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173화 (173/200)

173화: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3)

윤슬이와 함께 치호씨에게 눈덩이를 몇 입 정도 먹여드리고는 가게로 돌아왔다.

깔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출입은 원만하게 가능할 정도로 눈을 치워두었다. 양 옆으로 몰아 벽을 쌓는 느낌으로 제설을 했던 탓에 우리 가게 앞엔 마치 자그마한 눈더미 협곡이 솟아난 듯했다.

윤슬이는 그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

영희씨를 데리고는 가게 앞에서 노는 중이다.

“우오오!! 미끄럼틀보다두 더 빨러!”

눈이 산처럼 쌓여있으니, 영희씨에게 그 꼭대기로 올려달라고 부탁하곤 미끄럼틀 타듯이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있다.

영희씨는 귀찮은 듯 툴툴대면서도 부탁하면 꼭 저렇게 들어준다.

“치호씨, 눈 맛은 어땠어요? 배가 고프다고 하셔서.”

- 흙이 섞여있어서 좋더군요. 자연의 맛이랄까?

“역시 자연이 좋죠? 뭣하면 소금 조금 쳐서 한 입 더 넣어드릴 수도 있긴 해요.”

- 비꼰 건데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떡해요...

치호씨는 모처럼 불만스러워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제설까지 도와주었는데,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입 속을 파고드는 눈폭탄이었다.

화가 날 법도 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 상황? 그냥 장난으로 눈 먹인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제가 평소에 그런 장난을 하진 않잖아요.”

- 그건 그렇긴 하죠. 윤슬이라면 모를까.

기억을 거슬러보면, 치호씨가 우리 가게에 막 들르기 시작했던 무렵.

치호씨의 입에 마구마구 고구마를 집어넣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윤슬이에게 고구마 전개 가득한 동화를 추천했기에, 복수 행동으로써 당했던 일이긴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런 사건이 있던 덕에 지금처럼 장난도 어느 정도 칠 수 있는 관계로 남은 건지도 모른다.

“대신 오늘 밥은 공짜로 해드릴게요. 화 푸세요.”

- 공짜요? 그럼 바로 화 풀죠.

보아라.

이게 황치호씨의 장점이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좋다.

“대신 윤슬이한테 그거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 만들어주시는 밥이 공짜인 거요?

“아니, 그거 말고요. 그... 내년부터 만 나이로 계산해서 1월 되어도 윤슬이 나이 안 먹는 거 말이에요.”

- 에엥, 그걸 비밀로 해야 돼요? 이유가 뭐죠?

“윤슬이가 저래 봬도 얼마나 나이에 민감한데요! 엊그제 저녁에 한 번 얘기해봤는데. 지금 내년부터 여섯 살 된다고, 자기 말투도 바꾸려고 하고. 행동도 바꾸려고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더라니까요?”

- 아아...! 그럼 제가 만약에 내년이 돼도 여섯 살이 아니라고 말하면 되게 실망하겠네요? 그래서 그 말 하려고 할 때 입에다가 눈을 박아넣은 거군요!

“맞아요. 눈을 박아넣은 건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박한데 당장 눈 앞에 희고 부드러운 게 보여서 그만.”

- 이해해요. 주현씨가 윤슬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는 제가 또 잘 알죠. 그리구 밥도 한 끼 공짜로 만들어주신다면서요?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는데 제가 어찌 감히 불평하겠어요.

“하하하, 뭐 드시고 싶은 거 따로 있으세요? 지금 아직 재료를 못 사러 갔다와서 만들 수 있는 게 조금 제한적이긴 한데.”

- 고기! 고기 먹고 싶어요.

“육류는 상할까봐 얼린 채로 해동 안 해둔 게 몇 개 있긴 한데. 이건 거의 패밀리 밀로만 해먹는 거라. 괜찮으시겠어요?”

- 네... 사실 지금 배고파서 뭘 먹든 맛있을 것 같긴 해요. 또 주현씨 요리니까!

그렇게 말해주시니 또 고맙다.

최고로 맛있게 해드려야지.

배가 고프다고 하시니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드릴 수 있는 게 좋을 텐데. 그럴 땐 딱 제격인 요리가 하나 있긴 하다.

사실 요리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라, 메뉴로는 절대로 안 내는 음식인데.

가끔씩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말로 바쁜 날이 있다. 재료 손질에 손이 많이 가거나, 손님이 많이 오셔서 뒷정리로 바쁜 날에 윤슬이 밥을 멕여야 되면.

이 요리에 저절로 손이 가는데, 그럴 때마다 윤슬이는 맨날 이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자기는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먹으면 건강엔 좋지 않으니까, 매일 먹이진 못하지만.”

냉동고 안쪽에 잠들어있는, 다짐육 소보로를 꺼낸다. 이미 조리가 된 다짐육이다.

마늘과 소금 후추 등으로 간을 하고, 먹을 수 있을만큼 볶아둔 것인데. 이걸 냉동해두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다.

돼지고기 다짐육 소보로는 생각보다 쓸모가 많으니 말이다. 가령 국수의 고명이나 덮밥 위에도 얹을 수 있다.

“기름기가 어느 정도 빠져있어서 많이 넣어도 안 느끼하다는 것도 장점이지.”

특출난 맛을 보이는 식재료는 아니지만,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제법 그럴싸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우선 버터를 팬에 깔고, 다진 마늘과 생강으로 향을 낸다. 거기다가 간장으로 색을 내며 쌈장을 투하해서 튀기듯 볶다가.

냉동 소보로를 넣고, 밥과 볶으면.

“이게 한식 볶음밥이지.”

튀기듯 볶아진 쌈장에서 감칠맛이 올라오며 간장과 마늘, 생강의 향이 조화로이 어우러진다.

소보로의 바삭한 식감과 함께 볶아진 밥을 한 술 목구멍으로 떠넘기면 풍부한 맛이 일품이다.

“식사 대령이요.”

- 오오... 제육 소스로 볶음밥 만든 거예요?

“아뇨, 소스 자체는 아예 다르긴 한데. 색은 비슷하죠? 한 번 드셔보세요.”

- 후루룹...

숟가락에 듬뿍 떠서 입 한가득 우겨넣는 치호씨. 다소 게걸스러운 식사법이지만, 잘 먹어서 보기 좋다.

꼭꼭 씹더니 꿀떡 넘기곤 환하게 미소 짓는다.

- 너무 맛있는데요? 기사 식당 고추장 삼겹살 소스로 만든 볶음밥 느낌! 근데 또 느끼하진 않네.

우걱우걱.

우걱우걱.

마치 막 하루 농사를 마치고 저녁 식사하는 농부처럼 기운 좋게 먹는 치호씨.

“천천히 드세요.”

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 모습은 요리사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만큼 맛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해주는 셈이니까.

치호씨가 잘 드시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마저 장사 준비를 하려는데. 윤슬이와 영희씨가 가게 안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윤슬이가 웬일로 울상이다.

입술도 삐죽 나온 게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왜 그래 윤슬이.”

“우우.... 옵바.”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넘어졌어? 어디 다친 거야?”

“그거눈 아니다...”

“그럼?”

“다 알아버려써.”

“뭐를?”

“윤스리가 1월 돼두 아직 여섯 살이 아니라는 사실!”

“?! 그걸 어떻게...!”

여태껏 숨기고 있었는데!

설마 영희씨가?

싶어서 쳐다보니까 필사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영희씨. 그럼 그렇지.

고영희씨가 나를 배신할 리는 없었다.

요 주말 간 얼마나 조심했는데,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할 리가 없지.

우리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치호씨.

계속 저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으니, 황치호씨일 가능성도 없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지나가는 어떤 아저씨가... 그래써.”

- 꽤 나이가 있는 아저씨였는데, 기분이 좋으셨나봐. 한 살 어려진 기분이라나? 그런 식으로 말하고 지나가시는데, 윤슬이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까...

“아아...”

아무래도 그 아저씨 때문에 윤슬이가 그 정보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궁금해진 나머지 영희씨에게 알려달라고 채근한 모양이다.

그럼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실망을 했구나, 우리 윤슬이가.”

“그렇타... 이제 쪼꿈만 있으면 여섯 살 되는 줄 알고 기대했다. 근데 이러믄 실맹이 매우 거대하다.”

얼마나 실망이 크면 거대하다고 표현할까.

최근 윤슬이가 보였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 감정 알 것도 같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주의를 돌리는 수밖에.

“윤슬아, 대신 오빠가 맛있는 거 준비해놨는데.”

“마, 마싯는 거? 얼매나 맛있는 건데?”

“저기 치호 아저씨가 먹는 것좀 훔쳐보고 와봐.”

“훔쳐보기 작쩐.”

5세는 테이블 사이사이를 마치 범인을 미행하는 형사처럼 옮겨다니며 치호씨를 관찰한다.

그리고는 알아챈 모양!

“저거눈!”

“윤슬이가 좋아하는 거지? 소보로 볶음밥.”

“저건 젤루 맛있는 것 중에 하나야.”

“같이 눈치우느라 고생했으니까, 볶음밥 한 그릇 먹으면서 좀 쉬자. 그럼 되겠지?”

“그럼 되게써!”

5세는 맛있는 걸 먹여주겠다니까 금방 기운을 냈다.

생각보다 심적인 타격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모양.

소보로 볶음밥의 재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니, 그걸 똑같이 볶아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윤슬이 앞에 금방 내어줄 수 있었다.

물론 그러는 김에 영희씨한테도 밥을 내주었기 때문에 치호씨 포함 4명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맛있게 밥을 먹는 윤슬이.

오후 장사를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마음은 분주했지만, 동생이 그 건에 대해서 신경쓸까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옵바.”

“응?”

“그래두 나 많이 어른 됐찌?”

“윤슬이? 많이 어른 됐지.”

역시나 신경 쓰이는 모양.

밥을 우물우물 먹으면서도 평소만큼 표정이 밝진 못하다.

“얼매나 어른 됐는데! 한 번 말해조.”

기분을 풀어달라는 뜻.

“우리 윤슬이 덕분에 올해 행복해진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원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근데 윤슬이는 그 어려운 걸 몇 번이나 해냈으니까, 이미 충분히 어른이야.”

“움...! 그렁가?!”

“그럼. 한 번 치호 아저씨한테도 물어봐.”

“치호 아저씨! 그렁가?”

- 그럼~! 우리 윤슬이 덕에 나도 오누이 식당 올 때마다 얼마나 기대를 많이 하는데.

“영히씨! 그렁가?”

- 당연하지. 우리 윤슬이는 아직 다섯 살이어도,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훨씬 대단해.

“쿠쿠쿠쿠... 나눈 어룬이당.”

어른들의 다소 배려가 섞인 아부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5세. 입꼬리가 올라가있는 걸 보면 기분은 거의 풀린 것 같다.

“근데 윤슬이.”

“움?”

“이제는 윤스리라고 안 하네?”

문득 궁금해졌다.

요근래 고치고 있는 것은 아는데.

스스로 왜 고쳐야겠다고 생각해졌는지는 모른다.

“잉? 윤스리라구 해. 근데 쪼꿈만 할 거야 이제.”

“이제 어른 됐으니까?”

“아니, 그거눈 이유가 이써.”

“이유? 윤슬이가 자기를 윤스리라고 말했던 거에 이유가 있다는 말이야?”

“그렇타.”

“이유가 뭐길래?”

“이러케 해야 사람들이 윤스리 이름 기억해주자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데.”

“...!”

그런 거였나.

확실히 윤슬이는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

가끔 모르는 사람들이 애기라고 부르면, 애기 아니구 윤스리!라며 거의 역정을 내니까 말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구나.”

“웅, 근데 요즘은 이제 윤스리 이름 다 아니까는 많이 할 필요가 업써.”

우리 집 5세.

오늘도 역시나 계획적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