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186화 (186/200)

186화: 벽(2)

“.... 그러고 다닐 거야?”

“응, 방심 유도.”

“그래, 방심 유도는 어쩔 수 없지.”

내가 제 무덤을 판 셈이니 누굴 나무라겠냐마는 그나마 윤슬이가 즐거워보여서 다행이다.

자켓 소매가 덜렁거리는 상태로 백화점 곳곳을 돌아다니지만 딱히 다른 손님들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만한 어린애가 무얼하든 딱히 이상하진 않은 것이다.

우린 그 상태로 백화점 로비의 안쪽으로 복도를 따라들어갔다. 그러자 푸드코트와 식료품 코너가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스메엘(smell)~!”

어디서 주워들은 짧은 영어를 시전하는 5세(사실은 아직 만 4세).

“윤스리 방금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배고프구나?”

“그 말은 옳씀미다.”

“그럼 빨리 귀가해야겠네.”

“웅, 영히씨두 집에서 기달려. 그니깐 빨리 안 가면 심심할 거야.”

“그러게.”

저녁 메뉴로 무얼 살지 고민하며, 어느 쪽 코너로 향할지 고민하는데.

윤슬이가 갑자기 내 바짓춤을 꾹꾹 당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조용히 5세의 시선을 그대로 추적해보았다.

그 시선이 머무른 곳은.

“만두 시식?”

“시, 시식...”

군만두를 팔고 있는 시식 코너였다. 작은 프라이팬 위로 달아오르는 군만두의 고소한 냄새가 윤슬이의 후각을 사로잡아버린 것.

슬쩍- 슬쩍-

내 눈치를 보는 5세.

“하나 시식이나 해볼까?”

“그게 좋겠슴미다!”

윤슬이는 팔이 달랑거리는 상태로 군만두 시식 코너 앞까지 달려갔다.

- 어서오세요!

반갑게 맞아주시는 직원분.

- 하나 집어서 먹어봐도 돼.

시식 코너이니만큼 직원분은 군만두를 조리하면서도 윤슬이에게 시식을 권했는데.

문제는.

“움...”

지금 5세는 팔이 없는 상태다. 정확히는 소매 안쪽으로 넣어버려, 절찬 방심을 유도(방심을 유도할 대상따위 없지만 적극적으로 쉐도우복싱에 참전하는 상태)하는 중이기 때문에.

허나 그 방심 유도도 오래 가진 못했다. 윤슬이는 딱히 망설이지도 않고, 팔을 다시 바깥쪽으로 빼서 만두가 꽂힌 이쑤시개를 손에 넣었다.

“쿠쿠쿠... 이러믄 먹을 수가 있지롱.”

방심 유도 놀이 < 만두 시식, 5세의 명확한 가치관이었다.

나는 윤슬이를 따라서 군만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어보았다.

“후욱...”

방금 막 구워진 만두인지라 그만큼 뜨끈하다. 열이 오르는 만두의 피를 씹자 바삭한 식감이 이를 자극한다.

바삭한 만두피를 이가 뚫자 그 안에 있는 갖은 채소와 당면, 다진 고기가 조화롭게 맛을 이루었다.

만두속의 어느 재료 하나가 딱히 모나지 않은 맛이라 무난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꽤 맛있는데?”

“윤스리 동감.”

우리 남매는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은”

“이거닷!”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 안으로 집어넣어버렸다. 군만두만 만들면 조금 심심하니까, 집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만두를 추가 조리하는 버전을 따로 만들어야겠다.

군만두랑 같이 비교하면서 먹여봐야지.

“이거 하나면 딱히 다른 음식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마침 장바구니에 담은 만두는 400G짜리가 두 봉지 붙어있는 세트 상품이었다. 영희씨나 윤슬이의 먹성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한 양이다.

근데 이것만 담자니 장바구니가 허전하긴 했다.

“움... 이것밖에눈 없구만.”

“그러게.”

하지만 굳이 과소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윤슬이의 손을 붙잡고, 계산대로 향하려는데.

“오! 저거 영히씨가 좋아하는 거.”

“응? 뭔데.”

계산대 부근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반려동물들을 위한 식품 코너가 있었다. 아무래도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가정의 심리를 노린 전략적인 배치가 아닐까 싶다.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며 식료품 코너 등에서 계산한 물건을 계산하려할 때, 강아지나 고양이들을 위한 간식이 눈에 딱! 들어오면?

하나쯤 구매할 수밖엔 없는 것이다. 마치 자기들만 맛있는 걸 먹게 되는 것 같아서 동물들에게 미안해질 테니까.

“물론 영희씨는 우리랑 같이 만두를 먹게 될 테지만.”

가끔 군것질거리를 사다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영희씨가 좋아하는 게 뭔데?”

“이거 조아해.”

윤슬이는 망설임 없이 얇고 긴 스틱 형태의 봉지를 하나 손에 쥐었다.

냥르, 라고 써있다. 제법 유명한 고양이 간식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맛인지는 나도 모른다.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거 한 세트 사가서 영희씨한테 좀 먹여볼까?”

“그게 좋게써. 왜냐면 영히씨는 오늘 혼자서 용감하게 집을 지켜줬자나. 새 집에는 윤스리 요새도 있으니깐 요새를 지킨 셈이야. 그건 아주 공이 커!”

5세는 영희씨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조금 포상을 주어도 된다.

냥르 한 세트를 장바구니에 담자, 비어있던 부근이 그나마 조금 메워졌다.

그럼에도 텅텅 비어있는 것은 매한가지.

“그냥 집근처 마트나 갈 걸 그랬나.”

“어짜피 가는 길이니깐 갠짜나. 괜히 어디 두 번 왔다갔다할 필요두 업써.”

“그건 그렇지...?”

정론으로 중무장한 5세의 일침을 들었더니 아찔해진다. 대체 어디까지 논리적으로 변할 셈이냐.

아이들의 성장은 무섭다.

**

“영히씨! 집 잘 지키구 있었지?”

- 그럼, 누가 쳐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뭐.

“움... 아주 수고해써. 왜냐믄 여긴 윤스리 요새가 있는 데니까 잘 지켜야 대거든. 가게보다두 더 잘 지켜야대.”

-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는 말인가?!

“수고했다는 뜻으루 이걸 드리겠슴미다.”

윤슬이는 헛기침을 한 번 해주고는 뒷짐을 지고 숨기던 냥르를 자신 있게 꺼내보인다.

그걸 보더니 사람 모드인 영희씨의 동공이 마치 고양이처럼 둥그래졌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이질 않는데, 상당히 좋은가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사다주는 건데.”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그도 그럴 게 맨날 우리랑 똑같은 밥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도 했고, 우리가 먹는 간식을 그대로 공유하기도 했으니까.

심지어 그랬는데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현재의 식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고양이들은 조금 다른 차원의 미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새삼 생각이 든다.

윤슬이는 냥르의 뚜껑을 뜯어서 그대로 영희씨에게 넘겨준다. 영희씨는 그대로 손으로 쥐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맛있게 냥르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마치 초등학교에 나오는 스틱 봉투형 요구르트를 짜먹는 어른처럼 보인다.

문제는 저게 고양이용 간식이라는 건데, 사람의 모습으로 저걸 저렇게 맛있게 먹어버리니까 다소 혼란스럽다.

“맛이 조아?”

- 상당히 맛있다... 츄릅.

“어떤 맛이야?”

- 너희 닝겐들은 평생 알 수 없는 맛이지.

“움...”

윤슬이는 한 번 먹어보고 싶은 모양이다.

영희씨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훽- 돌린다.

- 아무리 윤슬이라도 이건 안 준다.

“아앗... 치사하다.”

“치사한 게 아니라 고양이 음식은 아무래도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근데 마시가 어떤지는 궁금허다.”

“그 점은 동의해.”

- 이건 맛의 차원이 아니야!

“?? 그럼 무슨 차원인데 그래.”

- 음... 이건 맛보다는 냄새의 차원이야.

“냄시?”

윤슬이는 무슨 악취가 나는 줄 잘못 알아들은 듯, 코를 손가락으로 막아버렸다.

하지만 아마 그런 얘긴 아닐 것이다.

원래 맛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혀로 느낄 수 있는 맛만은 아니다. 음식에서 풍기는 향 또한 맛을 다채롭게 만드는 요소다.

오히려 혀로 느낄 수 있는 맛 자체는 굉장히 한정되어 있으며, 그 맛에 더해진 향 때문에 우리가 다양한 맛을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영희씨가 얘기하는 건 그런 차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 딱히 내가 저 맛을 궁금해할 필요는 없겠네.”

고양이가 좋아하는 향을 첨가했다면, 인간한테는 딱히 매력이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만두나 구워줄게. 냥르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영희씨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서 냥르 취식을 구경하던 5세는 곧 만두를 먹을 수 있으니 참겠다는 심정으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둘을 뒤로 한 채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우선 군만두를 굽는다. 세 사람이 넉넉하게 먹을 거니까, 우선 800G을 모두 굽는 것으로 한다.

지글지글-

프라이팬 위로 두른 약간의 기름.

그 기름 위에 갈색으로 노릇노릇 표면을 달구는 만두피.

나무 젓가락으로 표면을 콕 찍어보자 나름 자기주장이 확실한 만두피가 단단하다.

그릇 위로 반쯤 빼어두고 반은 조림을 위해 남겨둔다.

“군만두만 먹으면 질리니까.”

간장, 설탕, 굴소스, 고춧가루를 섞어 진득한 양념을 만들고 잘 구워진 만두 위에 뿌려 끓여준다. 강정 느낌이 나는 반질반질하게 양념으로 코팅된 만두 조림 완성.

각각 조리된 것을 그릇에 담아 상에 차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희씨와 윤슬이가 식탁에 앉았다.

이럴 때만 보면 애 둘 키우는 기분.

“영히씨눈 냥르 먹었으니깐, 만두를 쪼꿈밖에 못 먹겠군. 유감.”

- ?? 누가 그래.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야. 간식 배 따로, 밥 배 따로인 거 몰라?

“?! 그러믄 영히씨는 배가 두 개라는 뜻?”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짜, 짱이다... 윤스리두 배 두 개 하구 싶다. 옵바 왜 윤스리는 배가 한 개지?”

“그건 아마 오빠를 위해서가 아닐까?”

“움?”

“윤슬이가 배가 두 개가 되어버리면 오빠가 요리를 두 배로 만들어줘야 하니까, 더 힘들어질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하나로 끝내준 거지.”

“쿠쿠쿠... 그럴 리가 업써. 사실 영히씨가 그짓말한 거 다 아는데, 옵바가 이상한 변명 시작했거둔.”

“??”

요근래 윤슬이의 말솜씨가 한층 더 치밀해진 것만 같은데 나의 착각일까.

내년이 되면 내가 전심전력을 다 해도 말로 못 이겨먹는 게 아닐까, 다소 걱정이 된다.

- 으음... 간식도 간식이지만, 역시 사람 음식도 맛이 좋네.

“옵바가 만들었으니깐 당연하거둔.”

영희씨와 윤슬이가 맛있게 내 요리를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절로 힐링된다. 사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금 싱숭생숭했다.

엄마의 진실도 그렇고. 오누이와 대화했던 것도 그렇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간 믿고 있던 것들을 완전히 뒤바꾸어버린 하루였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믿던 것들이 바뀌었다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영희씨, 많이 먹어.”

- 우물우물... 음? 많이 먹고 있는데.

이게 아니라.

“우물우물... 음? 많이 먹고 있는데.”

그래, 이런 식으로.

이제까진 나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아닌 이상, 그들의 말에 하나의 필터링을 거쳐듣곤 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반드시 가장 가까운 존재여야만 할 엄마에게 배신 당했다는 마음에 지금까진 100% 나의 편이 아니라면, 솔직히 마음의 거리를 둔 적도 많다.

하지만 이제 바뀌어야겠지.

어쩌면 세상은 내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도 살만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윤스리두 마니 먹으라구 해줘.”

“윤슬이 많이 먹어.”

“쿠쿠쿠... 그러믄 옵바 꺼까지 빼서머거버려!”

윤슬이는 내 그릇에 담긴 만두 조림을 하나 포크로 쿡 찍더니 자기 입에 냉큼 넣어버렸다.

이런 장난스런 행동 하나하나가 전혀 밉상이지 않다.

그저 동생이기 때문에?

아니면 1년동안 질리도록 함께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아니지.”

이렇게 하나둘,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윤슬이가 옆에 있어주고 나서부터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