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1)
간만에 기상 이변이 일어났다.
물론 이변이라고 해봤자, 지진이나 태풍 수준의 재해는 아니고. 폭설이다.
[오늘 오후 3시부터 이례적인 폭설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불과 폭설주의보가 발령된지 7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요. 여기, 제 다리 부근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벌써 정강이 위쪽까지 눈이 쌓여 움직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로 곳곳의 교통 상황은 정체 중이며. 문앞에 눈이 쌓여 혹여나 나오지 못할까, 한 시간마다 집 앞으로 걸어나와 눈을 치우는 시민들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연말을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바닥 잘 확인하고 다니셔야겠습니다.]
뉴스에서 저런 식으로 보도할 정도의 폭설이다. 그나마 날도 많이 쌀쌀해진 터라 바닥에 흩뿌려진 눈이 그대로 꽁꽁 얼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잘못하면 제설해야 되겠는데?”
“제설이 모야?”
“눈 치우는 거. 길바닥에 눈이 잔뜩 쌓여있으면 다니기가 불편하잖아. 그래서 눈을 삽으로 치우는 거야.”
“눈 치우는 거눈 윤스리가 잘 하지.”
윤슬이는 자기가 눈싸움할 적에 손으로 눈을 퍼올리던 것을 떠올렸는지, 돌연 바닥에 쭈그려앉아 눈을 뭉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내게 동의를 구하듯 초롱거리는 눈빛을 던진다.
“네 손으로 제설 시작했다가는 치우는 것보다 쌓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아앗... 그럴 리가 없따... 왜냐믄 이제 여섯 살이니깐 몬가 쪼끔은 더 강해졌을 거야.”
“그 정도 강해져서는 폭설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없어.”
“크윽... 폭썰...”
윤슬이는 분하다.
폭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명백한 오판이다.
- 이렇게 가끔 눈 오는 것두 좋네... 하아...
침대에 한량처럼 널부러진 고양이, 영희씨.
냥팔자가 상팔자라고들 하지만 저래 봬도 오늘은 제법 고생을 했다. 오전 장사를 하는데, 갑자기 눈이 쏟아붇는 게 아닌가.
“옵바! 세상이 하얗게 대따! 구름이 코풀어서 휴지쪼가리 날리는 게 틀림이 업써.”
놀랍게도 완벽히 틀렸다.
5세는 구름이 휴지에 대고 강하게 코를 풀어서 휴지 조각이 날린다고 잠시 착각했으나.
곧바로 나가서 손으로 쥐어보더니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는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 영업 중이었지만, 아무래도 눈이 진탕 내리면 장사하기는 어려웠다.
손님들이 직접 걸어서 찾아오시기도 어려울 테고.
그렇다고 영희씨한테 배달을 내보내게 시키기에도 무리가 있지 않은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오늘 장사는 점심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얼른 집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마감 청소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5세는 전력으로서 그다지 도움이 안 됐다.
나랑 영희씨만 죽어나는 거다. 사태가 사태이므로 최소한의 작업만 진행했지만 그래도 허겁지겁 정신 없이 정리하는 것은 꽤나 체력 소모가 심하니까 말이다.
[폭설은 내일 늦은 밤까지 지속되다가 점차 잦아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미 서울 도심 내에서는 광화문, 잠실 인근에서 추돌 사고가 몇 차례 발생해 구조요원들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되도록 외출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나 외출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안전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아나운서분도 저렇게 말씀하신다.
아주 높은 확률로 내일까지 우린 집에서 갇혀있을 것 같다.
“나 배고푸다!”
“배고파?”
“꼬르르륵-”
“꼬르륵이라고 입으로 말해도 설득력이 없긴 해.”
“이익...!”
내가 장난을 쳐서 화가 났는지 윤슬이는 앉아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귀쪽으로 배를 들이대어 문지른다.
말랑말랑한 게 귀랑 부드럽게 마찰해서 기분이 좋다.
“알겠어. 뭐 간식이라도 만들어주면 되나?”
“간식!”
“아까 떡 사왔으니까, 떡볶이 해줄까?”
“그게 좋케써. 근데 매운 걸루 말구.”
“오빠가 간장기름떡볶이 해줄게.”
“기름두 넣어?”
“기름으로 볶듯이 만들면 또 먹을만하거든.”
“움! 그거눈 옵바한테 맡기겠따. 맛있는 걸루 대령해조.”
“오냐.”
아까 집으로 돌아올 때 마트에 들러서 구매했던 떡을 꺼낸다. 원래 집에 식재료를 많이 놔두는 편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을 제외하곤 모두 가게에서 먹으니까 말이다. 일주일에 휴일 하루를 제외하곤, 전부 그렇게 하다보니 집에 식재료를 놔두어봤자 버리게 되더라.
헌데 이번 폭설을 보고 나는 직감적으로 예상했다.
며칠 집에 박혀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오래 쟁여두고 먹을 수 있을만한 것들을 구매해왔다.
그중 하나가 떡볶이 떡. 보관이 간편하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차피 간장이랑 기름 정도는 놔뒀으니까.”
파, 다진 마늘 등을 이용하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장기름떡볶이를 만들 수가 있다.
떡이 담긴 봉지를 뜯어 간식으로 먹을만큼의 떡을 꺼내는데 색이 첨가되어 있진 않지만 화사한 느낌이 든다.
별모양 떡부터 조랭이떡, 그리고 평범한 가래떡 모양과 하트 모양 떡까지 있다.
윤슬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일부러 이걸로 골랐는데.
“일부러 여러 모양으로 된 걸로 사길 잘했다.”
가게에서 요리할 때도 언제나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음식은 맛뿐만이 아니다. 비주얼도 상당히 중요하다. 첫인상은 냄새와 그릇에 담긴 비주얼에서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여러 가지 모양의 떡을 같은 비율로 꺼내어 그릇에 담고 끓는 물에 투하. 익을 때까지 떡을 끓여주었다.
떡이 익기 전에 대파를 썰어두어, 대야에 담아둔다.
“참기름이랑... 올리고당... 다진 마늘... 그리고 진간장.”
대야에 담아둔 재료끼리 마구 섞어 잘 버무리고 기름이 얕게 담긴 프라이팬에 넣는다.
자글자글-
자글자글-
기포가 낮게 깔리듯 터지며 기름에 버무려진 간장 소스가 떡의 겉면에 스민다.
유화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떡이나 면 등을 기름에 넣으면 기름과 물이 섞이면서, 그 재료의 겉면을 감싸게 된다.
자연스레 소스가 입혀지는 것이므로 재료의 맛과 소스의 맛이 따로놀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다.
파스타를 만들 때에도 사용되는 원리. 가끔 셰프들이 면수를 버리지 않는 데에는 그러한 유화현상을 사용하기 위함도 있다.
“또 기름만 잔뜩 뿌려서 떡을 조리하면 터질 수도 있거든.”
소위 떡류탄(떡 + 수류탄).
지금처럼 볶듯이 조리하는 게 아니라 듬뿍 담은 기름에 치킨 튀기듯이 떡을 조리하면, 떡 안에 잔류하던 기포가 열을 받고 팽창하면서 터진다.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안전 사고로 번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옵빠! 이거 바바. 내가 상 깔아놔써. 근데 저거 바바. 영히씨는 쩌기 침대에 누워서 아무 것두 안 해써.”
“그랬단 말이야? 그럼 영희씨는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겠다. 괘씸하니까.”
“엥? 그거눈 넘무 불쌍하고...”
“....”
일부러 말을 맞춰주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또 너무 불쌍하시단다.
헌데 최근 유독 느끼는 점이 있다.
윤슬이가 슬슬 자칭할 때 ‘윤스리’라고 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다. 아예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슬슬 나이를 먹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시후랑 유민이와 함께 있다가, 그 친구들이 자칭을 ‘나’로 하는 것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윤슬이도 슬슬 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바뀌는 게 당연한 거긴 한데.
아쉬운 기분도 든다.
“영히씨! 일루 와이지. 맨날 그렇케 누워있으믄 소 된다구 함모니가 그래써.”
- 알겠따... 흐어어어...
영희씨를 재촉하는 5세.
그럼에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윤슬이의 말투다.
가령, “이리 와야지!”라고 하고 싶다면 반드시 “와야지”가 “와이지”로 변한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사투리가 옮은 것 같다. 물론 할머니 쪽은 오히려 강릉에 사시면서도 그렇게 사투리가 심하신 편은 아닌데.
할머니의 친구분들은 또 그렇지 않다. 아마도 할머니와 살고 있을 때에는 그분들과 마주치는 일도 적지 않았을 테니, 그쪽에서 옮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 다 같이 먹자.”
간장기름떡볶이가 먹음직스럽게 완성되었다.
유화현상 덕분에 번질번질한 표면. 그 표면 위로 간장 소스가 찐득하게 묻어나고. 약간 짜글어진 대파 쪼가리들과 다진 마늘의 흔적들이 간간이 붙어있어 괜히 푸짐해보인다.
“잘 먹게쏘.”
“잘 먹으시오.”
우리 둘이 각자 포크를 들고 한 입씩 떡볶이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뜯어먹는데.
영희씨가 문득 궁금해졌는지 윤슬이 어깨를 톡톡 손가락으로 찌르고는 묻는다.
- 윤슬이?
“움?”
- 근데 요즘 윤슬이라고 안 하네.
“윤스리라구 하는데. 우물우물...”
- 어... 그 윤슬이라고 하는데. 그... 원래 윤슬이는 자기 자신을 부를 때 윤스리라고 했잖아. 요즘은 가끔 안 그러는 것 같아서.
“그거눈 이유가 이써.”
- 이유?
“그렇타.”
- 이유가 뭔데...?
“이제 윤스리, 아, 아니다. 나 여섯 살이니깐 쪼꿈 어른 돼써. 그니깐 이제 버릇 고쳐야 돼.”
스스로 그걸 생각해냈다니.
솔직히 나도 가끔 고민이긴 했다.
윤슬이가 만약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자칭을 ‘윤스리’라고 하면 그건 정말로 큰 일이니까.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고쳐주는 게 보호자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고칠 생각을 했다니.
장하다.
라고 생각하는 무렵.
TV에 틀어두었던 뉴스 채널에서 갑자기 불온한 소식이 들려온다.
[새로 취임한 정부의 공약이었죠. 만 나이 통일. 바로 내년부터 적용이 시작되는데요. 이것 덕분에 한두 살씩 젊어져서 기분이 좋다는 말씀들 많이 하십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행정적인 절차에서도 여러 가지 간소화되거나 통일되는 분야들이 생길 텐데요.]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권이 바뀌면서 이제부터 모든 분야에서 만 나이로 통일해서 나이를 표현하게끔 바뀐 것이다.
이것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나 영희씨는 굳이 따지자면 어느 쪽이든 상관 없는 부류일 테고.
우리 윤슬이의 경우.
“움? 옵바, 만 나이가 모지?”
“아아... 만 나이라는 건 말야.”
큰 일 났다.
이걸 윤슬이한테 알려주는 게 맞나?
만 나이대로 하면 윤슬이는 올해 제야의 종이 울려도.
여전히 다섯 살, 아니.
오히려 네 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