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이사 가던 날(2)
결국 전세 집 매물 곳곳의 환경을 확인할 때까지 윤슬이는 구르기 삼매경. 그러다가 바닥에서 너무 많이 굴렀는지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우우... 이젠 슬슬 아푸다.”
“그럼 진즉 그만하지 그랬니.”
“그건 안 대는 일이구. 확실한 소파 장소를 찾을 의무가 이써.”
“그래, 그럼 윤슬이 마음대로 해.”
별로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중개사분도 윤슬이가 워낙 아이라서 그런지, 구르건 눕건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집주인이 오셨으면 윤슬이를 자제시켰을 수도 있지만 애가 굴러다닌다고 매물에 훼손이 생길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한 번 이쪽 집도 확인해보세요.”
이어서 다음 매물의 전세 집에 도착.
크기 자체는 방금 매물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이곳엔 세탁실로 사용 가능한 베란다가 따로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식당에서부터도 더 가깝네.”
그 점도 아주 큰 메리트. 우리 가게에서부터 여유 있게 걸어서 7-8분이면 도착하는 거리. 윤슬이 걸음을 고려하더라도 10분 내외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곳에서 살게 되면 출근이 매우 편할 것 같다.
“옵바, 여기 방도 있따. 아까 전에 집보다는 작으다.”
우선 화장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윤슬이가 나를 부른다. 방이 딸린 집이라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아까 전 집도 방이 있긴 했는데, 거의 방이라고 부르기엔 원룸을 두 개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방 하나가 거실과 거의 비슷한 크기라서 공간 활용이 지극히 애매한 느낌.
반면 이 집은 거실 따로, 방 따로 되어있는 느낌이 강하다.
윤슬이는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서 구르기 연습을 하고 있다. 데굴데굴- 툭!
반대편 벽에 확실히 부딪히고 머쓱하게 짓는 웃음까지. 완벽한 마무리.
“아까 뒤통수 아프다며.”
“그래두 포기할 쑤는 업찌. 그래두 윤스리가 보쓰인데.”
나름 사명감이 있는가보다.
저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말릴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하면 구르기에 저토록 열정적일 수가 있을까.
내 동생이지만 이따금씩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아무튼 방금 전 매물보다는 확실히 이쪽 집이 저희한테 더 맞는 것 같네요.”
“아아, 그러시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시 부동산 들어가서 집주인분께 연락을 한 번 드려볼까요?”
“그것도 좋지만 우선 다른 쪽 집들도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 그렇죠?”
“네, 다른 데까지 한 번 둘러보고나서 아까 번호로 연락드릴게요.”
“네, 네... 그러세요. 제 핸드폰으로 연락주시면 되세요.”
“넵 감사합니다.”
우선 매물 후보 1번 확보 완료.
여기서 단숨에 계약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안일한 사람이 아니다.
오래 생활하는 공간인만큼 꼼꼼하게 확인하고, 최적의 매물을 찾는 게 최선의 판단이겠지.
“움? 옵바 또 딴 데루 가는 거야?”
“응, 원래 이리저리 돌아다녀봐야 돼. 그래야 제일 좋은 데를 찾지.”
“오오...! 그거눈 넘무 맞는 말.”
윤슬이가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 다른 데 가서도 구르려고 하지?”
“그렇타.”
집주인이 계시면 못 구르게 해야지.
슬쩍 영희씨의 눈치를 보았다. 은근 귀차니스트라 불평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만족스런 표정이다?
“영희씨는 다리 안 아파?”
“후훗, 이 정도로 다리가 아프면 길고양이가 아니지. 그리고 나날이 해오던 배달로 내 다리는 꽤나 단련되어 있다고.”
“그건 그렇네.”
“심지어 영역 선택은 중요한 문제거든. 웬만하면 더 생활하기 편한 곳으로 가는 걸 고양이들도 더 선호해.”
의외로 고양이만의 판단 기준이 있는 것 같다. 나로선 잘 된 일이다. 두 꼬맹이의 눈치를 안 보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
결국 몇 시간 동안 돌아다녀본 결과.
두 번째로 봤던 집이 가장 괜찮다고 결론지었다.
“방이랑 거실 평수 분배도 잘 되어있고, 오누이 식당이랑도 가깝고, 주방도 깔끔하고, 세탁용 베란다도 있고.”
그밖에 조금 건물이 노후되었다는 단점이 있지만 얼마 전에 한 번 내부공사를 해서 물이 새는 등의 특별한 하자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자, 그럼 다음 휴일에는 가구 보러 갈 거야.”
“움? 가구?”
“응, 윤슬이 너가 그렇게 원하던 소파나. 그리고 책상, 식탁 같은 거. 침대도 하나 새로 사야겠지?”
“오오...! 소파. 근데 책쌍이랑 침대 하나는 더 모하러 사? 이미 있자나.”
윤슬이는 우리가 지금 앉아있는, 좁아터진 앉은뱅이 식탁이랑 연식이 오래된 침대를 번갈아가리킨다.
절약 정신이 투철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기보다는 정말로 왜 또 사야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집으로 가면 더 넓게 살잖아. 그러니까 윤슬이 방도 하나 만들어줄 거야.”
“윤스리 방?”
“응, 거기에 이제 윤슬이 침대랑 책상 둘 거야. 식탁은 거실에 두고.”
윤슬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자기 방이 따로 생기는 상상을 하는 게 아닐까.
그 와중에 고양이 모드의 영희씨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앞발로 툭툭 건든다.
“캣 타워도 하나 사둘 생각이야.”
냐앙-!
‘탁월한 선택이군!’
그걸 바랬던 모양.
당연히 영희씨도 우리 식구니까 공평하게 물건과 자기 공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 여유가 되면 새로운 스크래쳐도 하나 사줘야지.
“옵바.”
윤슬이가 손을 번쩍 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왜, 책상이랑 침대 말고 다른 거 원하는 게 있어?”
충분히 사줄 수 있다. 전세금을 내고도 꽤 지갑에 여유가 되어서 진짜 비싼 가구가 아니라면야 투자 가능한 금액이다.
“우움... 그게 아니구. 윤스리 방 말구, 옵바 방 써.”
“? 그게 무슨 소리야.”
“윤스리는 아직 방 필료 업써. 옵바가 쓰는 게 차라리 조아.”
“왜 그래. 우리 윤슬이 조금만 더 있으면 초등학교도 들어가야 되는데.”
사실 초등학교 들어가기까지 시간은 조금 남았다. 2년 정도. 조금 애매한 시간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방이 필요 없다. 어차피 집은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공간이기도 하고, 굳이 영희씨랑 윤슬이한테 숨겨야할 사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윤슬이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시간을 가지면서 공부를 조금 해두어야 한다.
또, 학교에만 들어가더라도 자기 공간을 점점 원하게 되겠지. 굳이 누구 한 명이 방을 써야하면 윤슬이가 쓰는 게 맞다.
“그치만 옵바한테 너무 미안해.”
“오빠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윤스리두 다 알어. 옵바는 사실 방 혼자서 쓰구 있었눈데 윤스리랑 영히씨가 쪼꿈씩 옵바 방 뺐어서 쓴 거야. 고마운 일이지만 옵바는 손해를 넘무 많이 봐써. 그니깐 방이 새로 생기믄 옵바가 쓰는 게 무조건 맞아.”
“윤슬아...”
“그니깐 윤스리 방 말구 옵바 방으루 써.”
냐앙-
‘난 별 상관 없지만. 윤슬이 말에도 일리가 있네.’
영희씨까지 거든다.
하지만 난 딱히 방이 필요한데도 윤슬이가 있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은 아니다. 윤슬이에게 방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애초에 그다지 사생활이 많은 사람이 아닌지라 충분히 양보할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동생을 다루는 방법이 따로 있지.
“무슨 소리야, 윤슬아 이번 방은 오빠가 양보를 해야 되는 건데.”
“움? 이유가 몬가여.”
“그야, 윤슬이는 나중에 어른 되면 오빠한테 많이 사줄 거잖아. 집도 사주고, 자동차도 사주고 다 사준다며?”
“그거눈 맞지. 윤스리가 돈 벌면 옵바한테 조은 거 사주는 게 제일 우선이야.”
“그럼 오빠는 미리 고마우니까, 방 하나 정도는 윤슬이한테 양보하는 게 옳지 않을까?”
“움... 그렇지만.”
“그래야 윤슬이가 더 공부도 열심히하고 대단해지지. 덜 대단해지면 오빠한테 사주고 싶은 거 못 사줄 수도 있잖아.”
“그렁가?”
거의 설득됐다.
동공이 매우 흔들린다.
“그러믄 대신 옵바가 윤스리 방 빌려서 쓸 수 있게 해줄게. 언제든지 말만해.”
“그래, 그럼 그런 걸로 하자. 약속.”
“약쏙.”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동생은 꼼짝도 못하고 방을 가져야만 한다.
윤슬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전 성공이다.
**
“그럼 오늘은 소파 사는 거야?”
“그렇지. 소파랑 침대랑, 등등...?”
여러 가지 조건을 확인한 뒤, 집 계약을 마쳤다. 이제 이사 날짜까지 필요한 준비를 해두는 것뿐.
호재라면 1월의 이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값이 싸게 이사 업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결국 이사 날짜까지 잡혔기 때문에 우리는 이어지는 휴일을 맞아 새 집에 비치할 가구를 사러 나왔다.
영희씨는 캣타워를 인터넷으로 주문해주었더니, “난 이거면 됐으니까, 너희끼리 살 거 사고 와.”라며 집을 보겠다고 했다.
나랑 윤슬이 둘만 나오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큰 길가까지 나와서 도착한 가구점. 요즘은 인터넷으로 웬만하면 구매한다고 하던데 나는 직접 동생이랑 만져보고 구입하고 싶었다.
“오오...! 저기 소파 있다.”
“윤슬아, 잠깐만.”
“움?”
“소파 찾는 건 좋은데, 저기 위에 올라가서 구르기는 하면 안돼.”
“잉, 그 정도눈 나두 알어.”
“그럼 됐고.”
“옵바는 너무 걱정이 심한 경향이 이써!”
되려 화를 내는 만 4세.
내 잘못이라기보단 너가 구르기에 지나치게 진심인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고 쿨하게 넘어가는 게 어른스런 태도겠지.
우선 윤슬이를 직접 앉혀보면서, 책상과 의자의 높이를 재어본다. 적당히 키가 크는 것을 고려해서 사는 것도 좋지만 본인이 앉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는지 물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냥 다 똑같다구 생각해.”
“.... 그래.”
하지만 만 4세의 모든 신경은 이미 소파 쪽에 향해있었다. 심지어 본인 방에 둘 책상인데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가보다.
결국 벽지 색깔을 고려했을 때 그나마 잘 어울릴 것 같은 것들 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책상과 팔받침대와 등받이의 높이 조절이 되는 의자를 찜해두었다.
곧바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나보다 먼저 직원분과 함께 소파 코너에 도착해있는 윤슬이.
“저기여 언니, 혹씨 여기서 어디까지 해도 되나여?”
“?? 어디까지 해도 된냐는 게 무슨 말이니?”
“옵바가 구르기는 하면 안 댄다구 그랬눈데, 혹씨 쩜프는 대나여?”
“점프... 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조심히 앉아만 보는 게 어떨까?”
“움... 유감.”
직원분과의 협상에 실패한 만 4세는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아본다. 말은 잘 듣는다.
소파에 앉아서 한 번 엉덩이를 툭 튕겨보더니 표정이 확 밝아진다.
“오오...! 푹씬하다. 이거 디게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