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너와 나의 거래 (54/68)



〈 54화 〉너와 나의 거래

여인은 창문 밖에서 한 소녀가 어떤 뱀파이어와 함께 사라지는 광경을 내다보았다. 창밖을 향해 팔을 뻗으려다가도 여인은 조용히 팔을 내렸다. 팔을 뻗는 행위조차 소녀의 마음을 흔들 수 있기에 여인은 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했다. 검은 그림자가 은빛과 금빛을 삼키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거리를 여인은 내다보았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인의 옆에 나타난 자는 온몸이 흐릿해서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차라리 진실을 말해주는 편이...”


“됐어. 그 이야기는 그만둬.”


여인은 뒤로 돌아서 의자에 앉았다. 공간이동은 단순히 쓰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쓰는 것에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 아티팩트를 통해 직접 사용하지 않아도 반영구적인 손상을 육체에 줄 정도로 공간이동은 그 유용한 만큼이나 리스크가 컸다.

그 사실을 소녀도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뱀파이어가 사용한 공간이동에 아무 저항 없이 동행한 이유는 아마...

여인은 그쯤에서 생각을 중단했다. 이미 이렇게 하기로 결정된 일이다. 이제 와 소녀를 걱정해봤자  무엇도 해줄 수는 없다. 뱀파이어에게 어울리지 않는 금발의 소유자가 소녀를  대해주기를 바랄 뿐.

소녀가 사라지고 나서 한층 더 허전해진  안에서 윤채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눈을 뜰 때쯤 유령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유령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태양공]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는거라고는 자기 땅에 침입해온 자들을 권속들을 통해 처벌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 [태양공]의 존재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권속들이 모두 태양의 불꽃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권속은 주인의 허락하에 그자의 힘을 빌릴 수 있다지만, 거리가 너무 많이 떨어지면 빌리지 못한다. 정확히는 힘의 손실이 너무 커서 사용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이지만. 여인은 유령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길 필요 없이 태양공은 서양에 존재하며 여인이 추측은 잘못되었다. 그게 분명 옳겠지만 그 뱀파이어의 행동을 보아 유령이 서양까지 가서 알아 온 상황을 보나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여인은 그 미심쩍은 부분을 확인할 방법을 알고 있다. 유령을 다시 한번 서양으로 보내 어떠한 정보를 조사하면 된다. 하지만 여인은 유령에게 다시 서양으로 보내는 대신 다른 명을 내렸다.

“그건 그쯤에서 그만두고 다른 자들에 대해서 조사한  보고해봐.”


유령은  명령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대답했다.

“다크 엘프의 후계자는 중위 정령과 계약한 이후 성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사교성은 비교적 좋지 않기에 다크 엘프 말고 다른 협력자를 구하진 못할 것 같으나, 그녀의 힘에 굴복한 자들을 부하로는 받아들이고 있고요.”


“흑호의 후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료 수를 불리고 있지만 다크 엘프의 후계자와는 달리 서로간의 우애가 끈끈하더군요. 수인족만 받아들이는  아니라 다른 종족도 마음에 들면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더 성장할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뱀파이어들을 이끄는 수장의 자식은 [태양공]의 여식이두려운지 자신의 종족조차 숨긴 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마  여식이 있는  뱀파이어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단체에서 탄생한 실험체 혼혈은.. 주인님이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유령의 말은 특별한 피를 이어받은 괴물들의 정보에서 끝나지 않았다.


“리베라 아카데미의 성녀는 아직 받드는 이로서의 재능을 개화하지 못했고 [천공] 역시 재능을 개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1학년이니 시간은 많이 남아있지만, 이런 속도라면 마왕 선발전이 끝난 이후로도 각성이 늦어질지 모릅니다. ..용사가 될 자가 죽은 여파일지 모르니 무언가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사신의 선택을 받은 자는 저주가 아니라 본래의 재능을 살리기 시작했지만.. 그 사람과 엮여 있는 일이니 그자가 본래 대적자로서의 운명을 일깨울지는 확신할  없습니다. 이자 역시 조치를 취해두는 편이 미래를 위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괴물들에 대항하는 영웅이 될 자들에 대한 정보들.

“대부분의 괴물은 누가 마왕이 될지 궁금해하며 지켜보자는 입장이 대부분이나  주변에 있던 지배자들이 그 사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왕선발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최대한 주의해야 될  같습니다. 그것들은 진짜 괴물. 그들이 움직인다면 제가 대항해도, ..그 사람이 없는 현재 도시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인류를 위협하는 진짜 괴물들까지.


알고 있던 것.
모르고 있던 것.
그것들이 유령의 추측에 섞여 어울려진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정보의 바다에서 올바른 정보들을 추려냈다. 누군가의 추측이 섞인 정보는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유령은 여인의 눈이자 귀. 여인이 예지몽을 통해서 본 미래를 가장 자세하게 알고 있는 자.  험난한세계에서 여인이 믿을  있는  명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금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시간은 흐르고 여인은 눈을 뜬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는 노을빛 눈동자를 빛내며 여인은 천장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보였으나 몽마의 핏줄은 거기에 자신이 유혹할 대상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게 끝이야?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을 텐데.”


“이 도시에 은빛 유령이라 불리는 소녀가 헌터가 되어 자신과 같은 모습의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진짜를 알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자는 진짜를 찾고 있는 가짜겠죠. 왜 그런 흉내를 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실버즈]의 이단아들이 이 도시에 있던 뱀파이어 헌터의 연락을 받고 오고 있습니다. 약 한 달 뒤면  도시에 도착하겠지요. 어떻게 할까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처리합니까?”


여인의 예지몽이 틀어지고 있다. 그건 운명을 비트는 천살성의 힘이 소녀에게 남아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여인의 꿈에서 보이지 않던 뱀파이어가 개입했기 때문인가. 그렇게 뒤틀린 운명의 끝에는 어떤 흡혈귀의 죽음이보인다.

실버즈가 뱀파이어란 괴물을 잡기 위해 고용한 괴물. 뱀파이어와 사이가 안 좋으며 달빛 아래에서도 뱀파이어와 능히 맞설 수 있는 종족이 흡혈귀의 심장을 꿰뚫는 결말이.


“막지 마.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그 뱀파이어가 나설 테니.”


“저야 명령을 따를 뿐이지만 그 뱀파이어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여인은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의 저택에 쳐들어온 뱀파이어를 떠올렸다. 이 지역에 설치된 결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간단하게 들어온 뱀파이어는 여인의 소중한 연인을 약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건 말 그대로 약탈이었으나 여인은 저항하지 않았다. 왜냐면 믿었으니까.

“그 녀석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휘둘릴 녀석이 아니야.”

여인의 배신을 눈치채고 허튼 짓을 저지르면 유령이 개입하기도 전에 죽이기 위해 여인의 옆자리에 앉았던 알리샤를.

그러나 동시에 배신한 여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돌아간 알리샤의 나약함 또한, 여인은 알고 있었다.


“힘을 잃어버린  사람이 [태양공]의 여식에게 대항할  있을 거라 믿으십니까?”

알리샤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상당히 불만스러운 어투의 유령에게 여인은 조용히 속삭였다.

“이 이상은 참아줄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만 해.”


“..네.”

 말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진 유령을 느끼며 여인은 커튼을 젖혔다. 붉은 달이 구름에 가려져 미약한 빛으로나마 그녀의 몸을 적신다. 여인 안에 있는 몽마의 피가 이에 반응해 도시 전체를 감지할  있게 되었지만, 여인의 감각권에는 어떤 뱀파이어도 잡히지 않아야 했으나 그녀는 어떤 흡혈귀가 잠에 빠져있음을 느꼈다.


중요한 순간에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 반쪽자리 피라도 이럴 때만큼은 도움이 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이 잠들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

여인은 몽마의 힘을 이용해서 알리샤가 좋은 꿈을 꾸기를 소망했다. 그 뱀파이어와 함께 알리샤가 서양으로 가서 오순도순 사는 소망을 가졌다.


그래야만 알리샤는 죽고 죽이는 삶에서 벗어나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난 네가  도시를 벗어났으면 좋겠어. 그 몸으로 여기 계속 있기에는 위험할 뿐이니까.”

여인의 소망은 열려진 창문에서 들어온 새벽 공기와 함께 조용히 흐트러졌다. 그 소망의 대상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조용히.

***


“그래, 그거야.”

레이나는 자신의 약지 손가락을 입술로 깨물고 놓아주지 않는 알리샤를 보면서 웃었다. 공간이동을 겪은 대상은 몸이망가진다. 레이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부터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알리샤는 달랐다. 공간이동을 겪은 것만으로도 온몸의 뼈는 부서졌다.

일반적인 뱀파이어의 회복력을 훨씬 뛰어넘은 회복력이 그녀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복구시켰지만, 기절한 알리샤의 몸은 피를 원하며 레이나의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으나 레이나의 눈동자에는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가령 알리샤가 그녀의 피를 빨수록 점점 강해지는 불꽃이라던가.


“너랑 같이 낮에도 하고 싶은 게 참 많아.”

레이나는 나머지 한 손으로 알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리샤의 몸이 이 정도의 타격을 받은 것은 처음. 그런 만큼 알리샤는 보통 사람의 몇 배가 되는 용량의 피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 정도의 피가 빠져나가면 아무리 피가 많은 괴물이라도 빈혈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이었지만 레이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하는 동안 알리샤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뒤에 있는 시선으로부터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다는 것처럼.

그건 저번에 맺은 약속을  여인이 지켰다는 의미라.

이제는 이쪽에서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애초에 굳이 약속 같은  하지 않았어도 레이나는 알리샤를 지킬 생각이었다. 설령 이 세상에 다시  번 마왕이 탄생해서 알리샤를 노린다고 해도.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줘.”

이 아이는 태양 아래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흡혈귀가,
그녀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것이다.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되어 레이나의 입가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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