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인간이었던 시절의 인연(2)
“ㅡ그래서 그 분과의 만남은 즐거우셨습니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느닷없이 들린 음성에도 한참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채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글……. 쎄? 즐거울 만큼 뭔가를 한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채원은 방금 전에 마주했던 흡혈귀 소녀를 떠올렸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계약을 맺자니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서로의 이름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계약을 맺어도 무용지물. 진실한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은 상대에게 믿음을 느낄 리가 없으니까, 당연히 계약의 신뢰성도 떨어진다.
채원이 소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이유 또한 거기에 있었다.
이제는 소녀가 되어버린 김유성의 새로운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까.
설마 아직도 이름을 안 지은 것도 아닐 테고.
채원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미소를 지은 적이 드물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에 걸린 감정은 미소라고 하기에는 한없이 무표정에 가까워 보였으나, 항상 곁에서 그녀를 호위하던 유령은 그녀가 이 화제에 대해서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령은 그녀가 휘두를 수 있는 칼 중에서 가장 좋은 도구임은 분명했으나, 그녀를 주군으로 섬기는 이상 그녀가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기둥은 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채원을 이 세계에 정착시켜준 것도, 채원을 살려준 것도 모두 유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준 일이니.
그에 대한 질투인지 유령은 그 흡혈귀 소녀가 주군과 적대하려고 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 소녀의목을 주군의 명령 하에 베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군이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 유령은 자신의 안에서 퍼지는 추악한 질투를 가라앉혔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가 흡혈귀 소녀를 대하는 점에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ㅡ일이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정확히는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말해야 하려나.”
여인은 서류 작업을 중단하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항상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던 여인에게 있어서 변수는 없애야 할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변수라 하여 내치기에는 현재 소녀가 되어버린 그의 가치가 그녀에게 있어 너무 컸다.
건물 아래에서 반짝이는 도심을 내려다보며 여인은 입을열었다.
“그러니까, 이 이상의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알아서 처리해.”
말이 끝나자 작게 바람이 일었다. 그대로 사라진 인기척을 신경 쓰지 않고 여인은 도심 곳곳에서 빛나는 광원 중 유독 흐리게 빛나는 하나가 어디로 향하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것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빛날지는 몰라도, 이 도시에 있는 무수한 빛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신했다.
ㅡ도중에 꺼지지만 않는다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작은 바람을 담아 입 밖으로 꺼내보았으나, 여인의 눈에는 그 무수한 빛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은 어둠 또한 눈에 들어왔다.
저 작은 어둠은 도시에 있는 빛들과 겨루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게 보였으나, 그녀의 눈에는 저 어둠이 도중에 없어지지만 않는다면, 도시에 있는 모든 빛을 잡아먹을 수 있을 잠재력이 보였다.
그리고 저 흐린 빛과 아직 작은 어둠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 또한.
무엇이 살아남을까.
혹은 무엇이 죽을까.
밤을관장하는 요소 중에서 꿈을 다스리고 있는 몽마의 피를 이은 여인은 그저 도심에 있는 빛들을 관조했다.
어차피 그 누가 살아남아도 여인의 비원은 이루어지기에.
다만, 저 빛이 미처 꽃피우기도 전에 저물어 버린다면 아주 상당히 마음이 아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필리아 아카데미. 이곳은 도시에 세워진 다른 아카데미에 비해 유독 과거를 검사하는 걸 철저히 했다.
사회에 풀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재능과 혈통이 한곳에 모여서 육성되는 공간.
과거를 철저히 검사한다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필리아 아카데미의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조건이 있기 때문에 필리아 아카데미는 꺼림칙한이미지는 있지만, 다른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지키는 헌터들을 길러낸다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ㅡ그러니 이게 밝혀진다면 그 명예는 땅으로 떨어져 버리겠지.
나는 어젯밤 문 앞에 소포에 감싸져서 혈액팩과 함께 들어있었던 허가증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아카데미나 학교에 다닌 적은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없다 보니 이 허가증이 주는 감흥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허가증에는 사진과 이름 부분이 비워져 있었는데, 그이유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 내가 채워 넣으라는 뜻일 텐데.”
증명사진은 이미 사진관에 가서 찍고 왔으나, 남은 하나가 문제였다.
이름.
이전의 이름 그대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쓸데없이 이름을 유지하려다가 괜한 관심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하는 법.
이슬기 같은 한국식 이름부터 로아니스 같은 외국식 이름이 떠오르는 가운데 나는 예전에 채원이의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처럼 가장 입에 달라붙는 이름을 선택했다.
“알리샤 그렌베리.”
이 이름을 넣어달라고 하자.
저번처럼 회사로 직접 찾아가는방식은 아무리 내가 뱀파이어의 특성으로 인해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고 하나, 자주 오고 가면 그녀를 주시하고 있을 사람들에 의해서 들킬 수밖에 없다. 아직 낮이라서 나갈 수도 없었고.
나는 태양빛이 비추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ㅡ너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해?]
라고 어제 받았던 발신인 불명의 문자에게 답신으로 방금 지은 이름과 사진 파일을 건네주었다.
문자 옆에 달려있는 1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민망한 일이라, 매일 한통씩 현관문 앞으로 오는 혈액팩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잠겨져 있는 팩을 텄다.
그것은 제대로 된 보관을 하지 않아서인지 액체보다는 물컹한 젤리 같은 느낌으로 입안에 흘러들어왔다.
맛이 없어. 채원이를 만나고 온 이후 며칠째 혈액팩을 먹고 있었지만, 입에는 잘 맞지 않았다.
반찬투정 같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피의 맛은 넘치는 쾌락을 주었던 느낌이 없이 그냥 밍밍했고.
그렇다고 잔류 마나가 남아있지 않아서, 힘이 강해지는 느낌도 없었다.
속에서 들끓는 열기만을 가라앉혀주는 게 고작.
그것도 생으로 먹는 피보다는 약해서, 1끼에 1리터나 되는 피를 빨아먹어야 했다. 아무리 비효율적인 몸뚱이라지만, 그것은 너무 과했다.
채원의 의도가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눈에 띄면 안 되니 사냥을 나가지 말고 집에서 흡혈팩이나 먹으면서 지내라는 배려인 것은 알지만, 이러면 강해지는 속도가 느려지기에 어쩔 수 없이 갈증이 났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누군가의 피를 빨고 싶다는 지독한 유혹이.
그러나 이제까지 인기척이 들키지 않는다는 종족적 특혜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냥을 나서며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들키고 다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변명거리를 하나 마련해두기 위해서.
뱀파이어 헌터들이 제일 먼저 살필 곳은 필리아 아카데미. 그중에서도 흡혈귀의 피를 이은 자들이다.
철저한 검사를 거친 그들에게 강한 의심을 품는다면, 아카데미의 조사를 믿지 못한다는 불신으로 이어질 테니 고문 같이 강압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테지만, 최소한의 변명거리를 마련해 놓아야 했다.
나는 나중에 마주할 사냥꾼과의 대화를 예상해서 허공에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ㅡ뱀파이어와의 혼혈이라도 살기 위해서라면 피를 빨아야 했을 터, 그 피를 어디에서 구했느냐.
“몬스터들을 사냥해서 구했어요.”
ㅡ그걸 어떻게 믿지?
“제가 돌아다니던 게 눈에 띄었는지 사람들이 막 은빛 유령이라고 부르더라고요.”
ㅡ그 전이나 이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피를 공급할 생각이지.
“이 이후에는 아카데미에서 보급해주는 혈액팩을 먹을 생각이고, 이 이전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한 달 전부터 나는 몬스터 사냥을 시작했고, 저 뱀파이어 사냥꾼이 수사하고 있을 사건도 한 달 전에 일어났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조금 미심쩍었을 것이다.
가상의 뱀파이어 사냥꾼은 그 침묵을 자백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기분 나쁘게 웃었다.
ㅡ그 이전에는 무엇을 했지?
그 말을 끝으로 가상 속의 사냥꾼의 말은 끊겼다. 이걸 해결하려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알리샤 그렌베리라는 인물의 가짜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도시에서 이사를 왔거나.
혹은 신분증이 발급되지도 않은 음지에서 여태껏 살았거나.
둘 중에서 무엇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무언가를 한다는 무의미한 자신감 대신 나는 언제나 날 대신해서 이런 일들을 대신 해결해주었던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며 스마트 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스마트 폰에서는 타이밍 좋게 한 차례의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왔다.
[너의 신분에 관해서는 내 부모님이랑 알던 사이라고 해둘게. 염치가 있으면 자세히 묻지는 않겠지.]
차가워 보이는 말투로 적혀진 문자였으나, 그 문자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아서 나는 잠시 그 문자에 적혀있는 내용을 음미했다.
이걸 받아들이면, 양아치 새끼다.
내가 잘못걸리면, 친구가 같이 죽어주겠다는 건데.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피를 빨아 마시며 양심 따위는 같이 내장 속으로 흘려보낸 지 오래였으므로 조금의 가책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고마워! 정말, 정말 좋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배운 화법으로 고마움을 담은 문자를 보낸 뒤에 나는 다시 방바닥에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헌터는 항상 예외에 예외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 채원이쪽에서 준비해준다고 해도 그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고려해 뱀파이어 헌터를 이길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안.
혈액팩을 보급받은 이후로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몬스터 사냥은 자제해야 하니 저녁에 사냥을 나서는 것은 금물이다.
뱀파이어 헌터와 싸울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지만, 아카데미까지 들어간 마당에 그렇다고 의심을 사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니까.
그렇다고 육체적 수련을하자니 이미 뱀파이어의 재생력으로도 한계에 도달한 온몸은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남은 것은 단 하나 – 기운을 연마한다.
내 손끝에서 검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것을 다루는 나조차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것은 헌터들이 다루는 마나도, 몬스터들이 다루는 마기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였다.
날 이렇게 만든 뱀파이어도 가지지 못했던 기운은 지금도 내 몸을 먹어치우기 위해서 하얀 백지와도 같던 손가락 끝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기에 빠르게 몸속으로 되돌렸다.
헌터로서 살아온 직감이 고한다.
이것은 한낱 생명체가 다룰 수 있을 기운이 아니다. 만약 처음부터 몸에 있는 기운을 전부 다룰 수 있었다면, 내 몸은 통째로 이 기운에게 집어삼켜졌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력이 깃든 생명체의 피를 빨 때마다 다룰 수 있는 기운의 비율이 증가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몸이 피를 마심으로서 강해져서 일지도모른다.
기운이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한도를 알고 그만큼의 양만 허락해준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이걸 잘만 활용한다면 나보다 격상의 적에게도 한 방을 먹일 수 있겠다는 헌터로서의 활용 방법.
“비장의 한수나 만들어볼까.”
목표는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익히는 것.
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운을 담아 주먹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