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앞으로는 늘
“윤슬이가 그런 것도 알아?”
“그거눈 아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왜냐면 윤스리랑 옵바는 너무 이뻐서 미워할 수가 없거든!”
“.... 그래. 우리 동생 말이 맞네.”
“핳하! 당연한 거.”
가슴을 펴고 자랑하듯 행동하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선물이라.
과연 하늘에 계신 엄마는, 내가 선물을 드리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지만 무언가 전해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내, 내가 엄마의 본심을 알아내었다고.
엄마는 나쁜 엄마가 아니었다고.
타인처럼 이주희씨라고 불러선 안 되었다고.
어쩔 수 없었더라고, 그 어쩔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진심으로 생각하는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 닿을지도 모른다.
“옵바, 그림은 어때?”
“그림?”
“윤스리가 옵바 그림 그려줄게. 그럼 옵바가 윤스리 그림 그려주면 대자나. 그 담에 엄마 사진 옆에다가 올려두자.”
윤슬이는 아무래도 납골당 내부의 풍경을 보고 이야기를 꺼낸 듯하다. 납골당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유골들의 옆자리엔 다양한 것들이 놓여있다.
짧은 글귀, 혹은 긴 글귀.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사진 등.
그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가져올 수 있는 물건도 없으니까...”
애초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 같은 것은 내겐 없었다. 할머니라면 갖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수중에 없기 때문에 엄마의 유골 옆에 둘 수 없지 않은가.
사진도 마찬가지.
글솜씨는 애초 그다지 좋지 못하니.
“그럼 윤슬이 말대로 오빠랑 서로 그려주기 할까?”
“그게 좋아!”
윤슬이는 엄마에게 그림을 보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나랑 서로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게 놀이처럼 느껴져 재미있는 건지.
잔뜩 신이 나서 발을 구르더니, 납골당 건물 바깥으로 서두른다.
“옵바, 빨리 가서 종이랑 크레파스 사야지!”
“그래, 늦기 전에 사오자.”
납골당 내부에서 그리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그리는 장소는 바깥이 될 것이다.
그럼 날이 저물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낫겠지.
우리 남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학교.
그 근방에 있는 문방구에 들러서, 너무 크지 않은 크기의 흰색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구매했다.
“쿠쿠... 옵바, 내 그림 실력을 보구 놀라지마. 장난이 아니거둔.”
“이미 여러 번 봐서 놀랄 일은 없어. 그리고 장난 아닌 것도 알고 있어.”
“움? 알구 있구만.”
5세는 매우 자신만만해보였지만.
그 자신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단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림을 그릴 도구를 구매한 우리는 우선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남부라지만 경기도권인데도 학교의 크기가 꽤나 작게 느껴졌다.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초등학교는 그래도 한 학급에 30여명은 되었고, 그 탓에 전체 학년을 수용하는 교사는 5층 규모였다.
반면 이곳의 초등학교 건물은 2층 규모의 키작은 교사였다. 그 탓에 운동장이 상대적으로 넓어보였다.
물론 방학 시즌인지라 학생은 없었고, 경비를 서는 아저씨 한 분이 계셨지만 윤슬이는 데리고 있다보니 수상하게 생각되진 않는 듯했다.
“저기가 좋겠따!”
운동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윤슬이가 운동장 반대편에 있는 화단을 가리킨다.
아직 2월인지라 꽃이 피진 않았지만, 관리를 잘 해놓으신 덕인지. 아니면 올해가 예년보다 따듯한 덕인지 낮게 풀들이 깔려있었다.
풋풋한 분위기를 보이는 좋은 배경이 되어줄 듯했다.
“그래, 그럼 저기 가서 윤슬이부터 오빠 좀 그려줄까?”
“기대하시라!”
윤슬이는 자신만만하게 뛰어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그림판 위에 도화지를 올려두고, 크레파스가 든 플라스틱 상자를 주섬주섬 연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구부리곤 숙여 앉았다. 윤슬이 시야에 맞게끔 자세를 낮춘 것이다.
“아아, 자세 좋쿠요! 그대루만 감미다!”
윤슬이는 프로 화가 흉내를 내며 크레파스심이 새끼 손가락 방향에 오게끔 움켜쥐고는 자기 예술 본능을 폭발시키고 있다.
종횡무진, 손이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떠오른다.
아주 옛날에 있던 일.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왜냐면 그땐 내가 윤슬이 자리에 앉아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반대편엔 젊은 날의 엄마가.
‘엄마! 절루 가서 앉아바. 내가 그려줄게.’
‘주현이가 엄마 그려주는 거야? 완전 영광이네?’
‘히히, 당연하지. 나 그림 완져니 잘 그려. 제일루 이쁘게 그려줄게.’
어느 봄날.
유치원의 숙제로 선생님이 내어주신 과제가 부모님 얼굴 그리기였던 것 같다.
그때 아빠는 업무 관계로 잠시 출판사 쪽에 들르셨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엄마의 그림을 우선해야 했었고.
엄마와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까지 그림 도구를 갖고 산책을 나왔었다.
나는 엄마한테 화단 앞에 앉아달라고 부탁했고.
엄마는 쭈그려 앉은 채 팔을 꼬고는, 턱을 괴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가.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지켜보는 눈빛. 따사로운 눈빛.
“.... 기억난다.”
그 소중한 기억을 잊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했던, 다정한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
그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기억들이 나쁜 쪽으로 바뀌어 머리 속에 박혀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은데.”
엄마가 사실은 나를 얼마나 아껴주었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해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데.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다. 1년 전에 사고로.
하지만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야 한심한 아들일뿐이다. 우리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셔도.
내가 수술하던 와중에도.
심지어 모종의 음모로 자신이 순식 간에 악역으로 몰렸을 때도. 엄마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대단한 엄마의 아들이니까. 마찬가지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 그러니까.”
저 아이는, 저 아이만큼은 내가 잘 돌볼게.
윤슬이는, 엄마가 내게 남겨준 마지막 보물이니까.
“옵바.”
“응?”
“이거 보시라.”
윤슬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게 그림을 들이민다. 눈 앞에 들어온, 크레파스로 그려진 선이 두꺼운 그림.
그리고 역시는 역시.
나를 두고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려진 대상이 누구인지, 정체를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우리 윤슬이가 그림을 기가 막히게 그리네?”
“기가 맥혀? 체고지? 화가 해두 되겠찌?”
“아니. 화가는 안 돼.”
“움? 왜?”
“오빠 가게 도와서 요리사 한다고 그랬잖아.”
“아앗... 그러네. 그럼 화가는 포기할게.”
동생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려는 것을 바로잡은 뒤, 내 위치에 그대로 세워두었다.
윤슬이는 잠깐 삐쭉거리며 어떤 자세를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쭈그려앉아 양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휘휘 저었다.
“자세 바꿀래!”
바뀐 자세는 별 건 없었고, 양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는 것에서 양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이 윤슬이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게끔 자세를 취해준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마찬가지로 선을 굵게 하여 빠르게 그림을 완성시켰다.
윤슬이의 특징만을 잡아서 간략하게 그린 그림. 훌륭한 화가처럼 자세하고 완벽하게 그릴 생각은 없다.
그저 엄마에게 보여드릴 것만을 생각했다, 우리 윤슬이가 어떤 느낌으로 자랐는지.
그리고 도화지의 뒷면엔 짧은 글귀를 적어넣었다. 하늘에 계신 엄마가 이 그림을 보아주시길 기도하며.
**
“이제 저희가 등장할 차례인가요? 오라버니.”
“.... 요즘 너무 우리가 잠잠하긴 했지?”
“뭐, 저희가 잠잠한 게 오히려 희소식 아니겠어요? 가게 운영하는 데도 그렇고, 별 탈이 없단 뜻이니까.”
“그거랑 별개로 심심한 게 문제지.”
“그러니까 오늘 좋은 일 한 번 해보자고요.”
송주현, 장윤슬 남매가 납골당을 떠난 뒤 그 자리에 햇님이와 달님이가 등장했다. 물론 다른 손님들로서는 목격할 수 없게끔 투명한 상태이다.
오누이는 이주희의 유골함, 그 앞에 놓인 두 장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선이 굵어 도무지 프로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게 누구를 그린 것인지 직접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옆에 두고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힘이라면?”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햇님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이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오누이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달님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어둡고 둥그런 문이 하나 생겼다.
오누이는 마치 방문을 넘나들 듯 익숙한 느낌으로 그 어둠의 저편으로 향했다.
대관령의 터널처럼 기나긴 통로를 지나자, 저승이었다. 길쭉하고 메마른 나무들이 듬성이 나있는 풍경.
이미 죽은 영혼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는 모습. 또는 생전에 죄를 저지른 탓에 죄옥으로 끌려가는 영혼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 풍경을 인간이 바라본다면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하곤 했을 텐데, 오누이에겐 당연한 공간이었다.
제 집 마당과 비슷한 감각.
그런 감각으로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어느 오두막.
가볍게 문을 두들기자, 오누이 식당의 남매와 빼어닮은 여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너희 왔구나.”
“오랜만이에요 주희님!”
햇님이가 먼저 다정다감하게 그녀에게 안기었다. 그러자 달님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핀잔을 준다.
“동생아, 나를 집에서 맞이할 때는 그렇게 반갑게 맞아준 적이 한 번 없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니?”
“오라버니랑은 맨날 보는 사이니까 그렇죠!”
이주희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워보이는 달님이까지 꼬옥 안아준 후에야 두 사람을 오두막 안으로 들였다.
셋은 탁상에 마주앉았다.
“오늘은 선물은 가져왔어요!”
“선물?”
“엄청 기뻐하실 걸요? 이거 보세요.”
오누이는 이주희에게 그림을 건네었다.
달님이가 이게 어떤 그림인지 설명하려는데, 이주희의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주희님, 우는 거예요?”
“....”
이주희는 울고 있었다.
윤슬이의 그림에 그려진, 아들 주현이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보여서.
그리고 아들 주현이가 윤슬이의 그림을 직접 그려 자신에게 선물해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아프게 맺혀있던 감정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적어도 두 남매가 그토록 바랬던 것보다도 훨씬 서로에게 큰 존재가 되어있다는 게 그림에서 느껴졌기에.
주현이가 그린 그림의 윤슬이는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주희, 자신이 그 어릴 적에 간절히 기원했던 것처럼 오빠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대견한 아이다.
“하지만... 어떻게?”
아들은 분명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텐데.
함께했던 모든 기억들이 학대로 바뀌었을 텐데.
그래서 이런 그림을 그려다줄만큼 자신에게 호의를 가질 수는 결코 없을 텐데.
윤슬이는 둘째치고, 주현이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윤슬이가 그려진 그림 뒤편을 보세요.”
그때 햇님이가 손가락으로 그림 한 장의 뒷면을 가리켰다. 그곳엔 주현이가 쓴 것처럼 보이는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짧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무너지지 않았어. 엄마가 무너지지 않아서, 내가 여태껏 행복할 수 있었어. 난 엄마가 윤슬이만큼이나 자랑스러워. 앞으로는 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