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에피소드 4 - 이름을 알리는 건 중요하다 (2)
스티븐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아직 대외적으론 나와 테오 아리스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럴 만 했다.
"휘유, 우리 아리스 영식이 미리 점찍어두신 거였습니까?"
"그 쪽은 케이가의 차남이었던가. 미안한데 우리 후작님께서 제자로 점찍어 둔 아이라서 말이야."
등신같은 모습이 온데간데 없는 테오의 모습에 난 속으로 무언가 감정이 올라왔다.
드디어 내가 이 새끼를 사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에서 였다.
사실, 이 쪽이 본래의 성격이긴 하지만.
"칼 쓰는 솜씨로 봐선 마법사 계열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스티븐과 테오의 시선이 마주치자, 스파크가 튀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 난 한숨을 내쉬고 테오에게 말하였다.
"저 새끼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자."
"기다려 봐. 저런 놈은 한 번......."
순간 내게 명령하려는 테오를 살벌한 시선으로 보자그는 "알았어."라고 말하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기 전 난 시간의 힘으로 단검을 한 자루 만들어내 스티븐의 머리 바로 옆으로 던졌다.
그러자 스티븐은깜짝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너, 다음에 니 멋대로 내 몸에 손 대면 죽여버린다."
내가 저 녀석을 베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단지 스티븐이 내게 한 행동이 상당히 무례해도, 적으로 인식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다면, 적으로 인식하겠다는 내 나름의 경고였다.
[ 스킬 - 시간의 흐름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
[ 재사용 대기 시간이 반환됩니다. ]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내 옆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테오의 난입 때문에 까먹고 있던 스킬의 시전이 알아서 취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건 이자식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 같았다.
"야, 고맙다."
"뭘?"
"그냥 그런 게 있어."
내 말을 듣고 그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나와 테오는 행사가 진행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스티븐이 뭔가 말하려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오와 나만의 시간을 빼고 모든 걸 멈췄기에 우린 듣지 못했다.
* * *
입단식은 정말로 원작 서술처럼 말이 입단식이지, 그냥 연회였다.
내가 한 거라곤 그저 단순히 본시험 상위차순 합격자로써의 예우를 받고, 필요하지도 않았던 검 한자루를 허리에 차는 일이었다.
나름 이름이 알려졌었던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무명인 내가 상위 순위라는 것에 놀란 이들이 제법 되었긴 하지만.
한창 연회가 벌어지는 곳을 빠져나와 조용한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난 원래부터 저런 시끌벅적 한 것 보단 이런 조용한 곳을 좋아했다.
가끔씩, 사람들의 얼굴에서 내가 죽인 이들의 얼굴이 겹쳐 보일때가 있어서였다.
'이런 연회는 왜 하는 건지 원.......'
지금 연회장에는 다른 가문의 귀족들도 여럿 와서 자기들끼리 먹고 떠들고 춤추는 등 논다고 정신이 없었다.
개중엔 서로 눈이 맞은 녀석끼리 바깥에 나가는 것도 몇몇봤었고.
그나마 이 가문에서 조금 안면을 튼 레니는, 하녀가 아닌 아슈칼론 영애로써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즉, 지금의 난 혼자 정원에 앉아 차가운 밤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물론 혼자 있는 게 더좋은 나로썬 오히려 이 편이 더 좋았지만.
아무튼, 혼자 있는다는 사실 자체는 지금 중요한게 아니었다.
스마트폰에서 울린 진동으로, 까먹고 있던 에피소드가 떠올라 폰을 켜봤더니 처음 보는 메시지들이 떠 있었으니까.
['서브 에피소드 - 이름을 알리는 건 중요하다'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
[ 서브 에피소드 - 이름을 알리는 건 중요하다.
입단식을 겸한 즐거운 연회! 이곳에는 현재 사람이 매우 많으면서도, 경비는 좀 허술해진 상태입니다.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기고 그 중 테오 아리스의 목숨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는데, 그로부터 테오를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요?
성공 조건 : 입단식 참여 (완료), 메인 타겟 처치 (0/1)
성공 보상 : 아리스 가문 내에서의 평판 상승
실패 패널티 : 에피소드 난이도 대폭 상승, 등장인물 '테오 아리스'의 죽음 ]
본래라면 내가 입단식에 참여해 간단한 예우를 받는 동안 서브 에피소드는 클리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전개를 원작과는 제법 다르게 비틀었기에 에피소드가 변한 전개에 반응한 것 같았다.
원작에선 입단식 이후, 사람들이 빠져나가 다시 원래의 일상을 찾으려는 찰나에 사건이 터진다.
원작 전개에 따르면,아직 망나니로 살던 테오 아리스가 이 입단식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테오를 암살 하려던 놈은 자연스레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 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입단식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 사건의 발생시점이 앞당겨진 것이었다.
테오 아리스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이 빨라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즉,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우리의 망할 주인공을 암살하려는 자식은 연회 참가자 사이에 숨어 있을 것이고, 지금도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
몸을 일으켜 재빨리 연회장쪽으로 향하자 테오는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무튼 너 다시 검 잡는 줄 알았는데, 역시 그건 아닌가보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난 언제든 달려갈 수 있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위치에서 조용히 놈이 누군지 찾기 시작했다.
회시법에서 나왔던 묘사대로 조심스레 술이 담긴 술잔을 들고 마시는 체 하면서.
그렇게 이번 에피소드는 좀 쉽게 가나 싶었다.
어딜 가든지, 뭘 입든지간에 빛날 것 같은 이 빌어먹을 외모만 아니었더라면.
"여기서 뵙는군요, 레이디 세린."
곁에서 들려온 때리고 싶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웬 귀공자 같은 녀석이 날 보며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싶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정중히 말해왔다.
"혹시, 마음에 두신 상대가 없으시다면 저와 같이 한 곡 추시겠습니까?"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출 생각 없으니까 다른 여자 찾아보세요."
"흐음. 이 좋은 날에 어찌......."
"아, 씨발. 그냥 꺼지라고."
세느까지 꺼내 든 내 위협에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한숨을 내쉬고, 시간의 힘으로 세느에 맞는 검집을 만들어 허리에 찼다.
평소라면 이렇게 까지 하진 않겠지만, 뇌가 거시기에 달린 새끼들이 많은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야."
걸음을 옮겨 테오의 곁으로 향하였다.
괜히 저런 놈들에게 시달릴바에, 공작의 아들인 테오의 옆에붙어 그의 신분을 잠시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응? 어디 다른 데 간 줄 알았는데."
"됐고, 너 리드할 줄 아냐?"
내 말에 테오를 비롯한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눈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회에서 춤을 출 때 여성은 남성측에서 먼저 신청을 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런 거지같은 예법이 있는 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경우는 상당히 의례적인 일이란 건 분명했다.
"너, 설마......."
"맞을래?"
"미, 미안."
보통, 사람 하나를 암살하려면 최소한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암살 대상을 따라다닌다.
여기, 이 세상도 사람사는곳을 배경으로 한 만큼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농후했다.
하지만 아직 그 암살자가 누군지를 특정 해낼 수는없어서, 장소를 좀 옮겨 볼 생각이었다.
"그런 거 아니고, 아예 안 추거나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라 그러더라고."
"흐음, 그렇긴 하지."
"그럼, 가실까요?"
내게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테오를 보며, 무언가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얘가 그 동안 내가 알고 잇던 그 등신같은 테오 아리스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무튼 손을 잡고 연회장의 중앙으로 향하자, 이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테오가 쌓아 온 이미지 때문인지, 이번에는 기사 상대로 그러냐는 등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내가 시선을 쓱 주며 허리춤에 찬 세느를 톡톡 치자 이내 조용해졌지만.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이미 테오는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여러 여자를 데리고 놀아나면서 들었다는 건가 싶었다.
먼저번에 메이나가 테오보고 순수하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역시 개소리가 틀림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몇 번째냐?"
"뭐가."
"개망나니처럼 살던 시절에 몇 명이나데리고 놀았냐고."
장난식으로 묻자 테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겠냐, 이게 니 업보인 것을.
하지만, 앞으로 제이드는 그에게 검을 잡을 것을 강요치 않을 테니 등신처럼 안 살아도 될 터.
"뭐, 지금 부터 안 그러면 되지."
"시작하니까 스탭 안 꼬이게 집중해라."
테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하지만, 생각처럼 누가 암살자인지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생각과는 달리, 아리스 가문의 유일한 적통 남성이라는 그의 위치상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많인 이목이 쏠리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테오에게 몸을 맡겼고, 그는 초보자인 나도 숙련자처럼 출 수 있게 엄청난 실력을 보이며 날 리딩했다.
그렇게 한 곡이 끝났고,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연회장의 중심에서 빠져나오는데 테오가 내 손목을 잡았다.
"더 안 하게?"
"어."
발걸음을 옮겨 연회장의 중앙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테오가 날 쫓아와 내 어깨를 잡으며 날 세웠다.
"혹시 뭐 맘에 안 들었어?"
"아...... 그런 건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행동을 좀 오해하게 한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오히려 방금 춤 출 때 테오가 날 엄청 신경 써 준건 상대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워 해야 할 일이었다.
"정말이야."
"그럼 왜......?"
오늘 누가 널 암살하려고 해서, 그게 누군지 좀 알아내려고.
이걸 말 하면 그가 믿을까 싶었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제국 최강의 무력을 지닌 아리스 가문의 후계를 암살한다는 것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내 말에 그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에 도착해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털썩 앉혔다.
그런데 내가 앉은 벤치를 보며 테오가 잠시 멈칫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내 테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연스레 내 옆에 앉았다.
평범한 독자였던 내가, 작품의 서브 주인공이 되고 메인 주인공이던 이 녀석과 나란히 앉아 있으려나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저 녀석은 알까?
자신이 사실은 어떤 소설 속의 등장 인물일 뿐이었다는 것을.
"세린."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무언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나지막히 말을 꺼내었다.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네가 누군지, 물어봐도 돼?"
그의 말에 무언가 마음 한 켠에 파문이 일었다.
단순히 소설 속의, 회시법의 메인 주인공인줄로만 알았던 테오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세린으로서의 내가 궁금한 걸까, 아니면 수현으로서 내가 궁금한 걸까.
"내가, 누구냐고?"
"어.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처음 만났을 때 넌 그저 단순히 내 악명만을 듣고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었거든?"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귀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저 이 상황을 현실이 아닌 소설로 받아 들이고, 전개니 뭐니 하던 내가 테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 그 깡패놈들에게서 날 구하겠답시고 그 위험한 곳으로 뛰어드는 것과, 제 정신이 아닌 날 구하겠다고 부러 내 칼에 찔려준 것 까지."
사실 지금까지의 내 행적은 단순히 에피소드를 깨기 위해 필요한 일들만 했을 뿐이었다.
아리스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과 더불어, 테오의 갱생도 언제가 되었든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 작업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 테오와 붙어있는 것도 앞으로의 전개에 꼭 필요한 그가 지금 죽는 걸 막기 위해 그런 것이었으니까.
"네가 날 좋아해서 그랬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아무튼 그래서 궁금하다는 거야. 너는, 아니 세린이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세린이 누구냐랴.......
난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고민했다.
그리고 난 답을 금방 찾아냈다.
"왜?"
갑자기 내게 몸을 일으킨 내게 테오가 물어왔다.
푸스스 들리는 소리.
그건 분명 이쪽으로 누군가 접근하는 소리였다.
난 조용히 세느를 뽑으며 테오에게 답해주었다.
"정말, 이리 진하게 살기를 내뿜으니 모를 수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