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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170화 (170/200)

170화: 연말엔 윤슬이가 요리사?(4)

“잉? 잔깐만.”

“왜 그래 또?”

무언가 자신이 내뱉은 대사에 영감을 받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두부가 놓인 가판대를 가운데에 두고 쪼르르 돌아 내 앞까지 다가온다.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더니 내 허벅지를 쿡쿡 찔러본다.

“설마 옵바눈 상한 거 아니겠찌? 아직 갠짠치?”

“괜찮아. 오빠 안 상했다.”

윤슬이가 기묘한 의문을 품자 끝내 가게 점원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큭큭거리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신다.

- 너희 오빠는 한창이지, 꼬마야.

“꼬마 아니구 윤스리.”

- 그래 윤슬이. 이름 이쁘네. 오빠가 되게 자상하네? 윤슬이 장난도 하나하나 다 받아주고.

“잉? 그거눈 틀려써여.”

- 틀렸어?

“윤스리가 옵바 놀아주는 거.”

“....”

저 주장은 좀처럼 변할 줄을 모른다.

가게 시작할 때부터 줄곧 견지해오던, 불변의 주장이다.

내 관심사 중 하나는 대체 윤슬이는 몇 살쯤 되면 저 주장을 철회할 것인가, 이다.

곧 12월도 끝날 텐데, 내년이 기대된다.

- 오빠가 참 다정하네요. 이렇게 어린 동생이랑 장도 보러 나오고.

“다정하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자연스레 이렇게 되더라고요.”

- 알 것도 같네요. 막 딸 같고 그래요?

“거의 그렇죠. 오늘은 또 동생이 직접 요리하는 날이라서 같이 장보러 나온 거에요.”

“그렇타! 윤스리가 요리해여.”

직원분은 어깨를 흠칫 떨며 놀라신다.

- 엥? 윤슬이가 요리를 해? 벌써?

5세는 그동안 몇 번이고 연습한 식칼 쥐는 자세를 선보이며 턱을 치켜세운다.

“옵바가 칼질하는 법두 가르쳐조서. 이제 요리할 줄 알거둔. 오늘은 윤스리가 요리사~!”

“아직 불은 못 쓰게 하는데, 유아용 식칼로 재료 자르게 하는 정도면 어떻게든 괜찮을 거 같더라고요. 은근히 며칠 시켜보니까 요령도 붙은 것 같고.”

- 그래요? 천재네, 천재야. 우리 아들도 한 번 시켜볼까? 하하.

직원분은 아마 빈말로 하신 것 같은데.

윤슬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처, 천재?!”

입꼬리 수직상승.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춤추려하는 걸 막아선 뒤 두부를 적당히 담아 다른 채소를 고르러 갔다.

이런저런 채소를 고르는 와중에 놀랬던 것은 윤슬이가 제법 식재료 고르는 데에 소질이 있단 것이다.

“움... 이 양파는 별루 안 건강해.”

“이거눈 파가 뿌리가 몬 생겨써. 탈락이야.”

“감쟈 구멍이 너무 크게 나써. 이거눈 넘무 미우니까 딴 걸루...”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또 다른 직원분도 놀랬는지, 내게 물어보셨다.

- 애가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야무져요? 다섯 살? 일곱 살?

“다섯 살이긴 한데요... 아직은.”

사실 나도 예상 못했던 부분이라 적절히 답해드리긴 어려워서 그냥 얼버무렸다.

“천재가 아닐까요?”

- 아하... 천재...

직원분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윤슬이를 관찰했으나.

우리의 시선과 대화를 의식하고 있던 5세는 빵실빵실 웃으며 신나게 식재료를 골랐다.

“처, 천재... 옵바가 또 천재라구 그래써...!”

그 두 글자가 그렇게도 기쁜가보다.

5세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또 하나 깨달은 것 같다.

**

“영히씨! 이거 바바! 윤스리가 골라와써.”

- 이쁘게 생겼네?

“그치? 옵바랑 마트 아쥼마가 천재라구 그래써.”

- 윤슬이한테?

“그렇타.”

곧장 나를 쳐다보는 영희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확실히 윤슬이가 식재료를 잘 고르더라고. 흉터 없고, 이쁜 것들로만 쏙쏙.”

- .... 어떻게 그러지?

“글쎄, 아마도 내 옆에 있으면서 조기 교육이 된 게 아닐까?”

“움? 조기 교육?”

“일찍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뜻이야.”

이해했다는 듯이 윤슬이는 무릎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식재료를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눈 정답이야.”

“정답이야?”

“맨날 옵바 옆에서 마니 봐서. 모가 이뿐 양파인지. 모가 몬 생긴 감자인지 다 알어.”

“맨날 오빠 옆에서 기웃거리던 게 그런 이유였구나?”

감탄!

그냥 관심을 원해서 주방에 기웃거리던 것인 줄 알았는데, 윤슬이 나름대로 식자재를 살펴보거나 여러 가지를 관찰했는가보다.

그러고보니 몇 번 윤슬이가 내게 말했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윤슬이는 나중에 내 업을 이어받아서 우리 식당의 사장이 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그러려면 내가 적어도 환갑은 넘어야겠지만.

....

매우 아득하다.

“쿠쿠쿠... 윤스리가 이 식땅을 접쑤하는 날두 멀지 않았다.”

“...!”

심지어 가게 사장 앞에서 대놓고 ‘접수한다’는 불손한 어휘를 사용하다니.

동생이지만 얕볼 수 없다.

“장난 그만치고 빨리 요리나 시작하자.”

“웅, 그게 좋케써. 어짜피 윤스리 다섯 살이라 아무 것두 안 대.”

오늘따라 자기 객관화가 굉장히 잘 되는 5세였다.

컨디션이 좋은가보다.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주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 도마.

윤슬이는 윤슬이 도마를 각자의 앞에 꺼내두었다.

또, 조리대가 5세의 키에 맞지 않으므로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발판을 꺼내와 그 위에 올라왔다.

“자, 오빠는 고기 썰기 담당이니까. 우리 윤슬이는 뭐 담당?”

“채소 담당임미다!”

“어떻게 썰어야 될까?”

“이뿌게! 깔끔하게! 먹기 좋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윤스리가 안 다치게 안전하게 써는 거!”

“좋았어. 작업 시작한다.”

“그렇타!”

5세는 잔뜩 기합이 들어가있다.

탁탁탁탁탁-

나란히 서서 칼질하는 우리의 모습이 나름 볼만했는지 영희씨는 평소와 달리 바 테이블 쪽에 엎어져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심심해졌는지 내 스마트폰을 빼어가서 두 사람의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영히씨 이뿌게 찍어조~!”

- 어떻게 찍어도 이쁘니깐 걱정 마.

“그거눈 당연하거둔~.”

윤슬이는 식칼로 하나씩 식재료를 썰다가 나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하나 썰고.

나를 흘끗 쳐다보고.

이 과정을 반복 중이다.

아마 내 칭찬을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고.

“흥흥~ 옵바랑 요리~ 가치하구 이써~.”

그냥 이렇게 함께 음식을 만드는 시간 자체가 즐거운 것 같다. 얼마나 즐거우면 엉덩이까지 미세하게 씰룩이고 있다.

방금 그렇게 기합을 넣으며 채소 손질 작업에 들어갔는데도 태도가 간단히 바뀌어버린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엉덩이를 씰룩이긴 하는데, 채소를 써는 손동작만큼은 일정하다.

적당히 힘이 들어가서, 제대로 잘라내고 있다.

“신 좀 내도 되겠네.”

“움?”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 동생은 아무래도 음식에 큰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재료를 썰어가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윤슬이는 지쳐서 떨어져나갈 것도 같았는데, 잠시 쉬었다가 채소를 자르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전부해냈다.

지금은 지쳐서 영희씨 무릎을 배고 곤히 누워있는 상태다.

“유, 윤스리 쥬금을 손님한테 알리믄 안대.”

- 이순신 장군?

“아니, 당신은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알아.”

왠지 윤슬이가 이순신 장군 패러디를 하는 것보다 영희씨가 그 역사적 인물을 아는 게 놀라울 따름.

저 사람은 본질적으로 고양이인데.

- 날 무시하지마. 나도 나름 나이 많다.

하긴.

인간으로 변하는 시점에서 이미 고양이인가 사람인가를 구분짓기 어려워졌으니.

**

음식 조리가 막바지에 달했다.

슬슬 기운을 회복한 윤슬이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밑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제 다 대써? 곧 손님들 오게써. 늦게 대므는 손님들이 화낼 거야.”

“그렇네? 근데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돼. 이제 다 끓었거든.”

“계란찜두?”

“응, 계란찜도 다 됐어.”

계란찜은 윤슬이 손을 많이 타지는 않았다.

계란 껍질 버리는 것을 윤슬이가 조금 도와줬고.

그 위에 토핑으로 쓸 쪽파를 조금 썰어주었다.

하지만 그만큼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윤슬이가 다섯 살인데도 요리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게 의미 있는 거니까 말이다.

“계란찜 좀 바바. 윤스리 궁금허다.”

찜기에 각기 작은 그릇에 담긴 계란찜들.

얼핏 멀리서 보면 푸딩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히 계란찜이다. 약간의 설탕 간을 해서 단맛이 간간하게 나는 느낌으로 만들어봤다.

우리나라의 계란찜보다는 일식에 가깝다.

고추장찌개의 맛이 강하다보니, 부드러운 맛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다.

“이거 디게 싱기하다.”

윤슬이는 탱글탱글하고 반듯한 계란찜의 표면이 신기한지 두 손에 쥐고 좌우로 붕붕 흔들며 관찰 중이다.

그러다가 모양이 쏠릴 수도 있어서 금방 다시 돌려받았다.

“이 위에 윤슬이가 썰어준 쪽파 올릴 거야. 그럼 오빠랑 같이 요리한 거지?”

“후후... 그렇타.”

윤슬이는 실실 웃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표정 변화가 상당히 스펙터클하다.

엄청난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미간에 뫼 산(山)이 그려졌다.

“뭐야, 또 왜 그래?”

“윤스리 방금 직감이 와써.”

“...? 무슨 직감.”

“아무래두 이 요리들 손님들한테 주믄 큰 일이 날 거 같아. 당장 취소해야 대.”

“???”

이 무슨 폭탄 발언?

오늘까지 해온 노력은 무엇?

“이유나 좀 들어보자.”

“넘무 맛있어서 윤스리를 잡아갈지두 몰라. 집에 가둬놓구 요리만 시킬라구. 그러믄 큰일이야. 옵바 외로워서 쥬거.”

“....”

호들갑으로 판명.

코를 한 번 찌부해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음식 준비를 마무리했다.

- 오늘 그래서 누구누구 온다고?

영희씨가 물었다.

“되게 많이 오지. 한 시간 반씩 나눠서 대접하기로 했으니까.”

가게 자리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간대 별로 여러 명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해드리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많이 오시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 식사를 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 말이다.

- 근데 그렇게까지 막 음식 퍼줘도 되는 거야? 가게 무너지겠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되네요. 어차피 그 손님들이 우리 식당 자주 안 들러주셨으면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지낼 수도 없었으니까.”

- 그건 참 기특한 생각이네. 손님들 입장에선.

“글쎄 말이야...”

하지만 영희씨 말에 일리도 있다.

사실 손님과 가게 사장의 관계에서 굳이 이런 행사까지 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윤슬이가 제안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 드시고 행복한 표정 짓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

결국에 자기만족이다.

그래서 손해라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옵바, 그러믄 아까 준비한대루 인사하믄 대는 거지?”

“옳지. 잘 기억하고 있네.”

우리 세 사람은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평소와 다른, 이벤트성 인사를 선보이기로 했다.

마침 첫 손님이 들어오신다.

배꼽에 손을 모으고.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반가운 인사.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인사를 받는, 단골 손님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이었지만.

대부분이 머쓱한 듯했다.

그런 분위기는 영희씨가 환기해주었다.

- 이 요리들 윤슬이랑 같이 만든 거 알아요?

라며 손님들에게 일일이 다가가며 두 사람이 나란히 칼질하는 영상을 보여드리는 게 아니겠는가.

영희씨도 우리 식당 직원 다 됐다, 어느새.

“연말은 이렇게 따듯한 분위기 속에서 보내야 행복한 것 같아.”

“그렇타!”

손님들에게 고기가 듬뿍 담긴 고추장찌개도 내어드리고. 계란찜도 내어드리고.

맛있어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함에 젖었다.

오늘도 오누이 식당은 북적북적하고.

나에게 포근한 안심감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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