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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150화 (150/200)

150화: 행복 상자를 만들까요?(4)

복받쳐오르던 감정을 추스르고, 시후네 집에서 여러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시후의 행복 상자는 무사히 완성됐다. 고영희씨와 약속한 대로 상자와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시후는 다짐했다.

그리고 가을철의 해가 느지막이 떨어질 때쯤, 시후네 집에서 우리 남매는 나오게 되었다.

반면 고영희씨는 고양이답게 약간 뻔뻔했다.

- 나는 시후네 집에서 저녁 얻어먹구 갈라니까, 유민이네 행복 상자는 잘 부탁해.

라며 저녁 식사까지 대접 받을 생각이었다.

재밌는 것은 시후네 어머니와 시후가 전혀 망설임 없이 저녁 식사를 함께 먹는 것에 대찬성하며 기뻐했단 것이다.

고영희씨에게서 시온의 그림자를 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 좋은 시후네 집안 사람들인지라 흔쾌히 허락해준 것인지.

그 마음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되게 좋아하시더라.”

“움?”

“시후랑 시후네 어머니 있잖아.”

“그렇타. 영히씨가 밥 먹구 간다구 그러니까눈 시후가 박쑤 치믄서 조아해써.”

시후네 가족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결국 그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만나는 횟수를 늘려나가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움... 첨 와본당.”

“그러게.”

그리고 어느새 우린 유민이네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평범한 빌라 건물 안에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우리 집과 비교하자면 조금 넓은 수준이었다.

15평 내외? 두 명이서 산다면 이 정도 크기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아... 송주현이, 우리 집엔 학교 제자들도 잘 안 들이는데. 너 운이 좋은 줄 알어.

“뭘 또 운이 좋기까지나 해요.”

- 주혀니 형아랑 윤슬이가 우리 집에 놀러오는 거 첨이에여! 이때까지는 아무두 안 놀러와써여.

“그렇단 말이야?”

“움?!”

놀랐다.

유민이는 둘째치고, 미정 선생님은 사교성이 꽤 좋으신 편이니까 말이다.

친구들도 아마 많으실 텐데 아무도 집에 데려오거나 하진 않으신 것 같다.

- 나한테 집은 아예 쉬는 공간이거든. 집에 들어오면 완전히 Off 모드야. 그러니까 여기 들어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얘기지.

“아아, 대충 이해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밖에서는 활발한데도 집에만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 침대와 일체화되는 사람들.

미정 선생님이 그런 부류인 듯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라면 친한 지인들을 집에 초대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 몬가 신난다.

“유미니 신나?”

- 응, 왜냐면 친구가 집에 놀러오는 거는 첨이자나.

유민이는 모처럼 들떠보인다. 나랑 윤슬이가 놀러와서 그런 모양이다. 평소엔 좀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민이는 방금 전부터 ‘나난난나’를 반복하며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보기 좋은지 미정 선생님은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그럼 집에선 완전히 Off 모드이신 미정 선생님을 위해서 빨리 행복 상자 만들기 시작할까요?”

-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면 휴일이든 집에서든, 언제든 On 모드니까 좀 느긋하게 해도 괜찮아.

여전히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곱빼기 요리처럼 푸짐한 미정 쌤이다.

느긋하게 하자면서도 발 빠르게 움직여 집안 구석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내오신다.

사실 유민이는 그냥 윤슬이를 봐서 좋은 것 같은데. 되려 미정 선생님이 신나셨다.

앨범, 떨어져나온 배꼽, 돌 때 입던 옷가지들, 유치원 입학 때 사진 등등.

지금껏 많은 걸 간직하고 계셨다.

“뭘 이렇게 많이 꺼내오셨어요...?”

- 유민이 행복 상자라며! 그럼 이것들 다 넣어야지. 전부 우리 아들 과거인데.

유민이의 과거인 것은 맞는데, 굳이 따지자면 유민이보단 선생님이 간직하는 추억인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걸 지켜보던 윤슬이는 움- 움-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절충안을 내본다.

“어짜피 선샌님이 소즁한 거눈 유미니한테두 소중한 거니까는 넣어두 갠짜나.”

5세의 명료한 판결문에 미정 선생님은 박수를 친다.

- 명판결!

미정 선생님의 아들 덕질은 끊일 줄을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이 신이 난 모습을 보니, 유민이도 뭔가 간직하고 싶은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자기 방에 뛰어들어가더니 뭔가를 품에 끌어안고 나온다.

“이고는!”

- 응, 윤슬이랑 같이 입었떤 거다... 히히.

범고래 수영복이었다.

5세와 6세의 커플 수영복(이지만 나는 커플이란 단어를 그 앞에 붙이는 것에 심히 망설인다.).

유민이는 강릉에서의 추억이, 우리 남매도 그런 것처럼 소중했는지 품에 안고 있던 수영복을 고이 개어 행복 상자 안에 넣었다.

그것만 안에 넣어도 행복한지 유민이는 더 움직여서 뭔가를 가져오려고 하지 않는다.

- 아들 그거면 됐어? 이렇게 되면...

분명 유민이의 행복 상자였을 텐데, 왠지 미정 선생님이 챙긴 게 더 많아져있다.

- 응... 난 이거면 괜차나.

- 흑...

미정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신다.

- 어, 엄마! 왜 우러.

- 내가, 미안하다. 아들. 좋은 기억을 많이 못 만들어줘서. 이 정도밖에 행복 상자에 넣고 싶은 게... 없구나. 엄마가 미안해. 못 나서, 훌쩍.

유민이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미정 선생님이 우는 것은 윤슬이가 봐도, 내가 봐도, 연기였지만.

순진한 유민이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나보다. 오히려 우리 집 5세가 또래에 비해 눈치가 빠르다고 봐야하는 지점일까.

- 엄마 그게 아니야.

- 응? 그럼.

- 나한테 소중한 건 저기에 넣을 쑤가 업써서. 그래서 그러는 거야.

- 그렇단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매일 같이 놀아주고 그랬으면 더 넣을만한 게 있었을 텐데.

유민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리고 엄마의 팔을 꼬옥 붙잡는다.

- 난 엄마가 있으면 갠차나. 엄마가 소중하니까 딴 건 간직 안 해두 갠차나.

- 아들...!

윤슬이의 친구답다.

우리 집 5세도 가게에서 나를 기어코 행복 상자에 집어넣었던 게 떠오른다.

우리 남매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씨익- 웃는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유미니! 선샌님!”

- 응?

“윤스리가 사진 찍어주께. 가치 거기 빡쓰에 들어가므는 대게써.”

- 엄마랑 나랑?

“그렇타!”

“행복 상자에 들어가는 건 꼭 물건이 아니어도 괜찮거든요. 유민이랑 선생님은 그러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라요. 행복 상자에 약속하는 거죠. 서로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지켜주겠다고.”

- 으아아... 너무 감동적인데 오글거려. 그래도 감동적이다. 아들! 엄마랑 같이 저 박스에 쪼그리고 들어가보자.

- 응!

선생님은 닭살이 돋았는지 팔뚝을 비비다가 아들내미를 끌어안고 행복 상자 안으로 들어가신다.

좁은 상자였지만,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나도 어떻게든 공간을 마련했듯이.

선생님도 물건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무릎 위에 유민이를 앉히고 양 손으로 브이.

그렇게 모자가 함께 나온 사진 한 폭이 완성되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이 기회에 뭔가를 더 챙겨넣고 싶은지 여기저기서 주워다가 상자를 채우셨다.

특이한 건 유민이의 행동이었다.

“움? 유미니...?”

- 으응?!

“거기따가 모 넣어? 모 까먹어써? 넣을라구 그러다가?”

- 아니야. 쉬잇... 해주라.

“움...?”

유민이는 미정 선생님 몰래 행복 상자에 무언가를 넣고 싶었나보다.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스치듯 보았는데, 염주였던 것 같다.

“...? 유민이가 염주를 가질 일이 뭐가 있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유민이 성격 상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런 물건을 넣진 않았을 것 같았고.

물어보기도 전에 미정 선생님이 돌아오셨으므로.

그 염주를 왜 넣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결국 우리 남매는 유민이네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고. 요리는 물론 내가 했다.

집으로 귀가하는 길.

우리 남매는 하루를 잘 마무리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하며 짝! 하고 큰 소리가 나게 하이파이브했다.

“오늘두 작쩐 성공이야!”

“오늘도 작전 성공이네.”

**

혼자 살기엔 제법 넓은, 방 하나 딸린 집.

황치호가 거주 중이다.

평소와 같은 시간.

원고 작업을 하기 위해 작업용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뭐하시려나.”

본래 일에만 온전히 몰두하긴 어려운 법.

잡생각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오랜만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아마도 오누이 식당의 남매 때문이었다.

칼국수를 먹었더니, 아버지의 등살을 떠올리며 행복 상자의 얘기까지 꺼내게 되었다.

“참... 신기한 식당이지.”

다섯 살짜리 여자애가 마스코트로 있질 않나. 주인장이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라 매일 같이 메뉴를 바꾸지 않나.

언제는 공짜로 고구마를 배 터지게 먹게 해주고.

또, 최근에는 유독 고양이를 닮은 배달 직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소설에 참고하기 좋단 말이야.”

그렇게 캐릭터 성이 뿜뿜 넘치는 식당은 좀처럼 찾아보기 쉬운 장소는 아니었다.

뚜-

뚜-

뚜-

“뭐야... 아빠 안 받으시네.”

일이 바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집필 시간이 꽤나 자유로운 편이다. 저녁 시간이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후... 안 받으시면, 어쩔 수 없지.”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당장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지 않으면 오늘의 할달량 원고를 작업할 때, 자꾸 신경쓰일 것 같았다.

그래서 황치호는 절충안을 시행하기로 했다.

“그걸 내가 어디다 뒀더라?”

잘 찾아보니, 옷장 깊숙이에 박아두었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물건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꺼낼 일이 1년에 한 번.

아니 이사갈 때나 한 번 있는 물건.

철 들고 나서 한 번 열어보기나 했을까.

그렇다.

그토록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대학 생활을 위해 서울로 상경할 때에도.

졸업 이후, 서울의 곳곳을 전세 계약 때문에 전전할 때에도.

이것만큼은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어후, 먼지...”

황치호는 옷장에 박아두었던 상자를 꺼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먼지 쌓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래, 이 상자야.”

또 다른 상자가 들어있었다.

무게가 아주 가볍고.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고, 낡은 옥색을 띠는.

그런 상자였다.

“내 행복 상자.”

황치호가 간직하고 있던 것.

상자 속에 들어있는, 낡은 상자.

그것은 아주 예전에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행복 상자였다.

- 여기에 네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아. 그리고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그 두 문장이 황치호에겐 무게감 있게 느껴졌고.

아버지의 말을 곧 따르려고 했으나.

오래도록 물건을 간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행복 상자 안에 넣었던 것들은 보기 좋게 모두 잃어버렸다.

아버지에겐 면목이 없다.

그러나.

“대신 아버지가 주신 상자, 이건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갖고 있어요.”

행복 상자 안에 넣었던 것들은 모두 잃었지만.

정작 그 껍데기가 되어주던 상자만큼은 간직하고 있었다. 오히려 황치호에겐 그 상자가 아버지의 마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로 상경할 때에도.

이사를 다닐 때에도 놓치고 싶진 않았다.

“아빠가 이걸 보시면 뭐라고 할까.”

간직해야 했던 것들을 잃었다고 나무라실지.

아니면 상자곽이라도 챙기고 있는 것을 칭찬하실는지.

알 수 없었는데.

뚜루루-

뚜루루-

마침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가 부재 중 목록을 보고 거신 듯했다.

[아버지]

투박하게 세 글자로 적힌 발신자 이름을 보고 황치호는 씨익- 웃음 짓는다.

전화를 받으며 황치호는 생각한다.

윤슬이, 그 꼬맹이는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직할 수 있으려나.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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