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인간의 적 (60/68)



〈 60화 〉인간의 적

클레어 알비트[Clare Albeat].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청계라는 명칭이 더 잘 알려진 그녀는, 인간으로 따지면 약관의 나이로 뱀파이어 로드와 실력으로 겨루고, 태양공과 유일하게 맞상대할 수 있는 뱀파이어였다. ‘였었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그녀의 재능을 두려워한 뱀파이어 로드의 명으로 태양공과의 결전을 강제로 치룬 이후,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청계의 뱀파이어가 힘을 발휘하는 광경을 한 번이라도 목격했었던 사람들은 그녀가 절대 죽을  없다고 여겼으나 그것도 한순간 뿐.

클레어가 사라진 이후 서양을 단숨에 점령하는 태양공의 힘을 본 자들은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괴물 중의 괴물이라 불렸던 뱀파이어 로드와 수많은 재능을 가진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클레어였기에 태양공이란 괴물로부터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고.

그렇게 청계의 뱀파이어가 죽었다는 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실상 확정이 되어가는 가운데, 사실 클레어 알비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ㅡ다만, 찬란했던 시절의 힘을 억제당하고, 태양공의 권속이 되어 살아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으로 친다면.

“그 애는 너무 사람을 부려먹어.”

이제는 누군가의 권속일 뿐인 박쥐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밤이어도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도시 안에는 누군가가 짓밟히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의 빛과 괴물의 어둠이 뒤섞이는 장소에서 누군가를 찾으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박쥐는 가장 먼저 찾아지는 둘의 모습을 확인했다.

와인을 마시며 맛을 음미하고 있는 금발의 뱀파이어와 청안을 빛내며 로브를  소녀와 같이 걸어가는 은발의 흡혈귀.

그 둘을 가장 먼저 찾아진 이유는 박쥐 내에 활발하게 박동하는 피의 이끌림도 있겠지만, 도시 내에 있는 그 누구보다 그들이 고귀한 피를 타고난 까닭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저 은발의 흡혈귀를 찾아내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지만 이번에 주인이 내린 명령은 조금 달랐기에 박쥐는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괴물의 침입을 막아내는 결계. 그건 도시가 도시답게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필수 조건이었다. 하지만 한때 결계보다 상위 속성이라 여겨지던 영역 자체를 아우르던 클레어는 사람들을 지켜야 할 결계를 수족으로 이용해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찾아내야  사람은 뱀파이어 헌터. 뱀파이어 헌터들은 언제 어디서든 뱀파이어를 사냥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제 무기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클레어로서는 찾아내기 쉬운 타입이었지만,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신성이 들어간 은제 무기의 소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집이나 교회에서는 신성력이 들어간 은제 물건을 쉽게 찾아볼  있었지만, 그렇게 무기로 가공되지 않은 물품은 흡혈귀에게 있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클레어는 금세 다음 집으로 넘어가서 그자를 찾아 헤맸으나 그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숨었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

“..어떻게 우리가 찾을 거란 걸 알고?”

미리 누군가가 알려주기라도  걸까. 클레어는 머리를 한  굴려보려고 했으나 태양공이 건 제약으로 인해 그녀의 눈동자는 깜빡거리며 잠에 한결 더 가까워질 뿐이었다. 그녀의 명을 이행할 때에는 이런 제약쯤은 풀어주어도 좋으련만, 태양공에게 융통성 같은 인간다운 모습은 바라기 어려웠기 때문에 박쥐는 생각을 멈추고 그저 하늘을 두둥실 날아다니다가 문득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30층짜리의 아파트조차 장난감같이 보일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은 고도의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기에 박쥐는 우연일  있으니 빠른 속도로 날갯짓을 했다. 클레어가 권속이 되며 많은 것들이 봉인당했어도 신체능력은 그대로였기에 박쥐의 날갯짓은 바람과도 같았으나, 땅에 붙어있는 여인의 눈동자는 그걸 그대로 좇아가고 있었다.

지상이었다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정도 할 수 있는 헌터들은 도시 내에 널리고 널렸으니. 하지만 저 멀리 떨어진 밤하늘의 박쥐를 정확하게 잡아낼  있을 정도의 동체 시력은 흔치 않았다. 그녀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서 한 번도  보던 얼굴이면 더더욱. 물론, 클레어는 요새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이 도시에 있는 강자들의 얼굴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박쥐는 자신의 시력에 ‘힘’을 집중시켰다. 검고 깊은 어둠은 박쥐의 시야를 방해하려고 해도 박쥐의 눈동자는 여인의 외양과 함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건 죽은 자였고 동시에 살아있는 자였다. 타인의 목숨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자신의 부하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모순된 존재였다.

가볍게 보았을 때 그녀는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라는, 동양적인 외모의 미인이었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본 그녀의 모습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서양적인 미인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심연을 그대로 담은,  생머리의 흑발.
클레어를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쳐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까지.

다른 부분도 분명하게 있었지만,  여인의 진짜 모습은 박쥐의 피를 머금고 있는 어떤 흡혈귀를 많이 닮아있었다.혹시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쥐와 여인이 나누는 시선 교류의 시간은 박쥐가 먼저 날개를 펄럭이며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알리샤를 닮은 모습은 확실히 박쥐의 흥미를 끌긴 했으나, 그녀에게는 주어진 의무가 있었다.

ㅡ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뱀파이어 헌터를 찾아서, 어떤 흡혈귀의 소행으로 보이게끔 만들어서 죽일 것.

박쥐가 뱀파이어 헌터를 찾기 위해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사이 그 여인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둠조차 숨을 죽일 정도로 고요한 자리를 내려다보던 박쥐는 무언가를 발견하여 도시를 향해 검은 혜성처럼 추락했다.

***

“너, 진짜 괜찮아?”

“괜찮다고 몇  말해.”

은발의 흡혈귀는 스톤 웜에 의해  팔이갈렸을 때보다  심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걱정 어린 표정의 데이지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사람들은 항상 괴물들의 침입을 걱정하기 때문에 도시 안은 크고 작은 결계들의 연속.

데이지가 주었기에 적안에서 청안으로 바뀌어버린 눈동자는 그 결계들로부터 다양한 지식들을 흡수했다. 자신이 본 결계의 발동조건, 필요한 재료, 충격으로부터 버틸 수 있는 강도, 결계의 범위 등  결계에 대한 지식은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눈동자로부터 전해지는, 정보의 과부하. 그것은 고통에 익숙한 알리샤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로 생소하고도 강렬한 느낌의 고통을 주고 있었다. 마치 시신경이 타들어가고 흡혈귀의 재생력으로 복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기분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몰랐고.

평소였다면 도시 내에서 위험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그다지 없지만, 현재 그녀들이 걷고 있는 거리는 홍등가의 뒷골목. 도시 내에서도 가장 안전에 신경써야 할 장소였기에 알리샤의 신경은 평소보다 배는 예민했다.

날카롭게 곤두선 후각은 뒷골목의 썩은 내들을 들이마시며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가 얼마나 바닥에서 방치되어 있는지 그 시일까지 알아낼 정도였고, 결계를 보면 볼수록 두통이 지끈거리도록 만드는 시각은 언제 누가 함정을 파고 습격해와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지금의 그녀는 고통에 의해 평소보다 약한 상태였으므로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ㅡ그렇기에 그녀가 습격자의 기습을 막은 것은 우연 따위가 아니라 철저한 방비 끝에 나온 성과였다.

티잉. 철과 철이 부딪혀서 나오는,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며 알리샤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청년을 보았다. 데이지는 흡혈귀의 앞으로 뛰쳐나오려고 했으나 알리샤는 손으로 제지했다. 데이지가 맞서지 않는다면 저자 역시 데이지를 노리지 않을 테니까. 저자의 정체는 저번에도 보았던 뱀파이어 헌터. 인간이 덤벼들지 않는 이상 인간을 죽일 없다. 데이지를 지키면서 싸우는 편보다는 차라리 혼자 싸우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도 했고.

청년은 고작 손톱에 맞부딪혔다고 검신에 금이 가버린 은제무기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었기에 알리샤는 상대의 모습을 관찰했다.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여 감각이 무뎌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상태가 위태로운 까닭인지 평소보다 감각이 날이 서 있는데도 상대는 기척 없이 접근했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피냄새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떤 인위적인 장치가 저 자의 냄새가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차단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이나 저격수들이나 사용할 법한 아티팩트를 걸치고지금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레이나의 품을 벗어나서 평소처럼 그녀의 권속이 호위해주지 않는 시기.
괴물을 싫어하는 김혜린이 직접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경고해주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살의를 가진 존재를 눈앞에 두고 도망갈 수도 없다. 알리샤의 푸른 동공이 고양이처럼 치켜떠진다. 흡혈귀의 온몸에 힘이 바싹 들어간다.

이 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다가는 김혜린에게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준비해서까지 자신을 노리려 한다면.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재빠르게 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밖에 없었다. 알리샤에게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기세에 데이지와 청년은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봉인구로 인해서 괴물의 기세는 억제당했다. 그러므로 현재 알리샤에게서 새어 나오는 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을 압도하는 괴물의 기세가 아니라, 그녀의 영혼에 쌓여진 살인의 업이었다. 인간이라면 실력의 고저에 상관없이 당연히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기세에, 잠시 당황했던 데이지는 다시 한 번 알리샤에게 다가갔다.

알리샤는 눈앞의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기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굳이  싸워도 돼.”

“너야말로 방해하지 말고 빠져. 저 사람은 날 노리고 온 거니까.”

“너, 너무 예민해져 있어. 괜찮아, 저 사람은 분명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갈 테니까.”


 말을 들은 청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내 손에 들린 무기에 금이 가서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가. 그건 너무나도 섣부른 판단이다.

무기로 쓰기에는 너무 무른 은이라지만 거기에 신성이 깃들면 전투에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더구나 신성과 은의 조합은 훌륭하여 웬만한 괴물에게도 통할 만큼 치명적이다. 아무 기운도 실리지 않은 흡혈귀의 손톱에 은제 단검은 반쯤 망가졌으나 청년의 외투 안에는 10개도 넘는 단검이 있었다.

무기는 충분하다.  앞의 흡혈귀는 단검을 받아친 여파로 손끝에 화상을 입었으니 소모전을 강요하면 확실히 이길 수 있다. 도망가려고 한다면 청년의 눈을 피해가지 못할 인간 소녀의 목숨을 인질로 삼으면 된다. 아무리 흡혈귀가 거칠게 말해도 저 둘은 상당히 친해 보였으니까.

모든 판단을 끝마친 청년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를 보았다.

저 소녀는 청년의 계획에 있어 유일한 변수였다.
청년이 실버즈에 들어가서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였다. 지금은  인간 중 한 명을 인질로 흡혈귀에게 싸움을 강요하고는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의 다짐은 잊지 않았다.

ㅡ사람을 위해서 이 목숨 바치겠다고.

인간 소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봉인구처럼 보이는 장갑을 벗었다. 괴물에게 홀려 나와 싸울 생각인가. 그건 섣부른 게 아니라 멍청한 판단이다. 청년은 외투 안에 있는 단도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괴물을 경계해야 할 내가 왜  소녀의 보라색 눈동자만을 쳐다보고 있는 거지.

“왜냐면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는 우리를 누가 습격할 리가 없잖아. 아마 우리를 죽이고 무언가를 뺏어가려는 불한당이겠지.”

마력적 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주가 일어날 때 생겨나는 불길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낌새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청년은 저 소녀의 말에 반론하고 싶어도 반론하지 못했다.

흡혈귀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누군가가 아직도 계속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니 저 흡혈귀를 그냥 죽여 버리는 것으로 이 학살을 막아야 한다느니. 흡혈귀 또한, 15명도 넘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은 것으로확인되어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느니.

많은 반론이 준비되어 있어도 반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몸의 제어권을 빼앗아서 생기는 기분 나쁜 감각. 흡혈귀의 소행인가 확인하고 싶어도 청년의 눈동자는 인간 소녀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떨어진다.

무력의 강함과는 상관없이 청년은 누군가에 의해서 자신의 몸이 지배당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마 그 대상은 흡혈귀가 아니라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 기습도 막혔는데 계속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저 사람도 그냥 뒤돌아서 도망치지 않을까?”

데이지의 말대로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청년의 모습에 알리샤는 흥이 식은 듯이 손톱을 집어넣었다. 고작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습격한다고 냄새 같은 것을 차단하는 아티팩트까지 쓴다라... 조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저 청년이 도망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데이지의 말이 옳아 보였다.

그때 보았던 뱀파이어 헌터 같았는데 말이지.. 아니었나.

흡혈귀의 눈동자는 한순간 붉어졌다가 다시 푸르게 변했다. 데이지는  색의 변화를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장갑을 끼었다.

“네 말대로라면 장갑은   거야?”

“혹시 모르잖아. 내 말이 틀렸을 수 있으니 대비한 거지.”

“그러냐.”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에 알리샤는 데이지의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결국 김혜린의 말대로 소란을 피우지 않고 뒷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이 몸으로는 김혜린을 이길 수 없으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은발의 흡혈귀는 어느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데이지의 온기를 느꼈다. 봉인구를 차고 있어도  따스한 손은 분명 사람다운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흡혈귀가 가질 수 없는 온기를.

혹은 차가운 피를 가진 흡혈귀만 느낄  있는 온기를.

***

ㅡ아하, 누가 먼저 죽여버려서 못 찾은 거였구나.

길가에 쓰러진 청년의 시체 위에 박쥐  마리가 안착한다. 목과 몸통을 분리시킨 일격의 흔적을 보고 있자니 사인은 확실하다. 청년은저 바닥에 떨어져 있는단검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굳이 길거리에 나와서 자살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궁금증이 일어난 박쥐는 푸른 머리의 소녀로 변했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허공에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아야 했으나 소녀의 손에는 푸른 실타래 같은 것들이 만져졌다. 기본적으로 푸른 소녀의 능력은 결계를 보는 것이지만 응용을 하면 자신이 소유한 결계 안에서 벌어진 일을 읽어낼 수도 있었다.

도시의 결계는 푸른 소녀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주 잠깐이라면 이 도시의 결계사들에게서 소유권을 빼앗을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읽어낸 소녀는  차례 손을 털어 푸른 실타래를 없앴다. 주인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흡혈귀가죽인 것으로 위장하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청년의 사인은 누가 보아도 자살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졸리네.”

푸른 소녀는 눈동자를 매우 빠르게 깜빡이며 졸음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저주는 한낱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박쥐의 몸으로 변신한 클레어는 졸음비행을 시도하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 그곳에는 목과 몸통이 분리된 청년  명과 박쥐 한 마리가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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