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2)
“대충 생일이 몇 번 지났는 지 표현하는 나이라고 생각하면 돼.”
“흐응, 그렇쿠나.”
“.... 휴우.”
다행이다.
오히려 직설적으로 설명해주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다섯 살인 윤슬이가 저 뉴스의 내용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 나이가 무엇인지, 개념 정도는 알려주어도 문제 없다.
다만 저런 식으로 정책이 바뀐다는 것을 알려주면...
그 다음엔.
“이익!! 이럴 리가 업따!! 1월이 돼두 그러믄 여섯 살이 아니자나!!! 윤스리 1년 돌려내! 돌려내라고!!”
이런 느낌으로 대노(大怒)할 게 뻔하다.
그런 사태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오빠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중에 알려줘도 큰 문제 없겠지.”
어차피 윤슬이 생일은 5월 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2~3월쯤까지만 숨기고.
그 이후에 들키더라도 두 달 정도만 더 참자. 그게 바로 진정한 다섯 살이 되기 위한 난관이다.
같은 느낌으로 설득시키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옵바, 왜 자꾸 혼자 말하눈 거지?”
- 눈이 많이 와서 심란한가봐.
“심난이 몬데?”
- 마음이 복잡하다는 뜻이야.
“오오...! 하나 배워써. 근데 그러믄 윤스리도 상당히 심난해.”
“...?”
윤슬이가 심란씩이나 하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지?
“어뜨케 하믄 빨리 어른이 될 쑤 있눈지가 궁금해.”
“.... 빨리 어른이 되고 싶구나.”
“웅, 이만큼이나 기다렸는데두 아직 다섯 살이야. 생각 쫌 해봐. 오누이 식땅에서 옵바랑 가치 일한지두 음청 많이 지나써. 그니깐 이거눈 아주아주 심각캐. 시간이 넘무 느리자나.”
“그래, 정말 그렇네.”
큰 일이다.
윤슬이는 떡볶이를 먹다말고, 느릿한 시간이 분했는지 입술을 비죽인다. 저 나이대의 감각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공감되기도 한다.
나도 저 나이대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이 늦어 잠들 때까지. 그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여유롭고도 느긋했던 것이다.
그 마음이 더욱 이해가 되었기에.
“뉴스 내용은 윤슬이 앞에서 언급 금지야.”
- .... 확인.
고영희씨는 내가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자, 그 제스쳐를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의미가 통한 것 같다.
그 사이에서 윤슬이는 나를 따라서 검지손가락을 대었는데.
“우앙... 기름 묻어써.”
그만 간장기름떡볶이의 기름을 간과하고 말았다.
손가락이 간장과 기름 투성이가 되었다.
제법 울상.
그 상태로 떡볶이를 먹긴 싫은지 스스로 일어나서 곽휴지를 몇 장 뽑아 손가락을 깔끔하게 닦아냈다.
표정이 상당히 뿌듯해보인다.
‘우하하! 이젠 여섯 살이니까 이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같은 표정이다.
**
스윽- 퍽!
스윽- 퍽!
제설이 한창 진행 중이다.
우리 가게 주변의 눈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나 영희씨는 삽을 들고, 눈을 퍼내며 산간 지방의 군부대 간접 체험을 진행 중이다.
무릎 언저리까지 쌓여있는 흰 눈의 협곡은 가히 압권이다.
물론 이 대량의 눈을 치우는데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식당과 같은 건물을 공유하는 이웃분들도 나와서 함께 치우는 중이다.
“옵바, 영히씨 빠이팅이야!!”
5세(앞으로 4세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서 5세라 부르기로 한다.)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가게 안쪽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응원 중이다.
이틀 간의 폭설이 끝나고, 정말 많은 눈이 거리를 이불처럼 뒤덮었다.
그만큼 재난적인 눈이 왔지만 이미 그친 상태였고. 전날까지 폭설이 내렸단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화창했기에.
“이 정도 날씨면 출근은 해야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슬이와 영희씨를 업어들고 어떻게든 가게까지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게 발코니와 문 앞까지 눈이 쌓여있었다. 물론 내린 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부드러웠고. 발로 대강 걷어내어 가게 안까지 진입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음에도.
“이렇게 놔두면 손님들이 들어오시질 못할 거 아냐.”
애초 이런 도로 상황에 밥을 먹으러 식당을 전전하는 사람이 있기나 하겠냐만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장사 준비를 하는 것이 프로의 정신이다.
그런 고로 제설이 시작된 것이다.
- 으아아... 너무 힘들어. 가끔 동서울 터미널에서 군인들이 한숨 푹푹 쉬는 거 봤는데.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고양이면서도 공감 능력이 제법 뛰어난 영희씨. 함께 제서를 하는 내 입장에선 저 발언이 뼈에 사무치도록 이해가 된다.
팔목이나 전완근은 둘째치고 엉덩이가 아프다.
엉덩이!
어느 너튜브 영상에서 봤던 것 같은데, 제설은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그 말이 이해가 된다.
결국 끈기 싸움이면서도 눈을 퍼낼 때 하체 균형을 잘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엉덩이에 자동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짬짬이 쉴 때마다 허리를 피고, 엉덩이를 마구 두드리게 된다.
“옵바, 윤스리가 뚜들겨줄게.”
내가 엉덩이를 두들기고 있자 윤슬이는 자기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는지 내 엉덩이를 함께 두들기기 시작한다.
콩콩콩콩-
이 정도 콩알펀치로는 제설로 쌓인 근육통을 풀어낼 수 없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있었다.
치유 스킬보다는 심리적인 버프 스킬에 가까운 느낌이다.
“윤슬이 덕분에 일할 힘이 나네?”
“쿠쿠쿠... 이제 여섯 살이거둔.”
“....”
아직도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
큰 일이다.
하루 지나면 아예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내가 한 살 더 먹어서 스물여섯이 되는 것과.
윤슬이가 한 살 더 먹어서 여섯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 그래도 그 사실만 안 들키면 되니까.”
당장 다음달인 1월이 되어도 여전히 5세, 아니 사실은 4세라는 그 절망적인 팩트만 들키지 않는다면.
윤슬이가 스스로를 여섯 살이라고 생각하든 열여섯 살이라고 생각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콩콩콩콩-
콩콩콩콩-
윤슬이는 내 제설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뒤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엉덩이 안마를 지속했고.
마치 내 삽의 추진력을 윤슬이로부터 얻는 것만 같은 기형적인 비주얼이 연출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출근길의 시민들이 흐뭇하게 미소짓기도 했다.
- 흐아.... 추워, 역시 제설 중이시구나?
“응? 치호씨?”
- 좋은 아침입니다.
제설 중에 갑자기 황치호씨가 가게 앞으로 오셨다. 차림을 보니, 어디 피난 가는 사람 같다.
방한 장갑, 롱패딩부터 시작해서 털모자에 방한 마스크까지. 익숙한 목소리와 몸짓이 아니었다면 황치호씨인 줄 몰라봤을 거다.
“치호 아저씨 와써.”
- 오냐, 치호 아저씨 왔다. 이제 곧 새해가 밝는데도 너는 여전히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구나.
“움? 치호 아저씨는 치호 아저씨지.”
- 너희 오빠랑 나이 차이가 안 난다니까.
“옵바눈 옵바. 근데 치호 아저씨는 아저씨.”
- ....
윤슬이는 나를 제외한 누군가를 오빠라고 부르는 법이 잘 없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둘째치고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암튼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한 켠을 간질인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승리감?
“근데 이런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세요?”
아직 가게 오픈 시간은 아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더라면 점심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무렵이다.
황치호씨가 단골인 것을 감안하면 이걸 모르고 있진 않을 텐데 말이다.
- 너무 배고파요...
“...? 밥을 해드세요.”
- 집에 쌀이 없어요.
“라면을 드시는 건 어때요?”
- 그치만 아침엔 밥을 안 먹으면 하루종일 기운이 없어요. 원고도 잘 안 써지는 걸요.
“...?”
- 밥 한 번만 해주면 안 될까요??
애교를 부리듯이 두 손을 모아 볼 옆에 가져다대는 치호씨. 아주 화가 날뻔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직 식당 오픈 시간은 아닌 걸 알지만 밥은 먹어야겠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얘기다.
치호씨네 댁이 우리 오누이 식당에서 꽤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식당을 택한 것 같다.
다른 식당들도 어차피 눈 때문에 가게를 쉽사리 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 싶다.
물론 문전박대해도 전혀 할말 없는 상황이지만.
단골이기도 하고.
마침 쓸모도 있어보이니 치호씨를 좀 써먹기로 했다.
나와 달리 군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형편이 좋게 되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 조건? 뭔데요? 아무튼 밥 해준다는 거죠?
“그럼요. 치호씨가 우리 식당 얼마나 자주 들리는데 한 끼 정도는 해드려야지. 물론, 평소처럼 제대로 나오진 않고 약간 약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긴 한데.”
- 상관 없어요 제대로 밥값은 낼게요!
“좋아요. 근데 제가 말씀드린 조건은 밥값을 내라는 게 아니에요.”
- ...?
“여기 삽 드세요.”
- ...?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저와 동참하시죠. 이 눈들을 가게 앞에서 모두 거둘 때까지 주방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 ...!
번뇌하는 치호씨.
방한 마스크를 썼는데도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명백히 보인다.
머리를 감싸쥐면서 이어지는 외마디 한탄.
- 아... 전역하면서 절대로 남은 평생 제설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인생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죠.”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5세.
내 뒤에 숨어서 얼굴만 빼꼼 내민다.
그리고 한 마디.
“일하지 않으믄 먹지두 못해! 우리 함모니가 그래써! 그래서 윤스리두 옵바 도와주는 거다!”
- .... 맞는 말이지.
윤슬이의 말이 자극이 되었는지.
아니면 우리 가게 말고 어차피 기댈 곳도 없으니, 치호씨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인 건지.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제설에 동참한다.
일손이 하나 늘었다!!
“나이스.”
- 빨리 빨리 작업 끝내고, 짬 먹으러 갑시다.
“짬이요?”
- 아아... 버릇이 돼서. 절대 주현씨 음식을 짬에 비교한 건 아니에요.
“???”
뭔 소리지.
좌우지간 하나 더 늘어난 일손과 제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30분 정도 더 걸렸을 것 같은데.
치호씨의 합류로 어떻게든 15분 내로 끝냈다. 의외로 약골일 것 같던 치호씨가 분전했던 덕분이다.
“쿠쿠쿠... 윤스리가 응원해줘서 금방 끝나써. 역씨 여섯 살이야.”
- 아! 이제 윤슬이 한 살 더 먹는구나.
“핳하하! 그렇타!”
- 응...? 잠깐만.
“움?”
치호씨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 생각해보니, 내년부터 만 나ㅇ.... 우웁!
쓸데 없는 소리를 하려는 것 같다.
십중팔구 그 얘기겠지.
내년부터는 모두 만 나이로 계산하게 됐다고.
그걸 윤슬이한테 들려줄 수 없는 나로서는.
치호씨의 입에 눈을 한가득 넣어드릴 수밖에는 없었다.
“배고프시다면서요? 일단 눈이라도 한 입 드세요!”
“움? 눈싸움 시작?”
다행히 윤슬이는 눈싸움으로 착각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