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첫 눈은 따듯하게(1)
11월의 말이 되자 날이 많이 차가워졌다.
자전거는 당분간 집 앞에 봉인하기로 했고.
출퇴근은 버스나 지하철로 하고 있다.
대중교통 이용할 때에는 아무래도 고양이 모드의 영희씨를 도시락 가방에 넣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다.
이상하게 쳐다볼 게 분명하다.
그래서 캐리어를 하나 장만했다.
-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구나.
투명한 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그곳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는 구조의 캐리어.
고영희씨는 제법 마음에 들어했다. 지하철에서 몰래 남을 구경할 수 있는 위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양이들의 본능이다.
“영히씨 거기눈 어떤데?”
냐아앙...
‘아주 편해. 상자 같다고.’
“옵바가 사준 거니까눈 고마워해이지 대거둔.”
새로 장만한 캐리어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고영희씨만은 아니다. 윤슬이도 뒤로 매고 다니는 가방형 캐리어가 신기했는지 출퇴근하는 도중에는 자꾸만 내 뒤로 온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뻗어 캐리어 안에서 편하게 휴식 중인 고영희씨를 관찰하려고 한다.
“우우...! 넘무 노파서 안 보여!”
- 애기가 캐리어 안에 있는 고양이 보고 싶은가봐. 발 뻗은 것 좀 봐봐. 너무 귀엽다.
5세의 그런 적극적인 모습은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꽤나 좋은 반응을 얻곤 한다.
그리고 지하철 역에서부터 걷고 걸어. 어느새 가게에 도착했을 무렵.
등쪽에서부터 편하게 바깥을 구경하고 있던 고양이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냐앙-
냐앙-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였다면 분명 그 의미가 평소처럼 전달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는 보통 인간들이 ‘우와-’라고 하는 감탄사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움?”
우린 고영희씨의 반응을 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그다지 특별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리번-
두리번-
“읏, 차급따!”
그때 5세의 할머니한테 옮은 사투리가 작렬했다.
옷소매를 끌어 볼을 마구 부비적대는 윤슬이를 보고 눈치챘다.
소리 없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옵바! 눈이 온당!”
“올해 첫 눈이네.”
냐아앙-!
흰 구름 아래로 흰 눈이 띄엄띄엄 떨어지는 게 적당히 기분을 리프레시해준다.
오늘 장사는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게에 도착하여 오픈 준비를 마치고.
천천히 손님을 기다리는데.
“.... 웬일로 손님이 안 오시네.”
꽤나 이례적이었다.
오픈 초기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하나도 안 들어오는 날은 없었다.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도 단골들은 식사하러 와주는데 말이다.
-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렇타!”
영희씨와 윤슬이는 이렇게 말하지만 가게 주인으로서는 신경 쓰인다. 아무래도 매출과 직결되는 부분이니까.
그럼에도.
“오늘 눈이 와서 그런가보다.”
“움? 눈이 오므는 어떤데?”
“나가서 놀고 싶잖아. 그러니까 밥 먹으러 식당 가는 것보다 눈 맞으러 어디 나돌아다는 게 아닐까?”
유독 첫 눈에 관해서는 로망이 있으니까. 우리나라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첫 눈이 내리면 무려 뉴스에 나올 정도다. 사람들이 언제 처음 눈이 내리는지 관심이 많다는 얘기인데.
그만큼 첫 눈이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서 공원을 돌아다닌다던지 무작정 길을 걷는다던지.
머리랑 어깨 위에 한 움큼씩 눈을 쌓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법 많이 내리네.”
투명한 가게의 문 밖으로 펑펑 떨어지는 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세상을 흰 색 도화지로 지워버리는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재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고영희씨와 윤슬이, 그리고 나.
셋이서 아무 말도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윤슬이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바지춤을 쿡쿡 땡긴다.
“옵바, 옵바.”
“나가서 놀고 싶어서 그러지?”
“움! 어뜨케 알았찌?”
이쯤이면 5세가 무얼 생각하는지쯤은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맞출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조금 고민이 된다. 바닥을 보면 눈이 이미 어느 정도 층을 이루고 쌓여있는 게 눈에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이 근처에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지나지 않았는지 평평하고 이쁘게 쌓인 눈바닥이 있다.
그곳을 처음으로 밟으며 발자국을 새기는 것은 가히 영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을 내팽겨칠 수는 없다!
“조금 있으면 손님들 오실지도.”
“움... 그거눈 맞찌.”
손님들이 오셨는데 눈으로 놀고 있다가는 제대로 맞이해드릴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것대로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깥에 떨어지는 눈을 조금 더 멍하니 바라보며, 지금 나가서 놀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브레이크 타임에 놀지.
고민 중이었는데 자연스레 고영희씨 쪽으로 시선이 간다.
윤슬이보다도 더 어린 아이처럼 가게의 투명 유리문에 몸을 붙이고는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영희씨는 지금 고양이 모드가 아니라서 성인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눈에 띠었다.
“영히씨눈 눈이 조아?”
- 응, 눈 좋지. 예전에도 시후랑 같이 눈으로 놀았던 기억이 있어.
“그건 소즁하자나!”
- 소중한 기억이지.
영희씨는 추억하듯이 희미하게 웃으며 시선은 줄곧 하늘을 향했다. 눈이 펑펑-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그럼 우리도 나가서 놀까?”
“지금?! 손님 오므는?”
“글쎄, 이해해주시겠지. 첫눈이니까.”
“움... 그렇타!”
- 나가서 놀 거야...?
“응, 나가서 놀자. 장갑 하나씩 다 챙길까?”
나가서 놀자는 말에 영희씨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들뜬 모습을 보인다. 일터다 보니 가게에선 거의 저기압인데 모처럼 영희씨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
“우우! 차겁당.”
“윤슬아, 오빠가 장갑 끼워줬잖아.”
“그치만 맨손으루 만져바이지 대게써.”
“고집쟁이네?”
“그렇타! 윤스리 고집짱이다.”
고집쟁이를 칭찬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5세는 왠지 모르게 당당해보인다.
추위 대책을 단단히 하고, 가게 밖으로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윤슬이는 한 쪽 장갑을 벗어 흰 눈을 직접 손으로 만져본다.
그 보들보들한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냠...”
입에 넣어버렸다!
“그걸 먹으면 어떻게 해...”
“한 번만 머글게. 넘무 싱기하다.”
5세는 너무 소량을 입에 넣어서 감질맛이 났는지. 내 눈치를 슬슬 보다가.
다시 한 번 손에 한 움큼을 쥐더니 입에 쏘옥-
“한 번만 먹는다며!”
“윤스리가 그짓말 쳐써. 제송합니다.”
5세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하지만 얼굴엔 승자의 미소가 띠어져 있다.
크게 혼내기도 애매해서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많이 먹으면 배아플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던 와중에 옆에선
- 냠... 차갑네?
고영희씨도 눈 먹방에 동참하고 있었다!
눈놀이 하려고 이제 막 가게 앞으로 나왔는데 시작부터 대환장 파티다.
라고 생각하기엔 사실 내 손도 이미 눈에 얹어져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퍼서 입에 넣어보았다.
냠냠...
“.... 그냥 물인데?”
“움! 윤스리눈 솜사탕 같은 마시가 날 줄 알아써. 착각해써.”
그나저나 다행이다.
윤슬이가 아직 점심 식사를 섭취하기 전이라 능력을 Off로 해둬서 망정이지. 만약 능력을 켜두었더라면 지나가던 사람들의 단체 눈 먹방 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번 석촌호수 벚꽃 사건 이후로는 꽤나 조심하고 있는 부분이다.
“윤슬이가 제일 처음으로 저기 밟아볼까?”
“그게 좋켔따! 왜냐믄 윤스리눈 보쓰니까눈.”
5세는 본인이 보스임을 변함없이 주장하며 용감하게 첫 눈이 쌓인 바닥을 밟아본다.
뽀짝! 바사삭-
눈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아주 미미하게 들린다.
하얗던 바닥에 자기 발걸음을 처음으로 얹어본 5세는 뿌듯해졌는지 두 팔을 하늘 위로 올리더니 좌우로 마구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윤스리가 다 밟을 꺼야!”
“아니! 이건 너무 치사하다. 오빠도 좀 밟게 해줘라.”
- 왜 나는 빼놓는데!
우리 셋은 하얗고 평평하게 쌓인 눈만 보면 먼저 발을 들이밀었고. 마치 땅따먹기처럼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확실히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변명의 여지는 없었고.
무엇보다
“““재밌땅!”””
즐거웠다.
그래서 사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지 별다른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 와중에 손님이 계속 안 오고 계신다는 사실도 망각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루이가 왔따! 옵바, 옵바, 저기 바바!”
그렇다.
아주 오랜만에, 권수안씨와 함께 눈길을 산책 중인 루이가 우리 가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손님으로 오신 듯했다.
뭉-! 뭉-!
루이는 윤슬이가 보이자마자, 시끄럽진 않을 정도로 약하게 짖었고. 마찬가지로 윤슬이는 루이 쪽으로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의 수안씨였다면,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수안씨.”
-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여전하죠. 매일 장사하고, 윤슬이랑 지내고. 수안씨는요?”
- 저는... 뭐, 많이 달라지긴 했는데. 나쁜 방향은 아니에요. 더 좋아졌죠, 훨씬.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기에 더 캐묻지는 않았다.
수안씨의 옆에 앉은 루이는 눈바닥인데도 늠름했다. 엉덩이가 차가울 텐데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안내견답다.
윤슬이는 그런 루이와 놀고 싶은지.
“이거 머거볼래?”
루이에게 눈을 한 움큼 퍼서 먹여보려고 했고.
“이제 그만!”
“히잉... 들켜써.”
내가 곧바로 제지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수안씨는 조용히 웃었다.
- 지금 가게 영업 시간 아니던가요?
“맞아요, 근데 첫 눈이 오다보니까 참을 수가 없어서. 영희씨랑 윤슬이랑 같이 나와서 놀고 있던 거죠.”
- 영희씨? 옆에 계신 분 말씀하시는 거죠?
“아아... 아직 소개를 안 해드렸구나.”
간단하게 영희씨와 수안씨를 서로에게 소개했다.
수안씨가 가게에 들렸던 것은 여름이다. 가을에도 종종 들러주셨지만, 영희씨가 가게 직원이 되고는 거의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인연이 꽤나 길어졌다. 포털 사이트에 우리 가게를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일러스트를 맡기거나 하느라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고.
수영이와 지아는 아직까지 가게에 자주 들리기에 서로에게 친근감은 여전했다.
“루이야, 윤스리랑 가치 눈 놀이하자? 어뜨케 생각하니?”
뭉-
“조으니?”
뭉-
“옵바, 루이가 가치 노는 게 조으대.”
“루이랑 대화하는 스킬은 여전하구나.”
“그렇타!”
허나 실제로 대화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
고양이 모드의 고영희씨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니까.
- 좋네요. 저희 루이도 눈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제가 놀아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윤슬이랑 같이 놀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윤슬이가 되게 좋아하겠네요. 수안씨는 가게 안에서 기다리실래요? 뭐 하나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 아뇨. 저도 가게 밖에서 눈으로 노는 거 구경하려구요.
구경.
그 말을 들으니 흐뭇해졌다.
수안씨와 그렇게 대화하던 도중.
슈우웅- 퍽!
“응?”
패딩 앞주머니 부근에 부드러운 눈덩이가 하나 날아들었다. 그리고 힘 없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