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젠 용기를 내고 싶어(1)
보드랍고 폭신폭신한 노랑색 이불.
그 안에 들어간 토마토 케찹 베이스의 치킨 라이스.
5세의 최애 메뉴 중 하나인 오무라이스를 오늘의 메뉴로 정했다.
“우물우물... 이고는 마치...”
- 마치?
“꿀-꺽! 맛짱짱이만큼 마시써.”
- 꽤 점수를 후하게 쳐주네?
“웅, 옵바가 해주는 거 중에 이거는 상당히 마시 조아.”
- 다른 것보다 윤슬이는 이게 더 좋아?
“따른 것두 조아. 근데 이게 젤루 조아.”
토끼 모양이 그려진 유아용 수저로 야무지게 오무라이스를 퍼먹는 윤슬이. 그 옆에 앉아서 구경 중인 두 사람이 있다. 미정 선생님과 그 아들 차유민이다.
“유미니 이거 마시찌?”
- 응, 대게 부들부들하구. 폭씬폭씬하다.
“이거 머그는 거눈 윤스리 덕뿐이야.”
- 윤슬이 덕뿐?
“왜냐믄 옵바한테 쫄라써. 이거 하자구.”
- 그럼 윤스리 덕뿐이네. 고마워.
정작 뜨거운 불 앞에서 열심히 요리한 건 나인데, 감사는 윤슬이가 가로채는 이 형국.
말하자면 참된 동생이다.
- 주현아.
윤슬이와 유민이가 나란히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정 쌤이 내 쪽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귀를 빌려달라고 하신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인다.
- 저 둘이 같이 밥 먹고 있으니까, 키즈 화보 같지 않니?
“왜 그런 말을 귓속말로 하시는 건데요?”
- 그냥, 쟤들만 너무 사이 좋으니까 부럽잖아.
예전부터 이렇게 엉뚱한 구석을 보이긴 하신다. 그런 덕분에 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은 것이지만, 가끔씩 당황스럽다.
- 내가 제안할 게 있어.
“갑자기 뭐를요?”
- 우리 같이 영상 제작하는 거 어때?
“흐름을 보니까, 윤슬이랑 유민이 데리고 동영상 찍어서 너튜브에 올리자는 거죠?”
- 야, 너 어떻게 알았냐? 언제부터 독심술 배웠어...!
“저도 사실 비슷한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거든요.”
가게에 윤슬이랑 둘이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별 상상을 다 해보게 된다. 최근엔 영희씨가 직원에 합류했다보니 그러는 경우가 더 적어지긴 했지만.
윤슬이랑 둘이서 할 때만 해도 몇 가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윤슬이가 워낙 잘 먹어야 말이죠.”
“우물우물... 움?”
지금처럼 5세는 웬만한 먹방 너튜버들 부럽지 않을 정도의 먹성을 보이긴 한다. 물론 백수인씨와 같은 대식가들만큼 많이 먹는 것은 아니지만.
잘 먹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복스럽게 먹고, 또 이쁘게 먹는다.
입 주위에 묻히고 먹긴 하지만 아이인 걸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한 번 너튜브에 올려보는 것도 요즘 트렌드 생각하면 나쁘지 않겠다 싶긴 했는데.”
- 싶긴 했는데?
“안 그러기로 했어요.”
결론적으로 그만두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 이유.
윤슬이의 능력 때문.
지금 윤슬이가 먹는 것이 복스러워보이는 데에는 오누이가 전해준 능력 덕분도 있다.
그 능력을 키고, 너튜브에 송출했다가는 일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능력을 끄고 촬영하는 방안도 생각해봤으나, 그러면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물론 무조건 조회수가 높은 동영상만을 업로드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해보는 거라면 욕심이 나지 않는가.
그런 욕심과 현실이 뒤섞여 애매한 감정이 들어서 그만두게 되었다.
“애들 사생활 문제도 있으니까요.”
- 에이, 아직 애기들인데 무슨 사생활?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요.”
두 번째 이유.
순수하게 동생이 걱정되었다.
괜히 악플이 달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영상에 윤슬이의 소재가 적힌 댓글이 달릴 수도 있다. 그게 단순히 가게 홍보가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걸 악용하려는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들 때문에 영상 촬영은 그만두었다.
- 하긴, 요즘 세상이 위험하긴 하지. 그래도 아쉽다. 윤슬이랑 유민이 커플 키즈 너튜버로 데뷔시키고 싶었는데.
드디어 미정 선생님이 속내를 드러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제 눈에 피가 마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안 됩니다.”
- 슬슬 너도 받아들이라고. 윤슬이는 어차피 나중 되면 유민이랑 잘 되게 되있다니까? 그게 운명이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요.”
미정 선생님은 종종 이렇게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곤 한다. 대화하기가 워낙 편한 분이다보니 잊곤 하는데, 기본적으로 이 선생님은 이쁘고 잘 생긴 것을 매우 좋아한다.
당신의 아들과 윤슬이가 이에 해당하고, 비주얼 커플로서 커플링을 밀고 있다.
당사자들은 별 생각도 없는 결혼까지 입에 담곤 하신다. 두 아이 모두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꼬맹이들이란 걸 감안했을 때, 빌드업이 상당히 치밀하고도 치열하다.
“움? 윤스리 얘기?”
- 응, 윤슬이 얘기. 어때? 윤슬아. 선생님 며느리 하자.
“며누리가 몬데여.”
- 유민이랑, 한 20년 정도 뒤에 결혼하는 건 어때? 너 우리 아들이랑 친하잖아. 원래 어른 되면 제일 친한 남자랑 결혼하는 거야. 지금부터 유민이랑 친한데, 나중 되면 유민이랑 얼마나 친해지겠어? 그치?
“움...?”
김미정 선생님의 궤변에 5세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밀어 거부의 제스쳐를 취한다.
“놉!”
- 놉?
“놉(Nope)!!”
또 어디서 짧은 영어를 주워들은 5세였다.
손님들이 말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배운 것 같다.
“유미니는 윤스리 오른팔이니까는 겨론은 안대.”
- 그건 유감이구나.
- 읏...
왠지 모르게 고백도 안 했는데 차여버린 유민이였다.
솔직히 조금 불쌍하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아직 방심할 순 없다.
조금 더 오빠로서 경계해야 한다.
“선샌님, 선샌님.”
- 응?
그릇을 거의 다 비운 윤슬이가 미정 선생님의 후줄근한 추리닝 팔뚝을 붙잡는다.
“그러믄 선샌님두 젤루 친한 남자랑 겨론해써여?”
- 응... 그랬지.
“움... 그랬꾸나. 그러믄 윤스리두 나중에 생각해보께.”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윤슬이는 그 이상 파고들어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아직 그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미정 선생님은 돌싱이라는 것.
그런 얘기를 윤슬이 앞에서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들어봐야 이해를 못할 테니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었다.
- .... 엄마?
- 괜찮아, 아들.
하지만 유민이는 달랐다.
정작 부부가 이혼하면 가장 큰 충격을 받는 것은 그 자식들일 테니까 말이다.
유민이는 미정 선생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렇다는 얘기는 십중팔구 아빠와는 떨어져 산다는 얘기다.
아직 여섯 살밖에 안 된 유민이가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운 역사일지도 모른다.
- 으휴, 내가 괜한 소리를 했지.
미정 선생님은 본인이 장난 삼아 결혼 얘기를 꺼냈던 것을 약간 후회하시는 듯했다.
애초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윤슬이가 묻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다섯 살을 탓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미정 선생님의 잘못인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해프닝.
사사로운 사고.
“근데 오늘 유민이가 뭐 부탁할 거 있다고, 아까 그러지 않았었나?”
- 응... 아 맞따!
유민이는 그제야 기억 났는지 테이블을 두 손으로 퍽- 친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주제를 바꿔보았는데, 다행히 유민이가 극적으로 반응해준다.
- 맞다, 아들. 너 윤슬이한테 부탁할 거 있어서 왔잖아. 지금 느긋하게 밥 먹고 있을 때가 아니네.
- 응! 맞어.
유민이는 비교적 얌전하게 먹고 있었는데, 속도를 올리며 숟가락에 한 움큼씩 담아서 입에 마구마구 쑤셔넣는다.
몇 번 씹고 삼키더니 윤슬이를 향한다.
“움? 모여.”
- 윤슬아... 나 부탁 이써.
“유미니가 부타기 이써? 그러믄 말만 해. 윤스리는 무조껀 유미니 부타기랑 시후 부타기는 들어조. 칭구니까는.”
- 응! 고마워. 나 있짜나. 용기를 내구 시퍼. 용기 내는 법을 알려줘.
“용기?”
- 응, 윤슬이는 별루 무서운 거가 없짜나. 난 그게 부러워.
유민이가 윤슬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절실해보였다.
평소에 단순히 윤슬이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내가 그걸 신경쓰는 게 티가 났는지.
미정 선생님은 고개를 한껏 기울여 내 쪽을 향하더니 그 사정을 소근소근 들려주신다.
**
6세, 차유민군의 성격에 대해서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단어.
예민, 그리고 소심.
그러나 후자의 성격이 단연 두드러지기에 유민이의 예민함은 좀처럼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다.
가령 유치원 낮잠 시간에 근처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면 그 향에 괴로워하다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다.
자유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뛰거나, 뱅글뱅글 돌거나, 엎어지고, 뛰어오르고, 던지고, 심하면 무언가를 부수기까지.
그런 상황이 근처에서 벌어지면 차유민은 미미한 불쾌감과 현기증을 느끼곤 한다.
활달한 유아들의 소굴인 유치원은, 예민한 유민이에게 그다지 쾌적한 장소일 수 없었다.
“유민이 어머니.... 워낙 유민이가 내성적이고, 낮잠 시간에는 예민한 구석이 있다보니까 유치원 생활이 불편하다고 하진 않는지 모르겠네요.”
매일 같이 차유민을 관찰하던 유치원 선생은 김미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맡고 있는 유치원생에 대한 걱정, 그리고 학부모에게 그들의 생활을 보고해야 한다는 의무감.
반반씩 섞인 문장이었다.
“선생님. 우리 아들은 내성적이고,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하고 조심성이 많은 거예요. 실례지만 말씀 조심해주세요.”
김미정은 무심코 발끈하여 조곤조곤 반박하고 말았다. 유치원 선생, 그녀가 악감정을 갖고 유민이를 나쁘게 평한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민이가 유치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단 것은 누구보다 엄마인 김미정,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치원 선생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격하게 반응하고 만 것이다.
그날은 유민이와 함께 귀가하고서는 꽤나 후회했다. 본인도 고등학교 선생으로서 극성 학부모들에게 시달리는 입장이니까 말이다. 김미정은 동족을 공격해버린 육식동물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들.”
“응?”
“유치원에서 지내는 거 어때?”
“갠차나.”
좋아.
싫어.
가 아니라 괜찮아.
더욱이 신경쓰였다.
괜찮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곧 무언가를 견디는 사람이 아니던가.
“유치원 다니지 말까?”
“으응... 아니야.”
“왜?”
“엄마 바쁘자너. 그니깐 아침에는 유치언에 이써야지.”
담백하고도 담담하게 사실만을 받아들이듯, 유민이는 그렇게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유민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다면 맡길만한 곳은 얼마 없었다. 며칠 정도는 제자인 주현이네 식당이나 시후네 집에 맡아달라고 해도 될 것도 같은데 그래봐야 며칠이었다.
부모님과는 이혼 이후로 냉전 중이라 선뜻 맡아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방법?”
허나 김미정은 이럴 때 결코 포기하거나 풀이 죽는 성격이 아니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뀌어야 하는 쪽은 인간이다.
“아들, 엄마가 바뀌어볼게.”
“응? 갑짜기?”
“오늘부터 호랑이 어미 교육법 바로 들어간다!”
“???”
호랑이 어미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벼랑 끝으로 밀어 떨어뜨린다는 얘기는 속담으로써 익히 잘 알려졌듯이.
대충 벼랑 밑으로 떨어뜨리겠단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