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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167화 (167/200)

167화: 연말엔 윤슬이가 요리사?(1)

개인적으로 연말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특히 밤이 풍기는 무드.

흐릿한 겨울 냄새에 조명이 얹히면 추운 날씨에도 몸이 덥혀지는 듯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움... 옵바”

“으응?”

“저거 바바.”

연말 거리의 들뜬 듯 가라앉은, 오묘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하여 밤거리를 걷는데.

윤슬이가 문득 광고판에 쓰여있는 모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한 살 더 먹는대도 기 죽지 말기! 그만큼 더욱 성숙해졌으니까요!]

다소 나이가 있는 고객들을 상대하는 회사인 걸까.

나이를 먹는다는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듯 보인다.

“한 살 더 머그는데 왜 기가 죽어?”

“오오...? 윤슬이가 읽은 거야? 직접?”

“그렇타. 이제 윤스리두 곧 있으믄 여섯 살이니깐 저 정도는 읽으지.”

“...!”

기쁘다.

너무 기쁘다.

무릎에 앉혀서 동화책을 당장 어제에도 읽어주었던 것 같은데! 이제 스스로 한글을 읽는 경지가 됐다니!

....

잠깐.

“뭐야, 그럼 너 왜 어제 동화책 읽어달라고 그랬어?”

“아앗...”

“이유를 말해보세요.”

“귀차나서 그런 거 아니니깐 오해눈 하면 안대.”

“....”

귀찮아서 그랬다고 한다.

일말의 배신감.

“근데 읽으는 건 읽으는데. 쪼꿈 오래 걸려. 그래서 한참 쳐다봐써.”

“아아... 그런 거였어?”

“웅, 그래서 옵바나 영히씨가 읽어주는 게 더 조아. 혼자서 읽으는 것보다.”

“그건 또 일리가 있네.”

단순히 윤슬이가 글을 못 읽기 때문에 무릎에 앉혀서 동화책을 대신 읽어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는 시간 자체가 가치 있으니까.

오전 시간대부터 저녁 시간대까지.

최대한 윤슬이한테 신경은 써주지만, 아무튼 나는 손님들 접객에 신경을 써야한다.

육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으니, 그렇게 따로 시간이라도 내어 놀아주는 것이다.

아마 윤슬이 입장에서도 비슷하겠지.

단순히 읽기 귀찮다기보단 그러는 시간이 좋아서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럼 다음엔 윤슬이가 얼마나 글씨 잘 읽게 됐는지 오빠한테 보여주면 되겠다. 그렇지?”

“오오...! 그렇타! 윤스리 진화해써. 기대하므는 대. 똑똑히 보여주께.”

“그래, 믿음직스럽네.”

“후후후...”

믿음직스럽다니까 애써 좋아하는 티를 감추는 5세.

다 티가 나는 게 또 귀엽다.

“이러면 우리 윤슬이한테 연말 요리 만드는 걸 맡겨도 되겠는데? 많이 컸으니까.”

“맞아. 윤스리 마니 커써.”

아직도 윤슬이를 ‘윤스리’라고 흘리듯 발음하는 건 고쳐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점차 나아지겠지.

**

지난 밤 우리 가족 셋이서 무진장 부대끼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우어어... 영히씨 쫍아...”

냐아앙!

‘나도... 안 보여...!’

“어허이, 꼬맹이 두 놈이 자꾸 밍기적거리네?”

“우쩔 쑤가... 웂따...!”

5세는 볼을 이용하여 영희씨를 옆쪽으로 밀어낸다.

허나 이에 질세라 영희씨도 똑같이 얼굴을 앞발로 치대며 반격.

냐앙!

‘나두... 보고 싶다고!’

가끔 내가 스마트폰으로 너튜브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그 가운데에서 치이는 내 입장도 조금 고려해주면 좋겠지만.

5세와 인간형 고양이인 영희씨에게 그 정도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요리사: 여기 보세요. 저희 시원이 칼질 되게 잘하죠?]

[딸: 아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요리사: 애가 쑥쓰럼을 많이 타서. 집에서 이렇게 말해주면 되게 좋아하는데.]

[딸: 아 진짜, 압빠!]

[PD: 가정이 되게 화목하시네요. 셰프님.]

나도 가업으로 요리를 하다보니 계속 이런 너튜브 컨텐츠만 보게 된다.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편의점 주인에게 길을 물으면 “길 건너 A 편의점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꺽어서 쭉 걷다보면 B 편의점이 나오는데...”라는 식으로 답해준다던가.

즉, 자신의 관심사만 유독 챙겨보게 된다는 얘기.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딱 그렇다.

“윤슬아, 여기 애가 너보다 한 살 많대.”

“움? 그러믄 유미니랑 똑같애.”

“그렇지.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유미니는 내 부하니까는.”

그렇게 잘 알고 계신 분이 절대로 ‘오빠’라고 유민이를 부르진 않는다.

아마 미정 선생님이랑 차웅씨랑 최근에 부쩍 사이가 좋아진 걸 감안하면. 나중이 돼서도 사이 좋게 지낼 것 같은데.

언제 그 호칭이 달라질지 조금 궁금하다.

[요리사: 저희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요리시켰는데. 되게 잘하더라고요. 누구 닮아서 그런지.]

[딸: 아빠 안 닮아써! 엄마 닮아써.]

[PD: 억장 무너지시는 거 아니에요?]

[요리사: 아니에요, 저희 딸 집에선 안 이래요... 카메라 있어서 부끄러워서...]

[딸: 아니거든!]

[요리사: ....]

아빠 파이팅.

이라는 댓글을 적어주고 싶은 시츄에이션.

우리 윤슬이는 이렇게 틱틱대지 않아서 다행이다.

“움... 옵바, 여기 나오는 쩌 여자애는 벌써부터 옵바처럼 칼루 탁탁 썰고 이써. 오이.”

“그렇네? 저거 유아용 식칼이라고 해서 팔더라고. 애들도 채소 같은 거 자를 수 있게.”

“오오...! 윤스리 꺼는?”

“글쎄. 윤슬이는 조금 더 나이 먹고 요리하는 게 낫지 않겠어?”

“움? 윤스리 이제 여섯 살이야. 그니깐 어른 대써.”

픙흥흥- 냐아앙~

‘여섯 살이 무슨 어른이야!’

“이익! 영히씨 조용히 해.”

5세는 영희씨의 입을 막아버렸다.

잽싸게 멀리 도망가는 영희씨.

윤슬이는 본인이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해졌다.

“근데 윤슬이 직접 요리하고 싶어?”

“움... 응. 왜냐믄 옵바 도와줄 꺼야.”

“도와주려고? 오빠는 괜찮아. 지금 혼자서 잘 하고 있어. 우리 윤슬이는 조금 더 커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사실 윤스리가 하구 시퍼서 그래써.”

“아아... 직접 하고 싶구나.”

이럴 땐 또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한 번 꼬아서 말한다던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라고 묻는 것과 동시에 너튜브 영상의 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온다.

[PD: 시원이 칼질 되게 잘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칼을 잘 다루게 된 거니?]

[딸: 아빠 따라서 연습해써여.]

[PD: 아빠 따라서? 아까는 아빠 싫다고 그랬잖아.]

[딸: 사실은 좋아. 근데 아빠한테는 비밀. 왜냐면 사랑한다구 말하면 자꾸 뽀뽀하려구 해서 귀차나.]

[PD: 뽀뽀하려고 해서 귀찮아? ㅋㅋㅋ 그래도 아빠가 좋구나. 따라서 요리 연습도 하고.]

[딸: 네. 아빠는 요리할 때가 제일 멋있어.]

틱틱대는 면은 있지만 아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딸의 모습이 드러난다.

윤슬이도 이런 이유일까?

“윤슬이도 오빠가 멋있어보여서 요리하려고 하는 거야?”

“그렇타!”

감동!

돌이켜보면 윤슬이가 몇 번 그런 말을 해준 것도 같다.

요리하는 내 모습이 좋다던가.

이 너튜브에 나오는 딸과 같은 맥락인 듯하다.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아용 식칼을 사주는 게 좋으려나.

내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5세는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가 식탁을 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서 마치 도마 위로 식칼을 마구 내리치는 요리사 흉내를 낸다.

“옵바, 어때?”

“아주 요리사 같네?”

“나중에 옵바 나이 마니 머그면 윤스리가 오누이 식땅 가질 거야.”

“가질 거야, 보다는 조금 더 좋은 어감이 있지 않을까?”

“움... 그러네. 어짜피 오누이 식땅은 이미 윤스리 꺼야. 왜냐믄 윤스리가 보쓰니깐.”

“....”

사장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아직 창창한 20대인데도 말이다.

슬프다.

“우선 한 번 알아나 볼까.”

윤슬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찾아보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곧장 너튜브를 끄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유아용 식칼]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브랜드의 식칼들이 나왔다.

아이들을 고려하여 알록달록 이쁘게 꾸민 식칼도 있었고. 아니면 조금 더 어른스러운 느낌으로 담백하게 빠진 식칼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식칼의 공통점은.

“안 다치게끔 잘 나와있다고 하네.”

날이 날카롭지 않아서 혹시나 실수했을 때 사용자인 아이들이 다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는데.

그 기본에는 모두 충실했다.

어느 식칼의 경우 제작자가 직접 손을 날에 비벼 생채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안정성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그래도 윤슬이는 아직 다섯 살이다.

그런 아이에게 아무리 유아용이라도 식칼을 쥐어주는 게 덜컥 겁이 났다.

방금 너튜브 동영상에서는 다섯 살 때부터 요리를 시켰다고 하지만.

전문 셰프가 옆에서 붙어서 제대로 안전을 확인했을 것이다. 본인 딸이니까.

“후기들도 찾아봐야겠다.”

조금 더 자세히 검색해보면 유아용 식칼의 후기들도 상세히 나올 것이다. 이럴 땐 육아 선배들의 상세한 후기들이 도움이 되는데.

자신의 아이가 몇 살, 몇 개월 차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까지 자세히 적어주시는 경우가 많다.

동생을 키우는 입장에선 도움이 된다.

“다섯 살짜리 애가... 요리 하고 싶대서 사줬는데, 옆에서 붙어서 가르쳐주니 재밌어하더라.”

우선 베일 걱정이 없으니 그게 가장 큰 장점인 듯했다.

물론 질긴 육류나 두꺼운 채소 같은 경우에는 자르는 데에 무리가 있겠지만.

그런 것을 애초에 아이에게 자르게 시키진 않는다.

끽해봐야 토마토나 파처럼 그나마 자르게 쉬운 종류에 한정해야겠지.

“어때... 옵바.”

내가 후기를 살펴보고 있는 도중.

5세가 어지간히 내 판단이 궁금했는지 얼굴을 들이민다.

그게 재밌어보였는지 어느새 영희씨도 반대편으로 와서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전문 용어로 ‘볼찌부’당하고 있다.

이럴 때 보면 또 사이가 좋은데 말이다.

“윤슬이 요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

“웅! 옵바 옆에서 이케! 요리한다!”

다시 한 번 식칼을 쥐는 듯 시늉하는 5세.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대신 오빠가 옆에서 다치지 않게 감시할 건데 그래도 괜찮겠어?”

“웅... 감시해조야지대. 왜냐믄 칼에 찔리믄 다치니깐 위험해. 아픈 거눈 별루 안 조아.”

본인 스스로 칼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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