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200화 (200/200)

200화: 우리가 쓰는 명작

“그 다음은 자네가 기억하는 게 전부야. 윤슬이는 도전하고 또 도전해서, 자네를 구하는 지금의 미래에 도착했지. 이번 1년으로, 그 모든 스트레스 요소를 없애고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은 나도 예상치 못했지만.

아무튼 자네는 구원받았네. 내기는 결국 윤슬이의 승리로 끝났어. 모든 게 잘 된 일이지.”

“잘 된 일이라니요. 아니죠. 전혀 아니에요.”

“.... 그 표정은 뭔가.”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다면 윤슬이는, 내 동생은.

대체 몇 번이나 과거를 거슬렀을까.

몇 번이나 나의 죽음을 직면해야만 했을까. 그때마다 어떤 감정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내뱉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스윽-

얼굴을 두 손 안으로 묻는다. 눈물이 흘렀다. 훔치려해도 손 바깥으로 흘러버릴 정도로.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런 내게, 조금은 익숙한 손길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머리 위에 얹어졌다.

“울지 말게.”

“하지만.”

“자네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누구보다 의연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

“제 동생은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아온 건가요?”

“그건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횟수의 시간을 되돌려야만 했지. 난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네.”

“....”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올바르게 설명해주는 쪽이 오히려 납득이 되었다. 괜히 나를 배려한답시고 거짓으로 ‘몇 번 되지 않았다던지’ 그런 느낌으로 거짓을 말해주었다면 난 오히려 더 찝찝해졌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윤슬이는 기억이 지워진 채로 시간을 반복해야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목표로 하여 과거로 돌아왔는지, 매 순간 잊게 된 것이다.

목적을 잃은 여행은 필연적으로 길을 잃기 마련이다.

내 동생은 기나긴 시간의 틈새에서 얼마나 방황했을까. 그 거대한 빈틈이 내 머리 한 켠에 자리 잡은 상상의 공간을 마구 메우기 시작했다.

점점 답답해진다.

“하지만 알려줄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뭐죠?”

“자네의 동생이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늘,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지었던 표정에 대해서.”

“표정?”

“그래. 네 동생은 그렇게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그리고 자신이 몇 번이고 시간을 반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마다. 같은 표정을 지었어.

아주 한결 같이 웃는 얼굴이었지. 기쁘단 듯이, 그리고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이야.”

“기대가 된다니요.”

“아마 자네를 구해낼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것보단 내겐 조금 더 원초적인 행복에 겨운 얼굴로 보였네.”

“....”

“그저 자네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기뻐보였다는 얘기야.”

“....”

“다섯 살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서 한 번 더 자네와 만나고. 생일을 맞이하고, 요리를 배우고, 사람과의 만남을 배우고, 행복을 알게 되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고.

아마 그 모든 과정을 다시 한 번 겪는다는 것은... 아니, 겪는다는 표현 자체가 조금 잘못되었군. 그 모든 과정을 다시 한 번 해낼 수 있단 것은 장윤슬에게 고통이 아니었던 거야.

조금 값싼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 관람했던 명작 영화에 대한 기억을 싹 다 지워버리고 다시 관람하게 되는, 그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명작...?”

“그래, 명작. 윤슬이에게 자네와 함께했던 15살까지의, 10년의 시간은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 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만한. 심지어 그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바꿀 수 있게 된.

한 편의 명작이었던 거야.”

아아.

염라가 처음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누구보다 의연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

그 말이 옳다.

어째서 내가 울고 있는 것일까.

그건 틀림 없이, 윤슬이가 수도 없이 겪었을, 우리의 이야기가 비극이라고 내 마음이 단정지었기 때문.

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비극인가?

아니.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볼품 없이 눈물이나 흘리며, 그 이야기를 슬픔이란 감정으로 도배해버리는 것은.

윤슬이의 여정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윤슬이의 행복을 비극의 틀로 가둬버리는 일이다.

몹쓸짓이다.

그러니 마땅히 나는 웃어야 한다.

하염없이 울었던 것과 같이, 하염없이 웃어야만 한다.

내 동생이 지나왔던, 그 수없이 흘렀을 10년의 여정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게.

아니, 그것을 넘어 진정한 해피엔딩으로 뒤바뀔 수 있게.

“이제야 조금 감정이 정리된 모양이군.”

“네, 염라의 말이 맞아요. 저는 울면 안 되죠. 의연해야죠, 반드시.”

나는 잠들어있는 윤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깨지 않을 정도로만, 조심스레.

“그래, 그럼 이 이야기를 알리는 것으로 나의 역할은 끝이네만. 뭔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더 없나?”

“.... 끝이라고요?”

“그래. 내기는 이대로 끝이다. 자네는 죽음의 운명을 회피했고, 지옥의 명부는 다시 쓰여질 것이네. 이대로 가면 해피엔딩 아닌가?”

“아니죠. 전혀 아니죠.”

“??”

염라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아직 단 한 가지, 우리의 과제가 남아있다.

윤슬이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었으니, 나는 오빠로서 알려주어야 한다.

윤슬이, 네가 얼마나 훌륭하게 자라서 오빠를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주었는지.

그 일련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네가 몸소 느낄 필요가 있다.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지.

내가 내게 해준 일에 비하면 한 없이 작은 일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염라에게 조금 떼를 써보려고 한다.

“염라, 저승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승에서는 이승의 규칙이 있어요.”

“...? 이승의 규칙?”

“윤슬이랑 내기를 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래, 자네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내가 자의적으로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그랬지.”

“근데 이승에서는 내기를 하면 진 쪽이 이긴 쪽 소원을 꼭 하나 들어줘야 하거든요.”

“아니, 잠깐만 그건!”

“저승의 왕씩이나 돼서, 설마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다고 발빼시는 건 아니죠?”

“.... 자네의 수명을 늘릴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처를 했다고 본다만.”

“그건 그렇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근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들어주세요. 오빠 체면도 조금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 뭔데 그러나?”

**

다음날 아침.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는 관계 없이 평소처럼 찾아온 평소와 같은 아침.

영희씨가 말린 생선 같은 눈을 하고는 기상했다.

“으어어... 목이 찌뿌드드... 하다.”

“움? 영히씨가 잠을 잘못 잤나보다. 윤스리는 아주 꿀잠 자써.”

“그래? 넌 잘 자서 다행이다. 어우, 머리도 어지럽고. 현기증인가?”

영희씨는 날 힐끔 쳐다보더니, 정색한다.

“일하기 싫어서 꾀부리는 거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쳐다보지마.”

“아니, 누가 뭐래니.”

영희씨가 왜 저런 모양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염라에게 몸을 잠시나마 빼앗긴 것 때문에 피로가 누적된 것이겠지.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다.

반대로 윤슬이는 아주 꿀잠을 잤는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다. 그뿐만 아니라, 소파에서 구르기까지 한 번 시원하게 굴러버린다.

“움,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멀어써.”

“....”

어제만 해도, 저런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괜히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을 생각이다.

더욱이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는 그래야만 하니까.

“움? 옵바 표정에 이상 발생!”

“.... 이상 발생이라니.”

“몬가 표정이 진지하다. 이것은 별루 좋지 않은 신호.”

“별로 좋지 않은 신호야?”

“그렇타. 이렇게 된 이상!”

“?”

“오늘 옵바는 아주 맛있는 아침밥을 만들어서 윤스리한테 대령해줄 것. 그리고 같이 맛있게 식사할 것.”

“....”

요점은 나를 부려먹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침밥 하나 맛있게 못 차려주랴.

냉장고 안에 남아있는 잔반찬들을 확인하며, 어젯밤 염라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윤슬이가 모든 기억을 되찾게 해주세요.

결국 요점은 그거였다. 그리고 염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 어렵지 않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 미래의 기억을 모두 되찾게 되면, 미래에 발생하는 일을 모두 알게 되어 인과 조정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결국 도출된 결론.

윤슬이가 가장 처음 염라의 존재를 알게 된, 그날이 이번에 다시 한 번 찾아오게 되면.

그날 윤슬이의 기억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로써 조금은 윤슬이에게 보은이 된 셈이다.

적어도 자기가 얼마나 멋진 대장부 여동생인지는 스스로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 말고도 갚을 일이 아직 많이 남았지.”

“움? 모를 갚아?”

내가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는데 윤슬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 오른쪽 다리를 꼬옥 붙잡고 있다.

“우리 윤슬이가 오빠한테 해준 게 너무 많아서 앞으로 평생을 들여가면서 갚아주려고 한다.”

“쿠쿠쿠... 드디어 윤스리의 은혜를 깨달아써.”

“그래, 이제 깨달았으니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재밌는 데에도 많이 데려가줄게.”

“.... 그거는 윤스리두 마찬가지야.”

“으음?”

“옵바가 마니 잘해줘서 윤스리도 마니 잘해주는 거야. 그니깐 옵바가 갚으면 윤스리두 똑같이 갚는 거야. 모든지 해주기만 해, 그럼 윤스리가 다 갚아줄게!”

맥락은 이해하지만, 여전히 언어에 미숙한 만 4세.

하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느 때보다 더 절실히 전달된다. 나는 윤슬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래, 고맙다. 윤슬이랑 오빠는 이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움? 새로?”

“그래. 어제까지랑 오늘은 달라.”

“그거눈 당연하지. 왜냐믄 어제보다 윤스리 키가 쪼꿈 더 컸을 테니까.”

“그래. 맞는 말이네.”

하지만 너는 아직 모르겠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걸.

윤슬이 네가 어느 미래에서던지, 시간을 되돌리는 최후의 순간에는 밝게 웃고 있단 것을 믿어.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때보다 훨씬 멋지게 웃는 얼굴로.

마지막에 염라에게 “작전 성공.”이라고 말해줄 거잖아.

그렇다면 그런 최후에 간직하게 될 마지막 기억은 가장 아름다워야 할 테니까.

나는 윤슬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가 같이 명작을 쓰는 거야.”

“명작?”

“응.”

“명작이 몬데.”

“....”

그걸 알려주는 것부터가 시작인가.

뭐, 좋다.

오히려 그게 윤슬이와 나답다.

명작이 뭔지, 구구절절 뜻을 설명해주는 것보다는 아마 이러는 쪽이 더 효과적이겠지.

“윤슬이랑 오빠가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 명작인 거야.”

“오오...! 그러믄 1년 전부터 계속 명작이었던 거시네.”

“그래, 윤슬이 말이 정답이다!”

나는 윤슬이를 번쩍 들어올려,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네 말이 맞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어제마저도.

우리의 매일은 명작이었다.

우리가 함께할, 그리고 함께했던 모든 날들이 그걸 찬란하게 증명해줄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