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선물(4)
그리고 이건.
그날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아직 우리 남매가 만나고 1년이 채 되지 못한.
2월의 이야기.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개중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이사다.
마침 전세 계약의 갱신 일자가 되었는데, 그간 장사가 잘 된 덕에 자금이 충분히 되어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긴 것이다.
“식당에서도 더 가깝고 좋아졌지.”
지난 집, 아니 집이라기보단 원룸이니 방에 가까운 그 집보다 넓기에 윤슬이도 만족하는 듯 보인다.
이번에도 전세이긴 하지만 16평 정도 되어 고양이 한 마리와 우리 남매가 살기엔 아주 적절한 크기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윤슬이의 방이 따로 생기도 했다.
“여기에 꽤 오래 살게 될 것 같으니까, 시후나 유민이처럼 자기 방을 만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커다란 거실과 화장실, 부엌 그리고 하나의 방이 따로 있는 형태의 집이었다.
그래서 방 하나를 윤슬이 것으로 주었다. 내 방으로 해도 됐지만, 거실이 워낙 넓기에 난 그냥 거실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가족은 서로 사생활이 그리 지켜지지 않는 편인지라 영희씨나 동생에게 딱히 숨길만한 것도 없었고 말이다.
“우우... 옵바.”
덜커덕-
아침이 되자 깨우지도 않았는데, 자기 방에서 걸어나오는 윤슬이.
[10:34]
시계를 확인해보니 그럴만한 시간이 되었다. 식당으로 출근하지 않는 날은 이토록 늦장을 부리곤 하는 것이다.
집을 이사하여 공간이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에. 동생이 잠꾸러기인 것은 여전했다.
“일어났어?”
“그렇타.”
잠결에 눈을 부비며, 소파에 드러누워있던 내 가슴팍에 폭- 안기는 윤슬이.
그대로 내 가슴팍 위로 꾸물꾸물 올라타서 덩달아 드러누워버린다.
“요즘 몬가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옛날 집에서는 일어나믄 옵바가 바로 있어써. 근데 지금은 일어나믄 업써. 그래서 거실까지 나와야지 돼.”
“그게 이상해? 그래도 윤슬이 방 생기니까 좋잖아.”
“움... 그거눈 조아. 윤스리 요새야.”
요새.
동생은 자기 방을 그렇게 표현한다.
참 윤슬이답다면 답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에 이야기해보자.
“근데 몬가 옛날엔 자고 있을 때 영히씨랑 옵바가 옆에 있어서 북적북적한 게 좋아써. 지금은 넓어서 좋아. 두 개 다 좋은데. 몬가 달라.”
“그럼 가끔 거실 나와서 셋이서 자면 되겠네.”
“그게 좋게써.”
여름엔 거실에서 나란히 셋이서 자야할지도 모른다.
윤슬이 방엔 공간 문제 때문에 에어컨 설치를 따로 못했다. 그래서 거실에밖에 에어컨이 없다.
여름이 되면 또, 옛날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셋이서 부대끼면서 잠들어야할지도.
“근데 윤스리 오늘 함모니 꿈 꿨다.”
“할머니 꿈?”
“응, 함모니 나와써.”
“할머니랑 같이 재미있게 놀았어?”
“우움, 아니. 함모니가 막 울어써. 그래서 윤스리가 위로해줘써.”
“할머니가 우셨다고? 꿈에서?”
“응.”
슬픈 꿈을 꾸었구나.
안쓰러워져서 윤슬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근데 갑자기 씨익 웃더니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근데 위로해줬더니 함모니 금방 웃었어. 그니깐 별루 안 심각해.”
“그래? 우리 윤슬이가 위로를 해줘서 할머니가 기분이 금방 풀리셨나보네. 또 큰 일을 해냈구만.”
“해냈따~ 윤스리가 해내써~!”
동생은 어느 너튜브 광고에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한 멜로디를 붙여 일명 [윤슬이가 해냈다!] 송을 부른다.
그 멜로디에 맞추어 아침상을 차리려 일어나는데.
부우우웅-!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누군지 확인해보니, 마침 할머니다.
“할머니한테서 전화 왔네. 윤슬이가 괜히 그 꿈을 꾼 게 아닌가보다.”
“후후... 이젠 미래까지 예측하는 윤스리. 못하는 게 업써.”
5세의 자화자찬을 한 귀로 흘린 뒤.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할머니: 주현이냐?]
“네, 주현이요. 윤슬이도 옆에 있어요.”
[할머니: 그렇겠네. 아침은 먹었나?]
“이제 먹으려고요. 오늘 휴일이다보니까, 조금 늘어져서 늦게 먹게 됐어요.”
[할머니: 그려. 쉬는 날은 잠 자는 게 최고지. 암. 그런데 지금 윤슬이랑 잠깐 떨어져볼 수가 있는가?]
“지금요? 괜찮긴 한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지는 몰라도 윤슬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 듯하다. 스피커폰으로 해두진 않았으나, 괜히 신경이 쓰여서 잠시 윤슬이 방으로 들어왔다.
“응악! 옵바가 윤스리 방 침범했따!!”
5세는 자신의 방(자칭 요새)에 내가 멋대로 침투한 것에 분한 듯했으나, 우선 할머니와의 통화가 중요했으므로 무시했다.
“네, 지금 옆에 윤슬이 없는데요. 이야기해보셔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할머니: 으응... 뭐 사실 너한테 이리 이야기하기두 되게 멋쩍구 그런데. 아무래두 지금은 윤슬이 보호자가 너니까는.]
“....”
그 전조만을 듣고도, 나는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기가 딱 맞물리는 것이다.
[할머니: 윤슬이랑 네 엄마, 죽은 지 딱 1년 되는 시기다. 너한테 이런 말하는 거 참 미안하지만, 윤슬이는 한 번 얼굴 비추는 것두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말이다.]
“그건... 그렇죠.”
할머니도 조심스러우실 것이다. 내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말이다. 그 여자는 내게 어릴 적 몹쓸짓을 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윤슬이에게만큼은 달랐다. 적어도 윤슬이한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할머니는 내게 성묘를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윤슬이만큼은 한 번쯤 그녀가 잠든 곳에 얼굴을 비추는 게 어떻겠느냐.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다.
[할머니: 윤슬이랑 네가 괜찮다고 한다믄 나는 아가 데리구서 한 번 다녀올 생각이다. .... 지난 주에 한 번 다녀왔다마는 아무래두 계속 생각이 나구 찝찝해서 안 되겠드라. 윤슬이 의견 한 번 물어봐주겠나?]
“할머니가 저한테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알겠어요.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할머니: 그래... 고맙다. 주현아.]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미안해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니 되려 나까지 마음이 아팠다.
내게 그런 말씀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윤슬이의 현재 보호자는 나니까.
나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윤슬이만 쏙 빼어서 그곳에 데리고 가실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미안 윤슬이 배고프지? 오빠가 금방 밥해줄게.”
“별루 갠짜나.”
- 난 배고프다. 나도 밥해준다고 해줘.
“.... 너 것도 해줄게. 내가 언제 빼먹은 적 있냐.”
영희씨가 장난 삼아 한 마디를 보탠 덕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물론 내 기분을 알고서 저런 건 아닌 듯하지만.
지난 집에서보다 조금 더 넓어진 주방에 서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오늘의 메뉴는 간단한 토스트.
한국인은 빵보다 밥이라고들 하지만, 가끔씩은 이런 음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공들인 아침 밥을 만들기 힘들 때 특히 그렇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마요네즈와 연유를 섞어 소스를 만들고 갈색으로 바싹 구워진 식빵의 단면에 바른다.
그 위에 스크램블드 에그와 슬라이스 치즈, 베이컨을 올린다.
반대쪽에 식빵을 이불처럼 덮어주면 간단히 완성.
“윤슬아, 영희씨. 밥 먹자.”
“이미 대기 중임미다.”
- 나도 대기중이다.
둘은 내가 부르기도 전에 이미 주방 앞 식탁에 앉아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티는 안 내도 둘 다 배가 꽤나 고팠나보다.
이제 슬슬 11시니까 그럴만도 하다. 평소에는 오전 7-8시 30분 사이에 아침 식사를 하니까 말이다.
“윤스리 이거 대따 좋아함.”
- 영희두 이거 대따 좋아함.
“...?”
방금 어색한 3인칭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윤슬이가 곁눈질한다.
“영히두?”
- 영희도.
“우우... 윤스리 인제 윤스리라구 안 할래.”
- ?? 왜?
“영히씨는 어른인데두 그렇게 했자나. 근데 어른이 그러믄 별루 보기가 안 좋은 거 같아. 그래서 인제 윤스리라구 안 한다. 곧 어른이니까는.”
- .... 나도 가끔 응석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고영희씨는 다소 억울한 듯 툴툴거리며 토스트를 우걱우걱 먹는다. 그러면서 슬슬 내 눈치를 본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방금 윤슬이를 따라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한 것도 내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 게 아닐까.
아마 윤슬이 방에서 통화를 마치고 나온 내 표정이 많이 안 좋았는가보다.
그래서 장난을 쳐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모양.
영희씨한테는 고맙고도 미안하게 됐다.
그런 마음이 들어서 영희씨 잔에는 우유를 가득 채워주었다.
“옵바, 나두.”
윤슬이는 자신에게도 우유를 한가득 따라달라는 어필을 한다. 잔에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데도.
“잔에 우유 반이나 남아있는데?”
“핳하! 문제 업따. 이걸 다 마시면 대는 일.”
꿀꺽꿀꺽-
꿀꺽...
“프하! 이제 담아줘.”
“뭐야 윤슬이, 왜 갑자기 우유에 집착해.”
“움? 복수야.”
“우유를 마시는 게 어떻게 복수야?”
“아까부터 영히씨가 따라해써. 그니깐 영히씨 우유 마시는 거 똑같이 따라해서 복수.”
아주 무시무시한 복수였다.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복수.
“프흐... 그래, 많이 먹어라. 우유 마시면 키도 많이 큰다니까.”
“오오! 그럼 앞으루 영히씨보다 우유를 두 배 마니 먹어서 영히씨보다두 두 배 커진다.”
우유를 쪼르르 따라주자 윤슬이는 토스트는 내려놓고 우유 마시는 데에 집중한다.
꿀꺽꿀꺽!
그런 모습을 보니, 방금 통화하다가 다운된 기분이 마법처럼 나아지는 듯한 기분이다.
웃음이 다시금 입가에 돌아왔다.
“윤슬이가 잘 먹으니 오빠 기분까지 좋아지네?”
“그게 바루 윤스리. 그러니깐 동생한테 잘 해야겠찌?”
“오냐, 잘 모셔야겠네.”
간단한 토스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윤슬이는 그릇을 정리한다. 자기 것은 물론이고, 영희씨 것과 내 것까지 한 번에 식기를 정리해준다.
동생의 역할이다.
새 집으로 이사오면서 정한 것 중에 하나다. 내가 밥을 만드는만큼 영희씨랑 윤슬이도 자기 역할을 분담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영희씨는 윤슬이가 모아온 식기들을 설거지할 것이다.
덕분에 내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다.
촤아아-
영희씨가 설거지하는 물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온다.
윤슬이는 식기를 모아두는, 자기 임무를 마치고는 내 옆자리 소파로 올라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윤슬아.”
“움?”
“윤슬이는 엄마 만나러 가고 싶어?”
“우움...”
잠깐 고민하다가, 내 손을 턱 잡는다.
“가구 싶어. 근데 혼자서는 싫어.”
“그럼 혼자서는 안 가지.”
“옵바두 가치 가는 게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