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에피소드 10 - 아리스의 성좌
이 세계에서, 진실된 날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한 외로움은 상당히 오래 지속 됐다.
방으로 돌아온 난 침대위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대신 잠들기 직전 까지 괴로운 감정에 시달려 있던 탓일까?
정말로오랜만에 난 어떠한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이룰수가 있었다.
내겐 지옥같은 과거와현재, 그리고 날 힘들게 하는 미래.
그 어느것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던 상태로.
[ ???이 스킬 시간의 자아에 사용되는 시간의 힘을 대신 지불하는 대신, 원하는 대로 스킬을 사용합니다. ]
[ 스킬 - 시간의 자아가 당신의 감정을 잠재우고, 의식을 완전히 차단시킵니다. ]
* * *
".......린!"
그렇게 의식이 얼마나 심연에 빠져있었을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조그마한 자극은 심연에 빠져있던 내 의식을 끌어 올렸고, 눈을 스르르 뜨자 레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레아나......?"
"세린,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 왜?"
"아니, 옷도 그렇게 입고 자고 있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난 내 옷을 내려다 보았다.
나갈때 입는 코트는 물론, 내게 지급된 방호구들을 걸친채로 잠든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바탕 하면서도 씻지 않아 몸은 굉장히 찝찝했고.
'시간 역행.'
[ 스킬 - 시간 역행의 남은 사용 횟수가 없습니다. ]
[현재 스킬 - 시간 역행은 충전 대기 시간입니다. ]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되돌려 몸을 깨끗하게 하려 했지만, 뜨는 메시지 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일으킨 다음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하였다.
옷들을 벗고 거울 앞에 서자 수심에 잠긴 세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내쉬는 한숨애 따라, 거울 속 여성의 입술이 같이 달싹였다.
난 그 모슴을 하며,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을 떠올렸다.
결국, 내가 제일 하기 싫었던 그 방법으로,원작의 전개대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서브 주인공인 동시에, 메인 히로인 답게 남자 주인공인 테오와 엮여야만 하겠다고.
그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어쩔 수 없네.'
스마트폰을 봐야겠다고 생각하자 이내 내 손에는 익히 익숙한 폰 하나가 생겨났다.
폰의 화면을 켜서 곧장 회시법을 열람한 난 관련 내용을 찾기 위해 회시법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독자였던지라, 세린이 테오를 처음 유혹하던 장면은 별로 주의깊게 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하아......."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난 점점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단 남자를 유혹하는 건 둘째치고, 대사들이 하나같이 영.......
"제겐 도련님밖에 없어요 라니........."
사실 이 당시의 세린은 아직 정신이 그나마 멀쩡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가면 갈 수록 정신이 무너지는 세린은 그런 감정도 없어 질 테고, 오직 테오에 대한 맹목적인 감정이 남는다.
'나, 너 없으면 죽어. 너도 같이.'같은 말을 정신병자처럼 하는 것 보다야......
'별로 도움 되는 내용은 없네.'
아무튼 회시법을 뒤져보고 난 후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내린 결론은 저것이었다.
등장인물 세린 아리스와, 지금 이 몸을 쓰고 있는 난 본질적으로 그 속은 다른 인물이었기에 이것 만큼은 어떻게 회시법의 내용을 차용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건 내가 알아서 온전히 헤쳐나가야 하는 에피소드인 것이었다.
'그나마 이럴 땐 외모라도 좋아서 다행이려나.'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 따위 생각을 하며 마저 몸을 씻고 나오자, 바깥에선 레아나가 새 옷들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내 취향에는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그래도 치마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안도하며 레아나가 준 옷들을 걸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몸을 덮은 새하얀 블라우스와, 통이 넓은 검은 바지라는 흔한 조합이긴 해도.
"근데 레아나, 오늘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별 일은 없는데."
"그럼 왜 아침부터 날......."
"후작 각하께서 너 데려 오라던데?"
그 여자가?
어차피 이따가 마법 배우러 갈 건데 굳이 이 아침부터?
"되도록이면 일찍 데려오래서......."
뭔가 가슴속으로 불길함이 스쳐 가서 그런지, 어느새 내 손은 각반등의 방어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레아나가 "아, 방어구 같은 건 차고오지 마래."라고 말해왔다.
"기사에게?"
"응."
"저런 보호구 걸치지 마라고?"
"응."
"진심?"
"......그렇다니까."
도대체 무슨 의도인 걸까.
속으로 잠시 궁금해 하면서도, 일단 레아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직 내겐 시간의 힘으로 쓸 수 있는 이동기가 없기에 제법 많이 걸어서야 메이나의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왔어요."
간단하게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메이나와 마인트가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왔다는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말야. 솔직히 이사벨보단 세린쪽이 더가능성 있다고 생각해."
"흐음, 그렇다고 해도 과연 테오가 가문의 차이를 무시할까요?"
"세린 정도면 솔직히 그래도 되.......우악!"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대화를 하는 둘을 보며, 속에서 절로 한숨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 메이나는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아,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도대체 저와 이사벨 가지고 뭔 얘기를 하고 있던 거세요?"
"아, 그게 이번 마법학부 입학 수석은 누가 될까 하고."
"아니, 학부장님. 그게 아니......"
"닥쳐라."
말 한마디로 마인트의 입을 틀어막은 메이나는 내 몸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선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여자가 무슨 의도일까?
잠시 고민하던 난 손목이 끌리는 느낌을 받고선 생각을 멈추었다.
"좋아, 말한 대로 아무 것도 안 차고 왔네."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거에요?"
"따라 와 보면 알아."
메이나의 미소와 함께 발 밑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목적지로 삼은 곳은, 아리스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여성용 의복이 쫙 걸려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드레스 룸이었다.
커튼 바깥에 있는, 걸려있는 여러 의상들이 여기가 어떤 성격의 방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마인트는 음, 저기 앉아서 쉬고 있으면 되겠다."
"......저 바쁜데요."
"뭐가. 어차피 지금 방학 기간이라 딱히 일도 없잖아?"
을의 입장인 마인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마음 속으로 건네며 난 메이나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각종 휘황찬란한 드레스들은 물론 각종 여성용 갑주와 입에 담기 민망한 옷들도 제법 있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치마만 있는 것들이 아닌 바지 같은 것들도 제법 눈에 띄었고.
근데 왜 하필 여기로 데려 온 거지?
다행히 답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어때? 옷 진짜 많지?"
"그건 알겠는데, 저는 왜 데려 온 거에요?"
"글쎄. 제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스승으로써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메이나의 그 말을 들은 난 잠시동안 명치를 맞은 것 마냥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 내가 테오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가?
그럼 저 도와준다는 의미가......
"응? 아니야?"
왠지 해명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긴 했지만, 아무튼 상황은 내 쪽으로 좋게 돌아가고 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메이나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옷 사이로 슬며시 들어갔다.
"흐음, 우리 세린이에겐 어떤 옷이 예쁘려나."
......날 불안하게 만드는 저 중얼거림과 함께.
솔직히 지금 입은 옷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이거 어때?"
그러고 메이나가 가지고 나온 옷은 슬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냥 속옷같은 물건을 들고 나왔다.
속으로 뭔가 열기가 올라오는 느꼈지만 일단은 꾸욱 참으면서 그건 조금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이거 입고 네 몸으로 테오에게 들러 붙으면 완전 그냥 직빵일걸? 한 번 내 말 믿어봐."
이런 씨발 진짜.
속으론 욕을 뱉지만 난 씩 웃었다.
그러면서 손에 세느를 꺼내들자, 메이나는 "그건 넣어주라."라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아무튼 진짜......"
난 대충 무슨 옷이 있나 직접 둘러보기 시작했다.
메이나나, 레아나에게 맡겼다간 일이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 목적은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 게 아닌, 남자가 보기에 가지고 싶은 여자가 되어야만 했으니까.
방금 메이나가 준 옷을 입고 들이대면 하룻밤이야 금방 따 낼순 있겠지만, 그래서는 결국 결말은 나의 강제회귀가 되겠지.
그것만은 죽기보다 싫었다.
'테오의 포인트는, 강함 사이의 숨겨진 약함이었던가.'
실제로 회시법 상에서, 테오가 로웰 백작가라는 거물을 무시하고 세린과의 결혼을 택했던 이유는 원작의 세린이 가졌던 약한 구석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전투력쪽으로, 중후반에는 정신력 쪽으로.
왜냐면 이 당시까지의 테오는 어머니의 편린을 자신의 배우자에게서 찾고자 했었기에 그랬다.
당시에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테오는, 그걸 자기 여자를 지키고자 하는 걸로 풀어내고자 하는 심리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으니까.
아무튼 누가 보면 사람의 심리를 그딴 식으로 이용하려는 쓰레기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리 시간의 자아가 날 이런 생각을 해도 아무렇지 않도록 한창 돕고 있는 중이었다.
[ 스킬 - 시간의 자아가 활성화 중입니다. ]
그렇게 앞으로 어떻게해야 할 지 생각하며 드레스룸을 거닐던 도중, 난 뭔가 눈에 띄는 옷을 발견했다.
갈색빛의 마이 같은 빛깔을 한 외투가.
'이게 뭐지?'
무언가 내가 아는 듯한 익숙한 옷감에 그 옷을 꺼내본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 스킬 - 시간의 자아가 당신의 정신 동요를 막지 못합니다. ]
가슴팍에 박혀있는 화윤이란 두 글자.
그리고 목덜미에 붙은 익숙한 교복 브랜드.
마지막으로 자수로 새겨져 있는, 유은혜라는 이름 세 글자.
안에 있는 익숙한 가디건과 블라우스, 넥타이의 모양까지.
이건 내가 아는 디자인의옷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잊을 수 없는 옷이다.'가 맞을 것이다.
'어째서, 이 교복이 여기에.......'
그 교복은 내가 어린 아이였던 시절, 부모도 없이 납치되었던 날 보살펴 주었던.......
그 사람이 입던 옷이였다.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었지만.
"세린! 어딨어?!"
하지만 기억 속에 잠길 시간이 없다는 걸 알려오듯, 날 찾는 메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리스 가의 사람 중, 혹시 이 옷의 주인과 관련된 이가 있지 않을까하고.
아마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곧 나처럼 현실세계에서 회시법의 세계로 빙의된 사람일 터.
'일단 그게 누군지 알 때 까지 이 옷에 대해 아는 걸 들켜선 안 된다.'
생각을 마치고 일단 그 교복은 원래 걸려있던 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러고 자리를 살짝 옮겨 옷을 뒤적거리는 척을 하는 순간, 메이나의 목소리가 저 편에서 들려왔다.
"뭐야, 여기 있었어?"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쳐간 걸 잡아낸 나는 화윤고의 교복이 누구랑 연관이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당장 물어 보기엔, 아직 내 위치가 그 정도로 확고한 건 아닌지라......
덕분에 속으로 묻어두어야만 했다.
"그냥 제가 직접 찾을까 하고요."
"그래? 하긴 너도 취향이란 게 있을 테니....... 그래도 이거 입어 볼래?"
"다행히 아까 것 보단 정상적이네요."
작금의 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시간의 자아의 도움을 받아 시답잖은 연기를 하면서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