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너와 나의 거래
도시의 남쪽에 있는 레이나의 집과는 달리 윤채원의 집은 도시의 북쪽에 있었다. 남쪽의 부자촌은 저택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부지의 자랑했다면, 북쪽의 부유촌은 집을 세울 부지는 남쪽에 비하면 적은 대신 삼엄한 경비를 자랑했다. 허락받지 않는 손님이 온다면 그 지역을 지키는 헌터의 선에서 처리되며 설령 침입자가 들어온다고 해도 집집마다 설치되어 있는 결계가 그 집의 소유자들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렇다 보니 괴물의 몸을 한 나는 윤채원의 집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헌터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으면서도 웃으면서 어떤 한 방향을 나머지 한 손으로 가리켰다.
“아, 알리샤 크렌베리님이시군요. 안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다른 길로 갔다가는 누군가가 오해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까닥거린 후 나는 그자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뒤에서 누군가 퉷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으나 굳이 그런 유치한 행동에 대응하고 싶지는 않아 무시했다.
이곳에는 예전에 내가 살아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외부인의 출입을 허가받기 위해서는 며칠 전부터 언제 누군가가 들어올 거라고 신청을 해야만 했다. 그 외부인이 괴물의 혼혈이라면 좀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고.
즉, 이렇게 아무 탈 없이 부유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는, 누군가가 미리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허락을 받아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걸 할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ㅡ좀 있다가 올까요?ㅡ
박쥐의 형상을 한 시유가 전음으로 말하자 나는 무언의 긍정을 드러내며 정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한때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어 익숙한 형상의 주택이 있었다. 나는 그 주택의 앞에서서 숨을 골랐다.
시유의 냄새가 저 멀리 하늘로 올라가서 멈춰져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기는 부족해도 내가 위기에 처하면 바로 반응하기엔 적당한 거리. 아마 날 많이 신경 써준 것이겠지. 애초에 레이나와 채원이의 집 사이는 거리가 상당하다. 시유가 나를 업고 달리지 않았더라면 아직 회복이 안 된 체력으로는 오늘 안에 이곳까지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우우.
숨을 내쉰 다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외부인의 침입을 방지한 울타리를 넘어 현관문 앞으로 걷는다. 결계가 내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드나들 수 있도록 채원이가 등록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현관문을 열었다. 이것 역시 누군가가 올 거라고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 문은잠겨있지 않았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신발들이 집주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는 신고 있던 붉은 구두를 벗어 옆에 정리된 신발처럼 똑같이 정리한 후 곧장 2층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워커홀릭에 가까워서 사무실에서 자는 경우도 대부분이지만 그랬다면 현관문을 닫아두었겠지. 채원이가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걸 10년이 넘게 함께 지냈지만 그동안 본 적이 없으니까.
계단을 다 오르자 2층에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는지 오피스룩을 입은 그대로 채원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뒤따라갔다. 책상에 쌓인 서류와 사무실에 있던 것과 똑같은 제품의 스탠드. 거기에 놓여있는 침대만 아니라면 이곳을 사무실로 착각했을 정도로 그녀의 방은 사무실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그 방은 커튼이 쳐져 있어 달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스탠드도 켜져 있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나는 이정도의 시야에 아무 이상이 없었고 그녀 또한 서큐버스의 혼혈로서 대낮처럼 훤히 이 안이 보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는 가운데 먼저 입을 뗀 쪽은 나였다. 종이의 향기가 나의 미약한 흥분을 차분히 진정시켜주었다.
“..태양공의 딸 레이나, 일족의 보물을 짊어진 다크엘프, 수인족의 지배자 층에 속하는 호랑이 수인까지. 제대로 알아볼 생각조차 없던 내가 알아낸 게 이정도이니 더 있겠지. 그리고 이런 이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한 학년에 모일 리가 없고. 너, 아카데미에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처음부터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쓸데없이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윤채원에게 더 유리한 전장. 안부조차 묻지 않고 바로 따지듯이 물어도 윤채원은 무표정했다.
그녀는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게 끝은 아니지?”
그 셋 모두 다 특별한 피를 타고 나긴 했어도 윤채원이 왜 그녀들을 한곳에 모아두었냐고 하면 이유가 부족하다. 그렇게 해서 윤채원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떤 것 때문에 그녀들을 한곳에 모아두었는지는 어렴풋이 짐작가는 구석이 있었다.
“마왕선발전. 그것 때문이잖아.”
마왕선발전. 레이나가 그 저택의 식탁에서 갑작스럽게 말해주었던 그것은 뭔 이상한 소리냐고 대부분 걸러들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 또한 존재했다. 레이나는 검은 태양과 붉은 달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왔다.
그리고.
‘나머지 후보들은...이 도시에 오지 않는 것만으로 검은 태양이 되지 않기로 한 거니까 굳이 피곤한 너에게 더 말하지 않을게.’
이 도시는 검은 태양 후보들이 모이는 장소다. 즉, 괴물의 권력을 쥘 누군가가 탄생한다는 소리다. 그것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라면 몰려들 수밖에 없겠지.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도시에 가장 안전하게 스며드는 방식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었고.
인간들이 왜 이 소식을 모르는지 모른다. 그런 권력자들의 자식들이 입학하는데 왜 모르는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수작질부리고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도 나서지 않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윤채원이 그걸 이용해서 필리아 아카데미에 과할 정도의 전력을 모으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윤채원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자신의 옆을 툭툭 쳤다.
“거기까지 그 뱀파이어가 이야기한 거야? 정말 너를 좋아하나 보네.”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괜한 고집을 부리며 서 있기에는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공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몇 번의 단어를 삼켰을까, 마침내 완성된 문장이 그녀의 연분홍색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그 뱀파이어가 다 이야기했다면 숨겨도 소용없겠네. 맞아. 내가 그 사람들을 모았어. 그런데 왜 그랬는지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지?”
여인의 얼굴은 암막에 가려져 있었다. 내가 아무리 어둠 속을 꿰뚫어 보아도 그녀의 표정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 해답은 언제나 내가 알아서 찾아내야 한다. 마왕선발전을 레이나에게 들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말해주었으나, 그걸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 알려줘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녀의 계획이 유포될 가능성만 늘어날 뿐이지.
“그럼 누굴 왕으로 만들려는지도 비밀이야?”
나는 레이나에 대해서 마왕 후보에 대해서 들었으나 그녀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딘가 모호하면서 두루뭉술한 구석이 있었지. 하지만 윤채원이라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나에게 말해줘도 되는 부분이라면.
윤채원은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습관처럼 두드렸다. 나의 질문을 거절해서 생겨날 갈등과 질문의 답을 숨겨서 얻을 이득 중 무엇이 나은지를 고민한다. 그녀는 언제나 친분보다는 이득을 더 생각하고는 했다.
그녀는 결정했는지 손가락을 그대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누구를 왕으로 만들 계획은 있었지. 근데, 실패했어. 그 사람 죽어버렸거든. 그래서 누굴 왕으로 선정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다 하나씩은 결점이 있어서.”
“원래 누구를 왕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윤채원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홍빛 눈동자로 나를 그저 바라보았을 뿐이다. 나를 보는 건가 아니면 이건 말해줄 수 없다는 걸까.
..더 물어보았자 이런 식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 따위는 없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일어나서야 비슷해진 그녀와 나의 눈높이는 우리의 현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배려를 받아야지만 비슷해질 수 있는 처지의 우리를. 그런 관계에서 우리의 계약을 들먹이며 정보를 말할 것을 호소해봤자 들어주지 않겠지.
“이만 가려고?”
“응,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 붙잡고 시간 낭비 하긴 싫거든.”
“그래, 그러면 잘 가.”
나는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몇 개월 만에 만난 윤채원과의 대화도 끝. 그녀와는 계약관계 이전에 어느 정도의 친분 관계가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내버려 두고 용무가 끝났다는 이유로 가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손을 둔하게 만들었어도 방문 손잡이는 느리게 아래로 내려간다.
조용히 열린 방문을 넘어 복도에서 나는 윤채원을 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상태로 계속 나를 보았다.
“..왜. 가기 싫어? 좀 더 있다가 갈 거면 차라도 준비할게.”
“한 가지만 말하고 가려고. 4월 말쯤에 레이나와 만나서 한 이야기가 뭐야?”
윤채원은 침묵했다. 이 이야기도 말해줄 것이 없는 상대에게 더는 용무가 없었으므로 나 또한, 복도를 걸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었다. ...왜 그녀는 불리한 용무를 숨기려고 할까.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는데.
레이나가 중요한 용무인듯 나를 내버려 두고 사라진 다음 날부터 윤채원의 연락은 끊겼다. 그리고 윤채원이 멀쩡한 상태인데도 뱀파이어 헌터가 나를 찾아냈다. 이 도시에서 상당한 실권을 가진 윤채원이라면 뱀파이어 헌터가 나를 찾아내는 것쯤은 충분히 뒤로 미룰 수 있었을 텐데도.
마지막으로 레이나는 내가 윤채원에게 가고 있는 것을 시유를 통해서 알았음에도 막지 않았다. 이 만남 자체가 윤채원이 진작에 나를 포기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익숙하게 빨간 구두를 신었다. 포기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여전히 나는 윤채원의 도움이 필요했고, 윤채원도 날 레이나에게 팔아먹으려거든 내 존재가 필요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니 우리의 계약관계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조금은 씁쓸하네.”
나는 날갯짓하며 내려오는 박쥐 한 마리를 보며 어떤 재능 있는 소녀가 내 품 안에 떨어졌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 잘 곳이 없는데.. 혹시 너랑 같이 살아도 될까?’
많은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려도 절대 잊히지 않는 그 말은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말을 내뱉었던 소녀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애는 계약관계라 말해도 조금은 서툰 구석이 있는 애였으니까. 누군가를 버릴 줄 모르던 애였고.
마나가 일그러지는 기분과 함께 익숙한 뱀파이어의 냄새가 내 뒤에서 난다.
“나 보고 싶었지?”
익숙한 금발이 눈앞을 가린다. 허락되지 않은 자는 여기 들어오지 못할 텐데, 레이나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가 내 방문을 허락했던 것처럼 레이나의 방문 또한 허락했겠지. 그것보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조금 쉬고 싶다.
2층 어떤 방의 커튼이 젖혀지며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던 것 같았으나 이내 레이나가 쓰는 공간이동에 온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