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벽(1)
BAO
윤슬이의 아빠에 대한 인사까지 마친 뒤 납골당을 벗어나, 우리는 다시 기차역에 되돌아왔고.
시간에 맞춰 기차에 탑승했다.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고, 근처에 딱히 돌아다닐만한 곳도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귀가하기로 했던 것이다.
“영히씨가 기다리거둔!”
특히 윤슬이가 집에 홀로 남겨진 영희씨를 걱정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코오... 코로롱...”
“어떻게 기차에 타자마자 잠에 들지?”
동생은 여러 모로 피곤했나보다. 아침부터 일어나 타지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당일치기로 되돌아오려니 피곤한 건 이해하지만.
재밌는 건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 진짜 피곤할 때가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 패턴이다.
재미가 있어서 잠깐 관찰하다가 우리 두 사람의 좌석 사이에 있는 팔걸이를 끝까지 위로 올리고. 윤슬이 신발을 벗겨 잘 정리한 다음에 내 무릎에 그대로 눕혀버렸다.
“등받이에 잘못 기대어서 자다간 일어났을 때 담걸리잖아.”
피곤해서 급히 잠들었는데, 일어났을 때 어깨에 담이 들었다면 그날 기분은 정말 최악일 거다.
고로롱-
고로롱-
윤슬이가 코골이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기차는 머지 않아 출발.
마땅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스마트폰을 켰다.
배경화면을 보자마자 곧바로 발견한 것은.
“역시나 와있구나.”
[오누이 타이쿤!] 어플의 우측 상단에 표시되어있는 알림이다. 오누이가 연락을 주었다는 뜻이다.
빠르게 어플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햇님: 저희가 그림은 확실하게 배달했으니까!]
[달님: 걱정마시라구요!]
이런 믿음직한 메시지에 더해 엄지손가락이 척하고 올라와있는 이모티콘까지. 저 텐션은 언제 봐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 고마워, 너희가 엄마한테 전해줬구나. 거기까진 솔직히 안 바랬는데.]
[햇님: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요?]
[달님: 고럼고럼! 저희는 1년 동안 가게 하나를 함께 꾸려온 절친한 동료 사이잖아요!]
[나: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내 추측이 맞다면.
오누이는 내게 무언가 하나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이라면 분명 오누이는 내게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다.
어째서 우리 남매에게 다가왔는지.
[나: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해.]
[달님: 혹시 제 3대 운동 무게 총량이 궁금하신 건가요?]
[햇님: 저렇게 진지하게 묻는 걸 보면 확실히 그것밖엔 답이 없긴 하죠! 빨리 알려드리세요.]
[달님: 사실 저번에 측정했을 때, 데드리프트 수행 가능 무게가 5KG이 줄었는데... 그건 절대 제 근육량이 줄어서가 아니고, 그날 아침에 정적 스트레칭을 조금 빡세게 했더니.]
“....”
기껏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는데! 오누이의 운동 수행 일지따위 눈곱만큼도 안 궁금하다.
[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달님: 이거 중요한 건데.]
[햇님: 많이 중요한 거긴 하죠.]
[나: 우리 엄마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햇님: 아하.]
[달님: 주희님에 관해서 말이시죠?]
주희님.
우리 엄마의 이름.
그 경칭에 미묘한 느낌이 든다.
[나: 역시 우리 엄마랑 이미 아는 사이구나.]
[햇님: 맞아요. 눈치가 빠르시군요, 아마 아까 납골당에서부터 어렴풋 눈치채셨겠죠.]
[나: 응.]
[달님: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드리면 좋을지 조금 고민해볼게요. 조금 복잡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지도 몰라요.]
[나: 그래. 하지만 내가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호랑이 때문이야.]
[달님: 그걸 알고 계신다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간단한 이야기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설화.
그 이야기의 메인 빌런이 호랑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만한 대사.
그건 메인 빌런인 호랑이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엄마에게 전한 협박 문구에 가깝다.
오누이를 먹여살리기 위해 떡 장사를 하는 엄마와 산길에서 맞닥뜨리게 된 호랑이.
그 호랑이는 몇 점의 떡을 얻어먹건 간에 끝내 오누이의 엄마를 삼켜버리고 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누이까지 먹어버리기 위해 집까지 찾아가서는 엄마의 시늉을 하여 오누이를 꿰어내려고 했던가.
끝내 눈치 빠른 오누이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호랑이에게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원수인 것은 변함 없다.
[달님: 그 호랑이는 죽고 나서도 정말 끈질기더군요.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유약해진 사람들 마음에 파고들어서는 가정을 박살내려고 작정했더라고요.]
[햇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염라나 다른 영혼들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주희님의 경우 유일하게 그러지 못했어요. 운이 나빴죠. 결국 그 자식은 지옥의 법도에 따라서 처벌을 받긴 했지만. 피해자의 마음이 그것만으로 위로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운이 나빴다라.
이걸 슬퍼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어쨌든 우리 가족 말고 다른 가족들까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다행이긴 하다.
[달님: 결국 주희님과 주현이 형, 그리고 그 가족들만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된 셈인데.]
[햇님: 저희는 그게 싫었어요. 호랑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저희 말고 또 생겨나는 건 너무 비극이잖아요.]
[달님: 그래서 저희 오누이는 주희님한테 다가갔던 거예요.]
[햇님: 되도록 최선의 결말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때 주희님이 저희한테 부탁한 게.]
주현이와 윤슬이가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 두 사람의 미래를 보살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이었다.
[달님: 하지만 윤슬이와 주현이 형, 두 사람이 떨어져있어서는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데에 큰 한계가 있었어요.]
[햇님: 그래서 할머니를 통해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끔 만들었던 거예요. 아마 주현 오라버니 입장에선 본인 생활도 그리 넉넉지 않은데 갑자기 윤슬이까지 떠안게 되어서 힘드셨을 수도 있겠지만.]
[달님: 저희 입장에선 그게 최선이었거든요.]
[나: 그건 나도 전혀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왜냐면 윤슬이가 있어서 외로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너무 좋았어. 귀여운 동생이 생겨서.]
오누이의 설명을 듣고 엄마에게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엄마는 끝내, 우리 남매를 돌보기 위하여 오누이를 우리 남매 곁으로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 엄마.”
이미 결심한 일이지만 엄마가 잠들어있는, 저 납골당엔 자주 들러야겠다. 윤슬이도 좋아할 테니 말이다.
[나: 그렇다는 건 지명도니 뭐니 하면서 가게 운영을 도와야 너희한테도 도움이 된다는 건?]
[달님: 그거 반쯤 거짓말이에요.]
[햇님: 저희도 속이고 싶진 않았지만, 만약 저희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주현 오라버니는 저희를 믿지 않았을 걸요?]
하긴 그렇다.
뜬금 없이 나타나서 너희 남매가 장사하는 걸 도와줄테니 우리만 믿어라! 라고 말했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엄마의 건도 그렇다. 진실을 오누이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내게 전달할 엄두가 나진 않았겠지.
이번 같은 계기가 있지 않은 한 결코 믿어주지도 않았을 테고.
**
“응어! 모야, 자구 인났더니 서울 도착했자나.”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이제 집 가서 저녁 먹어야겠네.”
“크윽... 분하다.”
“?? 뭐가 분한데.”
“오늘 하루 손해봐써. 기차에서두 옵바랑 놀아야지 대는데. 그 시간 다 손해본 거야! 모르구 자버려서. 이건 심각해.”
“대신 집에 도착해서 놀면 되잖아.”
“?! 그건 몰랐따!”
“....”
방금 막 잠에서 깬 동생은 아무래도 판단이 많이 흐려져있는 모양. 비몽사몽한 느낌으로 눈을 부비적거리다가 기차가 완전히 정지하고 나서야 다시 씩씩한 얼굴이 되었다.
“옵바 오늘은 무슨 저녁은 뭐루 먹을 거야?”
“그러게. 집에 먹을 게 많지 않아서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가는 게 좋겠는데.”
“시장 들려?”
“아니, 시장은 여기서 너무 멀잖아.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까 여기 기차역 바로 위층에 백화점 있거든. 거기서 사들고 가자.”
“롸져.”
기차역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자 제법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로비가 눈에 띤다.
반짝반짝 빛나는 돌바닥부터 백회색으로 점철된 어느 위인의 흉상.
그리고 대공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분수대. 보통 분수는 아래에서 위로 물이 뿜어져나오는 형식인데, 이쪽 분수는 마치 폭포처럼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솟았다가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윤슬이의 관심을 끌었다.
“우오... 옵바, 저것 쫌 바바.”
그중 가장 먼저 윤슬이는 어느 위인(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코가 오똑하고 큰 걸 보아 서양인 – 그리스인일 것만 같다.)의 흉상 앞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그 얼굴을 가르켰다.
“왜 이 사람은 몸이 댕강 나버려써?”
“댕강?”
“웅, 옵바가 생선 자를 때처럼 칼루 다 썰어버려써?”
“그런 잔인한. 그게 아니라 원래 디자인이 이런 거야.”
“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써?”
“응. 부서진 건 아닐 테니까.”
“왜? 이 아저씨두 사람이니깐 팔이랑 다리가 있어야 대자나. 근데 왜 그거를 없애버렸지?”
“.... 글쎄.”
나도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제대로 된 답변은 못해주겠다. 이런 걸 흉상이라 부른다는 것쯤은 어디서 주워들어서 아는데, 왜 이런 작품을 만드는지 같이 디테일한 부분은 모른다.
이럴 때는 윤슬이 눈높이에 맞춤인 대답을 내놓으면 대략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사실 이 아저씨한테 팔다리가 없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움? 없는뎅. 가슴 아래로 아무 것두 없자나.”
“아니지. 사실은 없는 게 아니라, 숨기고 있는 거야.”
“수, 숨기고 있따?!”
“그래.”
윤슬이는 마치 질문하는 유치원생처럼 손을 들어올린다.
“이유가 몬지 궁금함니다!”
“그건 아마도...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방심?”
“혹시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상대방에게 팔과 다리가 멀쩡히 있다면? 당연히 조심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팔과 다리가 없는 척을 한다면?”
“바, 방심을 함미다. 그럼 그때를 노려서 공격?!”
“바로 그거다.”
전혀 아니다.
하지만 윤슬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주면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줄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해본 것뿐.
아니나 다를까 윤슬이는 희죽거리면서 무언가 나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응, 윤슬아 뭐해?”
“이거 바바.”
윤슬이는 방금 내 설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자켓 소매에서 팔을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빼어버렸다. 팔이 없어진 자켓의 소매가 허공에서 허무하게 덜렁거린다.
마치 팔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
“어때 옵바? 이러믄 방심을 유도할 수가 이써.”
새로운 전술에 눈을 뜬 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