘만 특별히 마시게 해주는 거야?”
“히힝! 그렇타!”
초코우유를 마시는 것을 허락했고.
결국 빨대를 꽂아 한 모금 거하게 빨아들인 5세는 흥겹게 선언한다.
“오늘두 작쩐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