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첫 눈은 따듯하게(2)
부서진 눈덩이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아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드니, 그곳엔 윤슬이가 있다.
“5세?”
“윤스리! 5세!”
“이거 윤슬이가 날린 거지?”
“그렇타!”
의기양양하게 ‘그렇타!’라고 대답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눈덩이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전투할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런 5세는 본격적으로 응전이라도 요청할 기세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안 되겠구나.”
“쿠쿠쿠... 옵바 공격!”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눈을 꼬깃꼬깃 뭉치려는데.
쉬익- 퍽!
쉬익- 퍽!
“으악...!”
“윤스리가 또 맞춰써!”
잘 맞춘다.
지금까지 명중률이 100%다.
일부러 맞아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내가 움직이는 방향까지 계산해서 던지는 것처럼.
눈덩이가 족족 내 몸에 들러붙는다.
“생각해보니까 윤슬이가 쏘는 걸 잘했지?!”
“그렇타!”
이런.
예상보다 강적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굴러 옆에 있던 가로등 뒤로 숨었다. 어떻게든 5세의 연속 사격에 대응할만큼의 눈덩이를 만들어야만 했다.
꾸깃- 꾸깃-
꾸깃- 꾸깃-
그렇게 눈덩이를 네 개나 만들었을까?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왜 눈덩이가 더 안 날라오지?”
급하게 숨느라 하필이면 가로등 뒤에 숨어버렸다.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넉넉지 않다는 뜻.
그러니까 윤슬이는 내게 눈덩이를 던지려면 충분히 더 던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설마 저쪽도 탄창이 다 떨어진 건가?”
분명 눈덩이를 재충전하는 중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려 고개를 가로등 바깥으로 빼꼼 내밀었다.
그랬는데.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쿠쿠쿠...! 이고 보라구.”
뭉-!
“이, 이럴 수가!”
윤슬이는 어느새 루이의 위에 탑승 중이었다. 주머니에 여러 개의 눈덩이를 장전한 채로.
즉 기마병으로 포지션을 바꾸어, 내게 돌격하면서 눈덩이를 던질 생각.
여기까진 예상 못했는데.
“이러면 가로등도 쓸모가 없다.”
나는 재빠르게 눈덩이를 주머니에 챙겨넣고는 도망가려고 했다. 어떻게든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5세와 루이의 대공습이 이어질 게 뻔했다. 그리고 내가 몸을 일으킨 순간.
“이미 늦었구나.”
나는 깨달았다.
대형견 루이의 속도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어느새 내 앞엔 루이 위에 탑승한 윤슬이가 있었고.
“쿠쿠쿠... 옵바 공격한닷!”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내게 무차별적으로 눈덩이 공격을 해왔다. 그 뒤부터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야가 흰 색으로 뒤덮여 나는 몸의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에 스노우팩을 하고, 그 팩을 5세와 루이가 혀로 다 닦아줄 때까지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윤슬이한테 이토록 철저하게 패배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픈 것보다 부끄러웠다.
“이번에두 작쩐 성공! 역씨 윤스리가 이겨써.”
5세는 언제나 그렇듯 작전 성공을 외치며 승리를 만끽했다.
- 역시, 주현씨가 동생을 참 잘 놀아주시네요.
- 그럼요. 우리 사장이 얼마나 동생을 잘 돌보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 멀리서 우리 남매의 혈투를 지켜보던 고영희씨와 권수안씨는 착각을 한 모양이다.
내가 그저 윤슬이와 루이를 놀아준 것으로.
하지만 지난 몇 분간 나는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동생과 노는 게 재미 없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맞아주는 것도 어찌 보면 스무살 터울인 오빠의 역할인 게 아닐까?
그렇게 합리화하고, 5세를 품에 안은 채로 수안씨에게로 다가갔다.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 아, 그림 그리고 있었어요.
우리가 오는 걸 눈치챘는지, 묻기도 전에 답해주신다.
수안씨 손에는 A4 사이즈의 종이가 들려있고, 목과 승모 사이에 우산을 끼워 눈을 막고 있다.
그렇게 쪼그려 앉은 채로 우리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 같은데.
눈 오는 날 이런 자세로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는 것은 꽤 낭만적이다.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시나보네요.”
- 정말, 까지는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건 맞는데.
복잡한 심정이다.
- 그래도 주현씨가 요리하는 것 좋아하는 정도로는, 제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음... 그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요.”
- 네?
“왜냐면 저는 요리하는 것 자체보다는 누군가 제 음식을 드셔주시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요리를 좋아하는 만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시는 거라면.
오히려 수안씨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이 봐주는 걸 좋아하시는 걸지도 몰라요.”
- ....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수안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때마침 5세가 내 바지춤을 당기며 배고픔을 어필했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자기 배에 손을 올리고는 마구 원을 그렸다.
빙글빙글빙글-
대략 배고프단 의미였고, 수안씨도 우리 가게에 식사하러 들러주신 것이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서 밥 먹을까?”
“그게 좋케써.”
우리 남매는 앞장 서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뒤쪽에서부터 이런 대화가 작게 들려왔다.
- 영희씨는 성함이 고양이랑 비슷하시네요.
- 그런 말 자주 들어요.
- 그런데, 우연일까요? 호흡이 고양이랑 닮아있네요.
- .... 그건 무슨 소리에요?
-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민감한 구석이 있거든요. 특히 소리랑 냄새에는 더 그런데. 뭔가 고영희씨는 고양이들이 숨 쉬는 거랑 비슷하게 호흡하시는 거 같아서요.
확실히.
수안씨는 예리했다.
들어본 적이 있다.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다른 감각들이 훨씬 예민하게 발달한다던가.
지금은 앞이 보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안씨는 루이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 시절의 감각이 아직 남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 그건 칭찬으로 듣고 넘길게요. 전 고양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고영희씨는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자신이 본래 고양이였단 사실을 누구에게나 불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우리 뒤를 따라왔는데.
- 저는 또 우리 마법사님이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하셨나, 싶었거든요. 아니면 말구요.
수안씨는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여러 모로 예리한 사람이다.
**
“오늘은 따듯한 거 만들어먹을까?”
“그렇타!”
웬일로 오늘은 윤슬이랑 같이 느긋하게 식사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마침 안 오기도 하고, 버너를 꺼내어 넷이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 힐링되고 좋을 거 같다.
식었던 몸도 덥힐 수 있고 말이다.
전골이나 할까.
생각하던 도중 윤슬이를 봤더니 바지부터 시작해서 웃옷이 젖어있었다.
“이런.”
눈으로 놀다보니 옷 안으로 눈이 조금씩 새어들어갔던 게 녹은 모양이다.
이대로 두면 감기에 들 게 뻔하다.
“윤슬이 안 추워?”
“움? 갠짜나.”
본인은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가게 안은 난방기를 틀어두어 따듯하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를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가게엔 5세의 예비 옷이 준비되어있다. 가끔 천방지축처럼 굴기도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준비해두었는데.
준비성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다.
“영희씨, 윤슬이 한 번만 씻겨주라.”
- 오케이~.
고영희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래 봬도 윤슬이랑 둘이서 같이 샤워를 마친 전적도 있는 유능한 고양이다.
5세는 내가 걱정하고 있단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옷을 벗어젖힌다.
그리고는 툴툴거리면서 가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고영희씨에게 덧붙이는 한 마디.
“윤스리가 혼자서 씻눈 거 할 쭐 아는 거 알지? 영히씨가 가치 씻으구 싶다구 하니까눈... 가치 씻눈 거다.”
- 그럼, 그럼. 윤슬 선배가 세상에서 제일 잘 씻는 걸 내가 모르겠어? 빨리 들어가자고.
“그렇타.”
‘세상에서 제일 잘 씻는다’라는 근본 없는 칭찬이 5세의 마음에는 제법 긍정적이었는지 순순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다루기 쉬운 5세인지 어려운 5세인지 헷갈리는 지점이다.
“요즘 어떻게 그림 작업은 잘 되어가나요?”
- 그냥 그럭저럭이죠. 그림이란 게 한 번에 확확 느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건 그렇죠. 요리도 그런 걸요.”
자연스레 남자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루이는 털과 발을 닦은 채로 난방기와 조금 거리를 둔 채로 앉아 몸을 말리는 중이다.
- 그래도 행복해요. 이렇게 다시 그림도 그리고. 루이랑 산책도 다니고. 이전까지는 루이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안 그렇잖아요?
“그건 확실히.”
어떤 감각인지 내가 지레짐작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엄청난 해방감이 오지 않을까.
- 근데 그거랑은 별개로 조금 답답한 부분도 생겼어요.
“그래요? 어떤 부분인데요?”
- 집에서 여전히 앞이 안 보이는 척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아아... 그렇겠네요.”
- 이게 앞이 보이다 보니까, 은근히 의식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어떤 걸요?”
- 가령... 예를 들자면. 원래는 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몇 발자국을 걷고 꺾어야 내 방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그 감각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제. 그러다보니 행동이 어색해진다고 해야 하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듯하다.
- 그리고 저희 집 곳곳에 저를 배려해주시느라 부모님이 설치하신 것들이 여러 개 있거든요. 지금은 그걸 사실 사용 안 해도 되는데...
“사용 안 했다가는 어색하게 보일까봐, 굳이 불필요하게 사용하게 되는 느낌?”
- 바로 그거죠!
수안씨는 은근히 마음에 맺힌 게 많았는지 불편했던 점을 몇 개 더 이야기하신다.
그런데 그게 험담이나 불평불만 가득한 한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친구 사이에 나누는, 소소한 잡담과 일상 나눔처럼 느껴져 전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 그래도 주현씨 앞에서는 이런 얘기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다행이네요. 시간 될 때 들르세요. 그런 얘기는 저 아니면 누구한테 하겠어요?”
- 사실 영희씨가 가게 직원이시다보니까, 이런 쪽 얘기도 아실 것 같아서 한 번 찔러봤는데.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큰 일 날 뻔했어요.
아아.
아까 그래서 고영희씨한테 그랬던 거구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를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진짜 큰 일 날 뻔했네요.”
허나 이에 대해선 다물고 있기로 했다.
입에 담지 않은 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편이 더 나은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5세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수증기가 화장실 밖으로 스멀스멀 새었고. 그런 탓에 창문을 열어야 했다.
“여기 우유 좀 마실래?”
“그렇타!”
윤슬이는 샤워를 마치면 맛짱짱 우유를 원샷 때리는 걸 상당히 좋아한다. 모처럼이니까, 한 잔을 따라 주었더니.
벌컥-
벌컥-
“이 마시거둔!”
아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