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염라(2)
“무슨 일이야... 영히씨.”
“기억을 못하는 게 당연하지. 본래 그런 이치가 적용되어 있으니.”
“...?”
윤슬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영희씨. 평소와 사뭇 다른 표정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런 흐뭇한 얼굴로 윤슬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윤슬이는 ‘모지?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잠시 갸우뚱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고로롱-! 코까지 골아버린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 허나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영희씨의 모습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미묘하게 온화한 분위기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윤슬이의 눈을 감겨주는 손길이 따스해보여서인지.
위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영희씨는 아니신 모양인데요.”
“제대로 봤어.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이번 회차를 기준으로는 처음이 되겠군. 나는 염라라고 부르면 된다.”
“염라?”
오누이가 몇 번 이 이름을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저세상의 왕이라던가. 물론 오누이가 언급했던 것 외에도 상식 선에서 알고 있는 정보도 있다.
내 이미지로써는 지옥의 어느 거대한 옥좌에 앉아 인간들의 수명을 기록하고 있는 느낌인데. 실제로 영희씨의 몸을 강탈해... 아니 빌려서 이렇게 뵙자니 제법 인자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렇게 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송주현군 자네와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저랑요?”
“그래, 네 동생에 관한 일 때문이기도 하지.”
“윤슬이...”
지금 막 염라와 윤슬이가 나누었던 대화를 잠깐 떠올린다. 분명 염라는, 영희씨의 몸을 빌려 세상에 강림했던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결국 이렇게 내기가 끝났고. 그 결과 윤슬이가 이겼다고.
“윤슬이랑 무슨 내기를 하신 거죠?”
“자네를 걸고 내기를 했다.”
“.... 저요?”
“그래.”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윤슬이는 나를 꽤나 아껴준다. 그리고 아끼는 것을 함부로 내기에 걸 정도로 윤슬이는 담력이 좋은 아이는 아니다.
반면 개연성이 조금 들어맞는 부분도 있다. 윤슬이가 1년 간 보여주었던 이상한 능력들.
나의 능력은 분명 오누이와 함께함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그렇기에 출처가 명확하다.
하지만 윤슬이가 보여준 것들은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들도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영희씨가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은 거의 윤슬이 덕분이니 말이다.
“무슨 내기인지 신경이 쓰이나?”
“네, 그야 당연하죠. 윤슬이는 제 동생이니까요.”
“끌끌... 그럴 테지. 하지만 그 전에.”
영희씨의 목소리로, 끌끌 같은 웃음소리를 내니 꽤나 이질적이다. 염라의 눈길은 슬슬 불어가는 라면을 향한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나.”
“.... 그냥 라면이 드시고 싶다는 얘기죠?”
“맞아.”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자네는 뭘 좀 아는구만!”
후루룩... 후룩-
갑자기 영희씨의 몸을 빌려 윤슬이와 내기를 했느니, 어쨌느니 이야기를 하길래, 어떤 대화의 흐름이 될지 조금은 긴장했는데.
라면을 드시는 모습을 보니 아주 일상적인 느낌이 들어, 그런 위기감이 많이 사그라든다.
애초 윤슬이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나에게 그렇게 나쁜 얘기를 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다.
후루룩... 쪼록!
윤슬이가 끓인 사골 라면의 국물까지 텅텅 비운 염라는 게걸스럽게 트림을 한다.
“간이 조금 심심하군.”
“사골 국물을 쓴 대신에 스프를 덜 넣었거든요. 심심하다기보단 담백한 느낌인 거죠.”
“흐음, 알 것도 같네.”
맛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냄비 바닥을 긁는 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무얼 바라고 있는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서야 입을 연다.
“간단한 얘기지. 자네는 원래 죽을 운명이야.”
“.... 갑작스럽네요.”
“갑작스럽다? 그렇진 않을 텐데.”
“저는 꽤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건강 상태는 좀처럼 겉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 특히 목숨에 관련된 하자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닐 텐데?”
“....”
짐작 가는 구석이 하나 있다.
심장.
건강 검진을 가면 한 번씩 주의를 받는 내용이긴 하다. 재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되도록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하다거나.
술담배는 자제하라거나.
관례적으로 의사분들이 하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저런 종류의 말씀은 새겨듣는 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렸을 때 수술했던 이력이 있으니까. 일전에 윤슬이와 건강검진에 들렀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
“근데 제가 심장이 안 좋아서 금방 죽는 거랑, 윤슬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 운명이 바뀌었다는 뜻이지. 이 아이 덕분에.”
“윤슬이 덕분에...?”
“애초에 이 아이가 자네를 만난 것은 작년 3월이 아니야. 정확히는 자네 기준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윤슬이 기준으로는 다르다는 얘기지.”
“시간이라도 거슬러왔다는 건가요?”
“정확해.”
“...!”
염라는 씨익- 웃더니 윤슬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동생의, 기나긴 이야기를.
**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장윤슬은 후회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오빠, 송주현을 보고 마음이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안색이 안 좋던 송주현이 가게 주방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다행히 단골 손님들의 도움으로 병실에는 무사히 옮겼고.
의료진들의 빠른 조치로 어떻게든 위기는 넘겨,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은 여전했다.
“오빠. 평생 나만 돌봐주다가... 이렇게 아파버리면 어떻게 해? 미안하게... 진짜.”
“돌보기는 뭘 돌봐. 가족이니까 그냥 같이 살던 거지.”
“오빠는 나 때문에 살면서 자기 시간도 별로 못 가졌잖아. 내가 바본 줄 알아? 평생 희생하고 산 거 다 알아. 맨날 좋은 것도 다 나한테 양보하고.”
“무슨 희생씩이나. 내가 그렇게 성인군자로 보이냐? 그냥 양보할만한 것만 양보했던 거야. 그리고 바보 같이 왜 우냐. 누가 보면 죽을 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네.”
“위험한 거잖아.”
“안 위험해. 한 번 수술해서 나았던 건데, 두 번이라고 못 나으려고?”
송주현은 애써 괜찮은 척을 했지만, 그건 척에 불과하다는 걸 장윤슬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10년 간 슬픔도 기쁨도 함께한 사이이기에 억지 웃음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의지할만한 어른들은 있었다. 할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지만, 워낙 가게를 운영할 때에도 그렇고. 평소에도 그렇고 인간관계를 잘해두었던 오빠였기에.
여러 사람들이 병문안을 찾아오거나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안을 삼을 부분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결국 오빠의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간 누적되었던 피로나 스트레스가 심장에 부담이 많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우선은 입원하면서 경과를 지켜보고, 재수술 일정을 잡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수술의 성공 확률은 낮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이미 두 차례의 수술 과정을 거친 심장은 보통 사람보다 건강히 기능하기 어렵다는 것.
그렇기에 되도록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삼가고, 수술 후 적어도 1년 정도는 휴식 기간을 가지며 건강 상태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빠는 지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또, 장윤슬 자신을 먹여살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휴식을 권고한대도 오빠가 그 말을 순순히 따를까, 라는 의문에 장윤슬은 확신했다.
‘오빠는 아마도 조금만 건강이 회복되더라도 다시 일을 시작하려하겠지.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다섯 살만 더 많아서, 어른이 되었다면 당장 알바를 하든. 아니면 오빠에게 배운 지식으로 가게를 이어나가든 해보겠지만.
아직 중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살면서 오빠의 짐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
돌이켜보면 잔혹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꽃다운 스물다섯의 나이에 나를 떠맡게 되어, 남들에 비해 모자란 것 없이 키워주기 위해 손발이 닳도록 일했다는 것을 장윤슬은 너무도 잘 알았다.
남들은 연애를 하거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기개발을 하거나, 넓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을만도 할 시기에. 오빠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항상 최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거를 돌이켜볼 때마다 장윤슬은 마음이 아프고, 조금은 후회도 됐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빨리 어른이 되어서,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서 오빠가 편히 살 수 있도록.’
‘아직은 약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몸도 마음도 강하고 단단해져서.’
‘이번엔 내가 오빠를 지킨다. 오빠가 나를 지켜줬던 것처럼.’
몇 번이고 되뇌였다. 당위나 의무감이 아니었다.
장윤슬, 스스로가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을 그토록 소중히 대해준 오빠에게 자신도 마찬가지로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다짐하고는, 지쳐 잠들어있는 오빠의 손을 잡고. 자신도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자 꿈에 염라가 나타났다.
**
“원래대로라면 자네는 수술이 끝나고 건강이 쇄약해질 운명이었지.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윤슬이가 제대로 어른이 될 때까지 몰래몰래 부업을 하며 돈을 쌓아두고는 성인이 될 때쯤 그대로 저승으로 오게 되는 셈이지.”
“.... 그랬군요.”
“자네의 운명에 충격받았나?”
“아뇨, 제 운명에 충격받았다기보다는.”
“으음?”
“지금 말씀하신 흐름을 들어보면 윤슬이 언동이 되게 와닿는 부분이 있어서요.”
“언동이라... 자네한테는 그럴만도 하겠군.”
다름이 아니라 윤슬이는 요 1년 내내 지나치게 ‘어른이 되는 것.’과 ‘더 강해지겠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나를 지켜주겠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말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봐온 나는 알고 있다. 그 말들은 결코 농담조가 아니었단 것을.
하지만 나는 그저 윤슬이가 워낙 가족과의 이별을 겪어온 아이이기 때문에, 나까지 잃게 되면 너무나 쓰라린 인생이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염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말이다.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래. 그렇게 윤슬이의 꿈에 나타난 다음의 이야기야. 우린 자네를 걸고 내기를 하기로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