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사 가던 날(1)
문득 집이 비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7평짜리 원룸. 남자 혼자 살기엔 적당히 넉넉한 공간이지만 고양이 한 마리와 꼬맹이 한 명, 이렇게 세 식구가 되어선 또 다른 얘기가 된다.
대부분의 시간은 식당에서 보내니, 집은 으레 서울 사람들에게 그렇듯 잠만 자는 공간이지만 그럼에도 집이 좁다는 사실을 한 번씩 상기시켜주는 순간들이 있다.
가령 식사할 때, 영희씨가 사람 모습으로 변하게 되면 좁은 식탁에서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밥을 먹게 되는데.
“으윽! 옵바, 도움!”
“알았어. 무릎 위에 올라 와서 먹게 해줄게.”
“휴우...”
윤슬이가 나와 영희씨 사이에 앉다보면 툭툭 치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식사 중엔 젓가락과 숟가락을 쓰니, 한 번쯤은 필연적으로 팔꿈치 등이 부딪히는 것이다.
그럴 땐 그나마 무릎 위에 앉혀두고 밥을 먹이면 되는 일이지만, 한 달에 한 번 윤슬이의 키를 잴 때는 가끔 아찔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윤슬이 이번에 또 컸네?”
“어디! 얼매나 컸는지 보겠슴미다.”
“1cm 더 큰 거 아니야? 봐봐.”
“오오...! 그렇다. 인제 60달만 더 지나믄 옵바랑 비슷해질 쑤도 이써.”
5년이 지나면 나랑 비슷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은 전혀 헛 것이라는 팩트는 우선 차치하고. 윤슬이의 키가 무서운 기세로 자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올해 생일이 되면 만으로 다섯 살이 되고. 내후년이면 초등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혼자 학습을 할 수 있는 자기공간도 필요하게 되겠지.
“여러 모로 이런 7평짜리 원룸에서 계속 지내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군.”
자연스레 그런 결론에 달했고.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다행인 점은 자금이 충분하다.
“우선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세 자금도 할머니께서 우리 남매가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본래 이 집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지내오던만큼 할머니가 장만해주신 것이다. 전세 자금도 모두 할머니가 마련해주셨다는 뜻인데, 서울에 위치한만큼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런데도 우리 남매에게 그대로 넘겨주시겠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농담조로 “이 나이 먹구 그만한 돈 다시 받아서 얻다 쓰겠니?”라고 하셨다.
“감사한 일이지.”
아무리 가족이며 어른일지라도 그만한 돈을 선뜻 우리에게 쓰라고 주시는 것은 멋있고, 애정이 넘치는 행동이다.
그 전세 자금에 더해 현재 통장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는 자금을 더하면, 이보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 정도는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아닌가? 오히려 대출을 받는 편이 괜찮으려나.”
최근엔 금리가 어떻다느니 말이 많아서 조금 머리가 아파오긴 하지만 국가에서 전세 자금 대출을 낮은 이율로 지원해준다고도 하니 한 번 알아는봐야지.
중요한 건 자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옵바, 아까부터 모라구 하는 거야?”
“으응? 이제 슬슬 이사를 가야 되나 싶어서.”
“이사? 집 옮기는 거야?”
“그렇지. 이제 윤슬이 60달 지나면 어떻게 돼?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옵바보다두 훨씬 커져!”
“??”
방금은 비슷해질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주 짤막한 순간이었지만 자신감이 더욱 붙은 모양이다.
만 4세에게 알리긴 다소 가혹한 정보이나, 우리나라에서 180 이상의 신장을 얻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성장통도 각오해야 할테지.
그나저나 60달이면, 5년이니 그때쯤이면 윤슬이는 만 9살이다. 만 9살이 180cm?
혼란스럽다.
“그래, 아무튼 오빠보다도 커지면 저 침대에서 영희씨랑 윤슬이랑 셋이서 잠 자는 것도 어렵겠지?”
“움? 가능해. 윤스리가 옵바 위로 올라가구. 영히씨가 윤스리 위로 올라와서 케이크처럼 자면 대.”
“맨날?”
“응! 맨날맨날.”
그건 무리다. 머지 않아 질식사한다.
이건 3단 케이크 가장 밑바닥에 깔리는 빵쪼가리들의 입장도 한 번 들어봐야 된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식사 중에 저 작은 테이블에 셋이서 앉아서 밥 먹기는 어려울 거 아냐.”
“움... 그치만 옛날에는 빨모 삼촌이랑 다 같이 먹고 그래써.”
윤슬이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구나. 호연 형님과 강씨 아저씨를 초대해서 식사했던 날의 일.
너무 옛날 일이라 잊어버릴 뻔했다.
“좁은 것보단 넓은 게 낫잖아? 식탁도 조금 더 큰 걸로 새로 들여오면 집에서 더 많은 요리도 해먹을 수 있고.”
“오오...! 그건 쫌 땡기는구만.”
“그리고 소파도 하나 사서 거실에 두면 누워서 티비 볼 때도 훨씬 편하겠지?”
“소, 소파!! 윤스리 해보구 싶은 게 있어써.”
“해보고 싶던 거?”
윤슬이는 소파 얘기가 나오니까, 급작스럽게 흥분하더니 몸을 웅크린다. 그리고 앞구르기.
데구르르르-
“...? 뭐하는 거야.”
“윤스리 소파에서 앞구르기 해보구 시퍼.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왜 그런 짓을.”
“저번에 시후한테 물어봤어. 언제부터 어른이라고 말할 수가 있냐고. 시후는 윤스리보다두 나이가 많으니깐 잘 알 것 같애서.”
조금 의외다.
윤슬이는 시후가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아주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시후 오빠가 아니라, 그냥 시후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코리안 마인드보다 아메리칸 및 유러피안 마인드에 가깝다. 학교에 입학해선 이러지 못하도록 잘 알려줘야지.
“근데 그게 소파랑 무슨 상관이야?”
“시후가 알려조써. 저번에 시후 엄마가 소파에서 떼구르르 굴렀눈데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졌대.”
“?? 그래서?”
“근데 시후는 소파에서 굴렀는데두 소파 아래루 안 굴러 떨어졌대. 그니깐 시후랑 윤스리는 깨달은 거시야. 소파에서 굴렀을 때 떨어지믄 그때 어른이 대는 거라구.”
“흐음.”
논리가 아주 미묘한 방향으로 어긋나있지만 굳이 정정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어쩌다 구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시후 어머님께 애도를 표합니다.
“아앗, 근데 이거 시후 엄마가 시후한테 절대루 비밀이라구 말하지 말라구 그랬눈데. 그래서 시후가 윤스리한테두 절대루 비밀이라구 말하지 말라구 그래써. 그니깐 옵바두 비밀이야. 아무리 친해두 말하믄 안대. 영히씨나 함모니한테두!”
“그래, 이후 영구적으로 함구하도록 할게.”
“함구가 모지?”
시후 어머님께 재차 애도를 표합니다. 저는 이 비밀을 지킬 것이라 맹세합니다.
**
그리하여 가게 휴일이 되어서는 집을 보러다니기로 했다. 집을 고를 때 가장 우선해야하는 조건 중 하나는 오누이 식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까운 동네에서 가까운 동네로 이사하는, 생활권이 얼마 바뀌지 않는 형태의 이사가 될 것이다.
“움... 이사한다구 그래서 집 보러 왔눈데, 왜 맨날 다니는 길이지?”
“난 오히려 좋은데, 이 동네는 내가 길고양이 때부터 걷던 길이라 잘 알거든.”
각각 만 4세와 고양이의 반응이다. 이런 반응이 나올만큼 우리에겐 익숙한 길을 걷다가, 익숙치 않은 부동산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일행이 들어가자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공인중개사분이 영업적인 미소로 맞아주신다.
겨울 날씨이기에 따듯한 차 두 잔과 미지근한 차 한 잔을 내어주셨다.
“으뜨뜨, 나 뜨거운 거 못 마시는데.”
“쿠쿠쿠... 영히씨 엄살이 넘무 심해.”
“야, 너도 이거 못 마실 거잖아.”
“윤스리는 갠짜나, 아직 나이 안 많아서~.”
“크윽...”
영희씨가 뜨거운 녹차에 혀를 데어 고전하는 사이, 중개사분이 개인적으로 사용하시는 걸로 보이는 노트를 가져와 매물 몇 개에 대하여 설명해주신다.
염두에 두었던 전세 자금의 범주에서 약간 낮은 수준의 가격대와 높은 수준의 가격대.
그 가격대에 따른 장단점을 구두로 설명해주신다.
“....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 큰 차이는 없기는 한데. 문제는 여기 전세 자금이 조금 낮은 쪽 보시면 집주인분이 집 매매하실 때 대출을 조금 끼셨어요.”
“아아, 대출 끼셨구나.”
“그걸 불안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니까, 한 번 말씀은 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대출을 끼고 구매한 건물에 세입자를 받는 건물주들이 간혹 있다. 문제되는 행동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전세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
“그럼 그 낮은 쪽 매물은 아예 집도 안 볼 게요. 차라리 조금 주더라도, 안전한 쪽으로 부탁드려요.”
“아아... 그렇다면.”
이번에 들어갈 집은 꽤 오래 살게 될 것 같은데, 괜히 사기당하는 것보다야 전세 자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자금이 그렇게 모자란 상황도 아닌만큼 말이다.
이렇듯 다양한 조건들 중에서 추리고 나니, 보여주셨던 매물 중에 2개만이 생존했다.
오누이식당까지의 거리, 전세 자금의 가용량, 매물이 위치한 층수, 인근 초등학교까지의 거리 등을 고려한 결과다.
“그럼 지금 당장 보러가시죠.”
“움! 출발!”
중개사분을 따라서 길을 걷다보니, 5분도 채 되지 않아 첫 매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아주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골목마다 하나쯤 보이는 빨간벽돌 빌딩 건물.
이 건물의 1층이 곧 매물이었다. 중개사분은 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집은 텅 빈 상태.
“현재 거주 중인 분 안 계시니까, 입주하시게 되면 조금 더 자유롭겠죠? 일정 잡는데.”
“그렇겠네요. 조금 둘러보겠습니다.”
“윤스리두 둘러봄미다.”
“난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릴랜다.”
영희씨는 고양이의 본능 때문인지, 도도하게 문 앞에 앉아서 대기한다. 아직 정을 들일지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갖진 않는 모양.
확인해야 할 것은 적지 않다. 수압부터 천장에 곰팡이가 슬었는지 안 슬었는지.
물론 입주자가 없던 상태였기에 정확한 생활 환경을 예측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 여러 모로 확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우선 화장실에서 수압을 재고 있는데, 바깥에서부터 윤슬이가 나를 부른다.
“옵바! 여기 거실 쪽으루 먼저 와조.”
“응?”
목소리가 다급하다.
설마 뭔가 문제점이라도 발견한 걸까?
윤슬이는 저래 봬도 나름 청소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약 1년 동안 오누이 식당에서 나와 함께 식당 마감 작업에 동참해왔으니까.
뭐가 더럽고, 뭐가 깨끗하고. 어떤 상태가 청결하고 양호한지 제 나름의 판단이 가능한, 만 4세라는 얘기다.
“윤슬아, 왜 그래?”
“오오, 이거 바바.”
윤슬이는 무언가를 가르켰다. 바닥이다.
바닥에 금이라도 간 건가?
....
그래 보이진 않는다.
“여기가 어때서?”
“여기다가 소파 두면 대겠따! 윤스리가 굴러볼게. 얼마나 굴러가는지 좀 봐주라.”
“....”
그 얘기 저번에 끝낸 거 아니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