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염라(1)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3월이 되었다. 추위도 거의 잦아들었고. 집을 이사한 덕분에 훨씬 출근도 편해진 와중에 만 4세가 당찬 포부를 밝혔다.
“윤스리, 불을 써보겠다.”
“불?”
“틱틱틱틱틱틱- 쏴아아!”
윤슬이는 내가 가스레인지에다가 불을 붙이는 것을 소리까지 똑같이 따라한다.
쏴아아! 라고 할 땐 가스불이 켜지는 형상을 따라하여 양팔을 하늘 위로 올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디테일이 상당히 살아있는 만 4세라고 볼 수 있겠다.
“윤슬이 가스불은 조금 더 나이 먹은 다음에 쓰기로 했잖아. 약속 아니었어?”
“그건.... 약쏙이어써.”
“그럼 왜 갑자기 불을 써보겠대?”
유아용 식칼을 윤슬이가 사용하는 것까진 허용 범위다. 말 그대로 유아용이기 때문에 다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은 전혀 별개의 문제. 나조차도 늘 화상을 입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다루는 게 불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달에 두어 번쯤은 손등 언저리에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곤 한다.
이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윤슬이에게 불을 다루게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인다.
“만들구 싶은 요리가 있따.”
“윤슬이가 직접 만들고 싶은 거? 저번에 방에 붙여둔 레시피 중에서 해보고 싶은 게 생겼구나.”
“우움... 그거눈 아니구.”
“그건 아니야?”
“응! 윤스리 라면 만들어보구 싶어.”
“라면을?”
그건 또 갑작스럽다. 확실히 안 먹은 지 꽤 오래되긴 했는데, 굳이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웬만한 끼니는 가게에서 떼우고. 집에서 간단히 먹을 때에도 주로 밥을 먹곤 하니까.
“왜 라면을 직접 만들어볼 생각을 했어?”
“그건 이유가 있따.”
“그러니까 무슨 이유냐구.”
“오늘 3월이자나. 근데 3월은 아주아주 중요한 달이야.”
“3월이?”
“웅, 왜냐믄 윤스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슴미다.”
어쩐지 가슴을 넓게 피며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만 4세. 저건 자신이 정말로 자신 있을 때만 보이는 포즈다.
“무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건 바로! 윤스리랑 옵바랑 처음 만난 게 3월이었다는 사실!”
“이럴 수가...!”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윤슬이의 표정이 마치 ‘쿠쿠쿠... 이건 몰랐을 거다.’와 같은 느낌이라서 차마 알고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나는 참된 오빠다.
“근데 그게 라면이랑 무슨 상관이지?”
“아앗, 그럴 줄 알아따~~!”
“??”
“윤스리는 아는데, 옵바는 다 까먹었을 줄 알아따~~!”
뭔가 내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는 모양. 이번에는 확실히 윤슬이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라면과 3월의 상관관계를 전혀 모르겠다.
“바로바로, 윤스리한테 옵바가 처음 해준 음식이 라면이거둔!”
“아아... 그런 얘기였어?”
“움!”
윤슬이는 턱을 하늘 높게 치켜든다. 턱 아래를 손끝으로 쓰담쓰담해주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그나저나 다소 사소한 일이라 잊고 있었다. 윤슬이한테 처음 해줬던 게 라면이었던가. 그때의 나는 꽤 보호자력(力)이 모자란 인간이었나보다.
그때였으면 아직 5월도 채 안 되었을 때니까 윤슬이는 만 3세였을 텐데. 그런 아이에게 라면이나 먹이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오싹하다.
아무튼 오싹한 것은 둘째치고, 지금까지 대화의 흐름을 종합해보자면.
“그럼 윤슬이는 이제 오빠랑 처음 만나게 된 3월을 라면으로 기념하고 싶다는 거구나?”
“백 빠센트(100%) 정답임미다.”
다소 특별한 악센트의 100%였다. 중학교 때 주에 3번씩 뵙던 국사 선생님의 악센트와 닮아있다. 고사리 손가락 따봉도 잊지 않고 챙겨주신다.
“취지는 좋은데, 윤슬이 불 사용하면 위험해.”
“안 위험해. 다 커써.”
“그럼 오빠한테 하이파이브 한 번 시도해봐. 만약에 성공하면 가스불 사용하게 해줄게.”
“쿠쿠쿠... 그 정도는 아주 간단.”
5세는 자신만만하게 내 앞으로 걸어온다. 허나 절대로 이는 성공하지 못할 내기였다.
왜냐면.
“움...?”
“왜 그래. 빨리 하이파이브만 한 번 하면 되잖아.”
“이익!”
폴짝- 점프.
또 다시 폴짝- 점프.
높이가 전혀 안 닿는다.
간단한 일이다. 아직 윤슬이와 나는 70cm 가량의 신장 차이가 있다. 손을 적당히 머리 높이로 들고 있으면 윤슬이가 아무리 점프를 열심히해도 손바닥을 마주칠 수가 없다!
그간 햄스트링 근육을 몰래 미치도록 단련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누이도 아니고, 그랬을 리는 없으니 불가능한 하이파이브라는 얘기다.
만 4세는 다섯 번 정도 시도하다가 포기해버렸다.
“하아... 윤스리는 1년이 지났는데두 아직 애기야.”
당연한 소리. 아마 3년이 지나도 애기일 것.
**
“옵바, 잘 보구 이써야 돼.”
“오냐.”
“윤스리 뜨거우믄 다치니깐 잘 보구 이써야 돼.”
“알겠다니까.”
“다치믄 얼매나 아퍼?”
“그냥 적당히 따끔해.”
“우우... 조심하겠따.”
결국 윤슬이 고집에 졌다. 오빠한테 라면 한 번 끓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뻐서 그런 것도 있고.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데 끝까지 말리기도 조금 애매했다. 옆에서 내가 봐주면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기름을 쓰는 일이라면 못하게 했겠지만 라면 같은 경우는 물을 넘치게 하지 않는 이상 뜨거운 액체가 튀어오를 일은 없다.
그렇게만 되어도 혹시 모를 화상의 위험은 상당히 줄어든다.
그리고 냄비를 직접 잡을 때만 내가 도와주면 다칠 일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때 썼던 게 이거던가?”
“응, 맞아. 사골육수.”
“쿠쿠쿠... 이것까지 기억하구 있는 윤스리. 아주 칭찬칭찬이야.”
만 4세의 셀프 칭찬 X 2회. 다름이 아니라, 그때 만들었던 라면의 육수가 사골 베이스였다는 얘기다.
그냥 라면만 멕이기 뭐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침 시기 상 설이 가까워, 남아있던 인스턴트 육수를 사용하기 딱 좋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으시단다.
타타타타타-!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솜씨로 칼질을 하며 파를 자른다. 라면 1인분에 들어가면 알맞을만한 양의 파를 따로 건네주었다.
열댓 토막 정도난 파를 그대로 끓는 라면에 투하.
사실 라면이라는 게 별 거 없어보이는 음식이지만 은근히 불조절이 중요하다.
요점은 언제 불을 끄고 식탁으로 가져오느냐. 그 타이밍에 관해서는 윤슬이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는데.
“움...”
만 4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라면이 끓는 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얼굴에 느낌표 두 개를 띄우더니, 그대로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가스불을 끈다. 식탁으로 옮겨달라는 뜻이다.
냄비의 손잡이를 들고, 식탁으로 옮기며 내용물에 곁눈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상당히 먹음직스럽다.”
이 정도면 거의 ‘헤븐 오브 김밥’에 비빌만한 수준이라고 가히 평할 수 있겠다. 적당히 꼬들꼬들하게 올라온 라면의 면발이 적당량의 국물과 어우러져 주홍빛깔을 띤다.
간간하면서도 적당히 짠 맛을 혀에 전해줄 것만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우오오... 김 음청 마니 올라온다.”
“방금 막 윤슬이가 완성한 요리잖아.”
“맞어! 이제 윤스리 1년 지나서, 요리두 할 수 있게 돼써. 마니 컸지?”
“응, 많이 컸네?”
“이건 대따 의미가 크다구 볼 수 있어. 왜냐믄 옵바가 처음으루 해준 요리를 그대루 윤스리가 만들었다구 볼 수 있으니까는.”
윤슬이는 자신이 라면을 끓여낸 게 많이 자랑스러웠는지 젓가락을 집어 먹어볼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내게 자꾸만 엉겨붙어 말을 건다. “이거 디게 맛있게 잘됐지?” “옵바가 먼저 먹어바바.” “넘무 짜면 어뜨케 하지?” 등등.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흥분한 것이다. 요리라면 연말부터 꾸준히 몇 그릇씩 만들어내고 있지만. 가스불까지 맡긴 것은 오늘이 처음인지라 이럴만도 하다.
단순히 라면을 끓여냈다는 것보다 한 걸음 더 어른에 다가갔다는 그 명료한 사실이 라면으로써 증명된 것이나 다름 없다.
말하자면 만 4세는 한 단계 어른의 계단을 더 밟고 올라온 것이다.
우리가 젓가락을 집을 생각을 하지 않자, 멀찍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입만 줘’의 달인(고영희씨)가 스멀스멀 기어온다.
“너희 안 먹으면 내가 먼저 먹어도 괜찮겠지?”
“아앗, 그땐 영히씨두 업써서. 이건 옵바랑 윤스리의 추억 음식인뎅.”
만 4세는 우리의 추억 음식을 고영희씨가 먼저 맛 보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서 상관 없고, 윤슬이는 내가 먼저 먹기 전까지는 손을 댈 생각이 없어보인다. 대접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럼 영희씨가 이걸 먼저 먹으면 추억을 함께하는 거니까 더 좋겠네?”
“움... 그렁가?”
“영희씨도 가족이니까 같이 추억 공유해줘야지.”
“옳소!”
윤슬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마지못해 사골 라면의 첫 입을 허락해준다. 영희씨는 씨익- 웃는다.
‘걸려들었군! 이걸로 첫 입은 내 거다.’와 같은 사악한 표정을 짓는 영희씨.
고작 라면 한 입 먹는 걸로 크나큰 호들갑을 떠는 우리 가족이었다.
후루룩-!
라면을 한 젓가락 야무지게 집어 입으로 밀어넣는 영희씨. 윤슬이는 자신의 첫 라면에 대한 감상이 어떤지 궁금한 듯 영희씨의 표정을 살핀다.
“움...?”
“왜 그래?”
표정을 살피는데.
영희씨가 한 입을 후루룩- 입에 담아 야금야금 삼키더니. 말을 잃었다.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쿠쿠쿠, 아주 감동적일 정도루 맛이 좋았구나!”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이야?”
“장난이 아니라 윤스리가 끓여준 라면이 기가 맥혔던 거라구 볼 수가 이써.”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평소 영희씨는 맛있는 걸 먹으면 저런 식으로 리액션을 보이지는 않는다.
맛이 있다면, 한 입을 잽싸게 더 먹고. 자기 취향의 맛이 아니라면 재빠르게 손절하는 게 영희씨 스타일이다. 근 반 년 간 내게 관찰해본 결과 그렇다.
헌데 어딘가 충격을 받았는지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영희씨? 왜 그래?”
“움?”
윤슬이도 슬슬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걱정스런 얼굴로 영희씨에게 다가간다.
“혹씨 윤스리가 만든 라며니 별루 맛이 없었구나. 미안해라.”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영희씨의 옷자락을 쿡쿡 잡아당기는데. 영희씨가 조금 아저씨스러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윤슬이를 쳐다본다.
“허허, 결국 이렇게 내기가 끝났구나. 윤슬아.”
“움...? 내기?”
“그래, 네가 이겼다. 1년 동안 고생했어.”
“갑자기 뭐야??”
영희씨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
라면을 먹고 각성이라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