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에피소드 10 - 아리스의 성좌 (4)
그 메시지가 뜨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 힘이 세린의 몸을 통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겉 모습은 자신이 아는 그 여자애가 맞았지만,지금 그녀의 몸 안에 든 것은 세린이 아니란 소리였다.
[왜 나를 보고자 하는것이냐. 화신이여.]
"너지? 이 애를 이 꼴로 만든 게."
메이나 아리스는 세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남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를 갈았다.
지금 저 안에 든 것은 자신의 제일 친한 친우였던 에르샤를 파멸로 이끌어넣은 장본인인 그녀의 배후성.
성좌, 시간의 자유였기 때문이었다.
"또 에르샤 때 처럼 그딴 식으로 세린과 강제로 배후 계약을 맺고, 네 맘에 들지 않으면 세린을 마족들에게 팔아 넘기려고?"
[팔아 넘기다니, 말을 가려서......]
"닥쳐. 너 같은 새끼한테는 얘 절대로 못 넘겨 주니까."
그러자 세린의 몸에서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힘이 커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은, 저 빌어먹을 성좌 새끼가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화신 에르샤의 몸에 현현해 있던 상태로 내게 봉인당해, 격의 상당한 일부를 소실당한 주제, 무엄?"
메이나는 들고 온 단검을 꺼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세린의 머리맡에 칼을 가져다대자, 그녀의머리맡에 은빛 실이 생성 됐다.
"경고하는 데, 앞으로 세린에게 들러붙지마. 그땐 너랑 나랑 둘이 같이 뒈지는 거야."
메이나가 위협적으로 하는 말이 끝난 순간, 연결되어 있던 은빛 실이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 성좌, '이지의 탐구자'가 시간이 다 됐다고 합니다. ]
그 개새끼가 세린의 시간의 잠시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아직 조금 더 해야 할 말이 남았지만, 어차피 가장 중요한 뜻은 전해놨으니 상관 없었다.
[ 성좌, '이지의 탐구자'가 조금 쉬어야겠다고 합니다. ]
그 메시지를 보며 메이나는 방에 걸어둔 마법을 해제함과 동시에 위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이지의 탐구자는 절대 약한 성좌가 아니다.
오히려 강하면 강한 축에 드는 성좌였지.
그런 그가 쉬어야겠다고 말 할 정도로, 시간의 자유를 불러내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배후성은 일개 화신인 메이나를 위해 엄청난 무리를 한 것이었다.
'이지의 탐구자'가 뭘 했는지 아는 메이나는 눈을 감고 더 이상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은 자신의 배후성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
꿈을 꾸었다.
늘 꾸던 김수현 시절에 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악몽이 아닌, 처음 보는 풍경의.
회시법에 있던 세린의 마지막 회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가는 영상처럼.
그리고 지금은 내가 욕하게 만들었떤 회시법의 완결부를 장식한 마지막 부분이었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베이지빛 롱코트를 걸친 한 여인은, 보랏빛으로 물든 대지에서앞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가슴에 엄청난 상흔을 남아있는채로 쓰러져 있던, 적갈빛 머리칼의 남성이 있었다.
"테오."
그 남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여인이 그렇게 말하였다.
난 이 장면이 어떤 순간인지 알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세린은.......
아마 자신의 목을 찌르겠지.
"난, 언제까지 네 죽음을 봐야 해?"
"이번 회차에서는 다 같이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어."
"하다못해 테오 너라도."
"벌써 천번째야."
"내가 이 빌어먹을 회귀를 반복한 게."
고저 없는, 하지만 절망만이 담긴 목소리가 나직히 울려 퍼졌다.
수많은 회귀 속에서, 죽어버린 이들을 보며 겪은 그녀의 부정적인 온갖 감정이 담긴.
"테오야, 너는 이번 회차에서 있던 일들을 기억해내지 못하겠지."
내 친한 친구였던 이사벨이 죽는 걸 본 것을.
내가 너무 늦은 나머지, 메이나가 마족들 사이에서 끔찍하게 찢겨 죽는 것을.
늘 내 곁을 보좌하던 레아나가 마기에 감염되 되돌릴 수 없게 된 상황까지 도래해, 그녀를 내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것을.
그리고, 모든 회차에서 좋아하던 네가 지금처럼 싸늘한 시신으로 식어가는 걸 본 것을.
"나도, 이젠 힘드네."
원작의 세린이 회귀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끝을 선택하는 장면을 보며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어딘가에 붙박힌 듯 세린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봐야만 했고, 그녀의 몸이 테오의 위에 쓰러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원작의 마지막을 보았던 대로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시간의 힘이 흘러나오며 시간이 되돌려 지는 것 까지.
내 꿈은 낙엽이 가득한 곳에서, 누더기를 걸친 채로 조용히 눈을 감은 세린이 누워있는 모습을 본 것으로 끝이났다.
진짜 눈을 뜨기 전 느껴지는 것은 북부에 있는 아리스 영지의 한기가 한층 누그러진 공기가 느껴졌다.
스르르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깔끔하게 관리 되어 있는 내 방이었다.
'스마트폰.'
눈을 뜨자마자,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비록 이 곳이 통신망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있었다.
[ 에피소드 3 - 화려한 데뷔 ]
[ 남은 제한 시간 : 26일 8시간 55분 42초 ]
그래도 아직 남은 시간이 제법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 밖을 보자, 평화로운 성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터지진 않았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지런히 정리된 내 제복을 보았다.
'그나저나 이거 이사벨한테 약속을 못 지키게 됐네.'
아직도 성에 머무르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겨울용이 아닌, 좀 얇아진 옷을 걸치고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근데 어떻게 지나다니는 사용인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어? 세린 아가씨......?"
이름은 맞긴 한데, 세린 아가씨?
뭔가 호칭이 이상한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사용인이 날 보고 어버버하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 가문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건 아니기에 당연하겠지만.
"누구?"
"아, 그, 얼마전에 새로 들어온 하녀인데요......."
하녀의 눈에는 무언가 고양감 비슷한 감정이 차 있었다.
내가 뭘 했길래 날 저런 시선으로 보는지 약간은 궁금해졌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저게 아닌지라 일단은 무시했다.
잠들어 있는 동안, 혹시라도 뒤진 사람은 있는지 등의 현재 정보가 필요했다.
테오나 메이나 같은 강자가 그 사이에 뒤졌을리는 없지만서도.
"테오 아리스 어딨냐."
"네? 도, 도련님이요?"
"어."
"그, 저도 잘......."
역시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입인가?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난 시간의 힘을 끌어올리다, 무언가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 안에 있는 시간의 힘이,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과는 조금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강고해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일이지?'
아무래도 내가 정신을 잃은 후에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내 성장은 내가 잘 아는 법이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성장이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필히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성장일 터였다.
[ 스킬 - 시간의 자아를 발동합니다. ]
그러자 과거의 시간대가 눈에 스치기 시작했다.
테오가 내 방에서 날 간호하던 장면들과, 메이나와 레아나, 그 외의 사람들이 가끔씩 다녀가는 장면들 내 시야에 겹쳐 지나갔다.
역순으로 감겨지는 영상을 보는 것 처럼.
사실 스킬 하나를 끈다고, 별 짓을 다 해도 쉽게 늘어나지 않던 힘이 많이 늘어날 리가 없었으니.....
그렇게 과거를 보려던시점이었다.
메이나가 공간 결계를 치는 순간, 갑자기 과거의 영상이 팟 하고 꺼지더니 내 시야는 완연한 현실로 되돌아 왔다.
'무슨?'
갑자기 꺼진 스킬에 살짝 당황하는 사이, 눈앞에는 모랫빛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중요한 걸 먼저 봐. ]
......그러고 보니, 놈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긴 건 내가 시간의 자아 스킬을 해제 했기 때문이었지.
근데 중요한 걸 먼저 보라니,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 바보. ]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이내 다시 모랫빛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 새끼가 진짜.......
그 순간,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떠올랐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난 내가 정신을 잃었던동안 떠올랐던 메시지 로그를 모조리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너........"
그 중, 한 메시지를 읽고 난 뭔갈 노려보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시간의 자유라는, 웬 빌어 처 먹을 놈이 내 허락 없이 내 몸에 들어왔다고?
"이 새끼지? 내 몸 주도권 빼앗으려고한 게."
[ 진정해. 시간의 자아가 말합니다. ]
[ 네가 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
"내가 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잠깐동안의 침묵.
하지만 난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뒈지기 싫으면 일단은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 시간의 자유는 지고한 성좌야. 시간의 자아가 한숨을 뱉는다. ]
"성좌? 이건 또 무슨."
난 시간의 자아의 메시지에 당황하듯 말을 내뱉었다.
회시법에 성좌 같은 내용은 전혀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의 그 신입 하녀가, 날 두려운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서 레아나 좀 불러다 줄래?"
"네? 네. 금방 불러다 드릴게요."
하녀는 내 부탁을 받고, 도망치듯 내 앞에서 재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상당히 무서워 보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쭉 있을가문이라 이상한 소문 안 내줬음 좋겠는데.
"세린!"
방안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자, 이내 레아나가 문을 벌컥 열며 내게 달려 들어왔다.
나보다 체구가 더 큰 그녀가 달려들어와 난 의자에 앉은채로 뒤로 넘어갔다.
뭐, 그렇다고 아픈 건 아니었다.
"팔자 좋네. 거진 한달 넘게 누워있고."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테오가빈정대며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그의 왼쪽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엔 내가 아니라 이사벨이랑 맺어졌나 보......
"고모. 그래서 언제 할 건데?"
"뭘?"
"나 팔아서 쟤 붙잡고 있겠다며. 어차피 서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 한 번 잘 해보라고."
......아무래도 내가 아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내 왼쪽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테오가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 시간의 자아가 한심하다는 듯한 감정을 내비칩니다. ]
아무래도, 난 진짜 좆된 모양이었다.
......지금은 없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