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아빠 수업(3)
5세의 앞에는 어느새 대여섯 개 정도 되는 눈뭉치가 굴러다녔다.
위기의 징조?
“옵바... 이거 받어.”
“오빠 주는 거야?”
“그건 아니구.”
“그럼?”
“옵바는 창꼬야. 윤스리한테 주므는 대게써.”
“.... 그런 거였나.”
“그렇타.”
5세는 발을 뻗어 내 팔뚝 위에 눈덩이들을 하나둘 올리고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이제 공격의 시간.
사악한 표정이다.
사악한 표정의 5세가 눈덩이를 두 손에 쥐었다.
그리곤 목표 포착.
발사!
“이얍!”
윤슬이는 차웅씨와 유민이한테 눈덩이 사격을 시작했다.
퍽-!
퍽-!
보기 좋게 두 사람에게 명중했다.
- 으엇 차거!
- .... 잘 던지는데?
처음에는 맞대응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두 사람이었는데.
퍼벅-
퍽!
퍽!
얼굴, 팔뚝, 가슴팍 등등.
- 으읏... 윤슬이라두. 너무 많이 던지면 나도 던질 꺼야.
몇 대 맞더니 생각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한 켠에 잔뜩 쌓인 눈벽 뒤에 숨어 눈덩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인공눈이었다면 뭉치기 힘들었겠지만 엊그제 한차례 눈이 내린 덕분에 어느 정도 뭉칠 수 있는 모양.
그렇게 2:2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팍!
파박!
윤슬이가 크게 분전했다.
혼자서 유민이와 차웅씨 두 사람을 상대했다.
얼마 전에 눈싸움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는지 두 사람이 한 번에 눈덩이를 만들어내는 속도와.
윤슬이 혼자서 만들어내는 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우하하! 윤스리를 이길 쑤는 업따!”
심지어 연사 속도와 명중률도 훌륭했다.
2개 던지면 하나는 맞았다.
반면 5세의 경우 차웅씨와 유민이가 던지는 게 스치거나 완전히 빗겨나갈 정도로 피할 수 있었는데.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왜냐면.
“옵바 방패! 이거눈 절때루 못 뚫은다!”
퍽-!
퍽-!
“으흣...! 차가워!”
실제로 내가 다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윤슬이의 눈덩이 저장고 + 방패 역할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었다.
참된 오빠라고 볼 수 있겠다.
- 크윽...! 주혀니 형아가 너무 방해야!
- 유민아! 아빠 위에 올라타라.
- 응...?
- 어서!
차웅씨는 어느새 아이처럼 눈싸움에 몰입했는지.
눈에 열의가 불타올랐다.
눈덩이를 쥐고 있는 유민이한테 목마를 태웠다.
- 자! 위에서라면 주현이 형을 넘어서 윤슬이를 맞출 수 있겠지?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거야.
- 으... 네!
차웅씨는 굉장히 키가 크다.
나보다 10cm 정도 더.
선 키가 꽤 높다는 뜻이고.
유민이는 높은 곳이 무서운지 약간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 맞고만 있을 쑤는 없써...!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어 윤슬이에게 눈덩이를 던지는 유민이!
슉! 슉!
높은 곳에서 내던지는 눈덩이 두 개는 제법 위협적이다.
“으악! 저거눈 맞으게써!”
“걱정마.”
하지만 내가 있다.
윤슬이한테 눈덩이가 닿게 절대로 놔두진 않지.
나는 몸을 날려서 유민이가 던지는 눈덩이를 몸으로 막아냈다.
멋진 육탄 방어!
“어때 윤슬아?”
“우하하! 봤냐! 이게 바로 윤스리 방패다! 대다나지?”
- 크윽... 윤슬이는 너무 쎄다...!
“....”
내가 막아준 것은 딱히 고맙지 않은가보다.
윤슬이는 내가 육탄 방어를 해준 것에 대해선 전혀 개의치 않으며 다시 눈덩이를 뭉치고 있다.
오빠는 서럽다.
“이얍! 이얍!”
윤슬이는 다시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눈덩이 연속 공격.
내가 옆에서 쓰러져있었지만.
더 이상의 방패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상대방은 공격할 수단이 다 떨어졌기 때문.
퍽-! 퍽-!
- 유, 유민아? 너도 눈덩이 던져야지?
- 응... 다 떨어져써여.
- .... 응?
차웅씨는 간과했다.
목마를 태우면 결코 눈덩이를 만들 수 없단 것을.
차웅씨가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유민이를 목마 태운 채로 눈덩이를 만들다간 자칫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유민이와 차웅씨 부자는 선 채로 눈덩이 세례를 맞게 되었다.
“윤스리가 이겼따! 또 이겼따!”
5세는 눈싸움에 관하여 무패의 전적을 자랑한다.
**
다행히 눈싸움을 지속하는 동안 다른 썰매장의 손님들이 옆을 지나다니지 않아서 핀잔을 듣진 않았다.
애초 손님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도 그저 웃고 넘어가주셨다.
- 주현씨랑 윤슬이한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한바탕 눈싸움을 마치고 우린 잠시 휴게실에 들어왔다.
옷이 눈에 젖어버려 말려야만 했다.
눈썰매를 아직 한 번밖에 타지 못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는 분위기다.
윤슬이랑 유민이는 앞에 있는 난로 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아 온기를 만끽하고 있다.
- 유민이랑 제법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방금 눈싸움할 때.
“아아, 그 얘기셨군요. 확실히 그렇네요.”
돌이켜보면 재밌는 장면이다.
차웅씨가 갑자기 승부욕에 사로잡혀 유민이 목마를 태워주시다니. 그것만이 아니라 두 사람은 한 켠에 쌓여있던 눈더미를 방벽 삼아 윤슬이의 눈덩이 세례를 피하기도 했다.
마치 한 팀이 된 것처럼 협동하는 움직임이었다.
- 그리고 썰매를 탈 때도 그랬습니다. 무릎에 앉혀놓고 같이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다보니까 제 팔을 강하게 붙잡더라고요. 그때 조금 강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요?”
- 그... 무어라 해야할까요. 제가 말주변이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은 아닌지라. 콕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 아들 같았어요. 제 자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두터운 옷을 입었지만 피부랑 피부가 맞닿는 느낌이어서요.
굳이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차웅씨는 뿌듯한 듯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나는 이곳에 온 보람을 느꼈다.
요 몇 주 간 차웅씨가 얼마나 미정 선생님과 유민이를 위하여 열심히 인형극을 준비하고.
마음을 앓았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 한 켠이 따듯해지고.
그랬다.
“옵바, 이고 바바. 손이 쪼글쪼글해져써.”
“아이구. 장갑 안으로 물이 샜나?”
“움...”
윤슬이가 어느새 내 앞으로 쫄래쫄래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어 보여준다.
마치 방금 목욕탕에서 나온 것마냥 손이 쭈굴쭈굴 불어있었다.
혹시 장갑 안쪽이 젖었다면 이따가 다시 썰매를 탈 때 동상이 걸릴 수도 있으니 위험했다.
우선 장갑 쪽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응? 물 안 묻어있는데. 그럼 왜 손이 젖었을까?”
“움...”
윤슬이는 노골적으로 내게서 눈을 피했다.
나는 얼굴을 잡아서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너 맨손으로 눈 만졌지?”
“우우... 들켜쪄.”
“오빠가 그렇게 하면 손 언다고 위험하다고 그랬잖아. 언제 또 눈을 만졌어.”
“아까 옵바가 딴 데 보구 있을 때 몰래몰래 가서 만져써. 역씨 윤스리야. 옵바한테 안 들켜써.”
“....”
누굴 탓하겠는가.
제대로 지켜보지 않고 있던 내 잘못이지.
나는 챙겨온 수건으로 윤슬이 손을 꽁꽁 싸매었다.
물기는 없었지만 이러는 편이 더 손을 빨리 원상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 이대로 가서 난로 앞에 유민이랑 가만히 앉아있어. 오빠 말 안들었으니까, 그 손 다 나을 때까지 밖에서 썰매 놀이 못해.”
“크... 크악! 윤스리 츙격!”
“아무리 충격이라도 안 되는 건 안돼. 난로에 앉을 때 너무 가까이 가면 수건 타니까 조심해야 된다?”
“피이... 그렇타...”
5세는 궁시렁대면서 다시 유민이 앞에 앉아버렸다.
불만이 아주 많은지 그대로 유민이 어깨에 자기 머리를 기대었다.
하지만 안전 때문에 주의를 주었는데, 그 말을 안 들은 것은 윤슬이 잘못이었다.
잘못된 것은 확실하게 말해주는 편이 동생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
- 푸흐... 정말. 저랑 유민이보다도 훨씬 부모 자식 같네요. 윤슬이랑 주현씨.
“앞으로 저랑 윤슬이처럼 사이 좋아지실 거에요. 유민이랑 차웅씨도요.”
- 그럴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만.
**
“뿌으으으.... 우오오옹!”
“힘내라! 5세!”
“움! 윤스리! 5... 세!”
5세.
모처럼 고난의 현장을 맞이하다.
한 번 나의 고생을 느껴보라는 차원에서 윤슬이에게 미션을 제시해보았다.
“윤슬아 너 오빠 못 끌고 가지?”
“움?!”
“아까는 오빠가 끌어줬는데 이번에는 과연 윤슬이가 오빠를 끌어줄 수가 있을까?”
아주 찰나의 순간.
고민에 빠진 5세.
결정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스리가 당연히 할 쑤가 있찌!”
“그래! 장하다. 우리 동생.”
누가 뭐래도 5세는 우리 오누이 식당의 보스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윤슬이는 나를 튜브형 눈썰매에 태우고, 연결된 끈을 두 손으로 잡았다.
열심히 끌어보는 중.
“끄아아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힘내!”
“끄으으으으... 윤스리 쥬금.”
풀썩-
5세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버렸다.
대충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으므로 다시 썰매에 그대로 실어서 내가 끌고 올라가기로 했다.
우리가 노는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던 차씨 부자.
서로를 쳐다보며 머쓱하게 웃는다.
- 저런 건 나중에 해줘도 돼. 유민아.
- 으... 네.
나중에 해줘도 된다니.
차웅씨는 나중에 유민이한테 이걸 시킬 생각이신 모양이다.
제법 자식을 강하게 키우는 편이신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을 오르고 내리며 썰매를 탔다.
눈썰매의 비탈길을 내릴 때마다 풍경이 새로이 바뀌었다.
비탈길의 위치가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레일이 달랐으니까.
조금씩 바뀌는 풍경을 음미하고.
윤슬이가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고.
또, 차씨 부자가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
해는 저물어만 갔다.
“뿌허... 지쳐써.”
“윤슬이 지쳤어?”
“웅... 배두 고프당.”
“그럼 여기서 밥 먹고 이제 슬슬 집으로 갈까? 내일도 가게에서 일해야 되니까.”
“그게 좋케써.”
윤슬이는 먼저 푸드코트가 있는 건물 쪽으로 앞장 섰다. 화장실을 들르느라 몇 번 들어갔던 적이 있는 건물이라 푸드코트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도 윤슬이를 뒤따라서 푸드코트로 가려고 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차웅씨와 유민이가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제자리에서 허리를 숙인 채 멈춰있는 차웅씨. 유민이의 얼굴에 손을 대어본다.
“왜 안 오시지?”
“움? 유미니 안 오구 이써?”
“한 번 가보자.”
“그래이지 대게써.”
무슨 일이 생겼는가.
싶어 두 사람 쪽으로 가보니 차웅씨가 거의 울상이다.
“모야! 짜짜웅 아저씨 왜 그래여?”
- 윤슬아...
차웅씨는 유민이 이마에 손을 대고 계셨다.
설마 싶어서 유민이 쪽을 자세히 살펴보자 볼이 발개져있다.
단순히 추워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차웅씨 일단 이 건물 안에 보건실 있으니까 그쪽으로 유민이 빨리 옮기죠.”
- .... 네! 그래야 될 것 같네요.
차웅씨는 유민이를 품 안에 번쩍 들었다.
걱정이 되어서 유민이 머리를 만져보니 조금 뜨거웠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옵바, 유미니 아퍼?”
“괜찮을 거야. 약 먹고 조금만 쉬다가 내려가면 돼.”
아이니까 놀다보면 열이 날 수도 있다.
아마 심하진 않을 것이다.
호흡도 정상이고, 끙끙 앓고 있는 것은 아니니.
단지 아파서 불안한지 차웅씨의 옷자락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 아... 빠.
- 아파? 많이 아프니 유민아?
차웅씨는 허둥대다가 그 귀중한 한 마디를 잘못 들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