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에피소드 11 - 아카데미 입학 시험 (4)
'니가 왜 거기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 느낌이었다.
왜 이사벨이 저기서 테오의 품에 안겨있는 걸까 싶어서.
그녀라면 테오와 맺어질 상대가 세린이란 걸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도.
"이사벨."
모랫빛 색채로 물든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 색을 찾은 이사벨과 테오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간의 힘 보유자가 아닌 사람들을 정지된 시간 속에서 움직이게 해 준 대가로 엄청난 양의 시간의 힘이 빠져나갔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오셨군요."
공허한 듯한 이사벨의 눈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분노를 잠궈놓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시간의 자아의 힘을 빌어 살펴 본 과거에서는, 이사벨이 어째서 내가 아닌 세린이냐고 묻는 장면에 스쳐갔었다.
그 장면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사벨의 얼굴을보자 난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나를 향한 원망이, 상당히 짙게 서려 있었으니까.
이사벨이 마법 학부의 수석을 쭉 잡아 왔던 이유가 테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랬었나.......
"패배자를 조롱하러 오신 건가요."
그렇기에 그녀의 비아냥 섞인 말을 들으면서도, 난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의도가 어쨌고, 과정이 어쨌든 그녀의 입장에서 난 사랑을 뺏은 사람이었으니.
"그런 건 아냐."
"그게 아니라면 뭐죠?"
"시험은 쳐야 할 거 아냐. 네가 1번 순서인거, 너도 알 잖아."
"......이젠 상관 없어 졌거든요."
젠장.
이사벨의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내 생각보다도 멘탈 상태가 상당히 엉망이었다.
젠장...... 여기서 네 사랑 타령따위 들을 시간 없다고, 이 멍청한 새끼야.
"너 진짜......."
사실, 지금 내게 와 있는 3번째 에피소드를 깨는 내용만 보자면 저 여자가 저렇게 스스로 자멸하는 길이 내게는 도움이된다.
물론 그 이후에 상당히 힘들어지는 건 당연 지사.
어떻게든 저 여자를 무조건 시험장까지 끌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슬슬 내 안에서는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내게는, 이번 회차의 향방이 걸린 일을 갖다가 저 여자는 그리 쉽게 헌신짝 내 버리듯 버린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니 인생 가치가 겨우 그 정도였냐?"
"네?"
"네 가치가 겨우 그정도였냐고."
어느새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당히 험해져 있었다.
"그 정도였다면 어쩌실 건데요?"
이사벨은 이젠 적대적으로 날 보고 있는지, 비꼬는 말투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실 거냐고요."
그 말을 들은 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음과 동시에 이사벨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이럴 거다, 어쩔래?"
당황한 테오가 허리춤에서 자기가 차고 온 검을 뽑으려 들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시간 가속까지 걸은 내 속도를 따라 올 수는 없었다.
이사벨은 그동안 마법 실력이 상당히 발전했는지, 이전에는 반응하지 못했을 내 속도에 반응해 순식간에 전방에 마법 실드를 전개해 내 검을 막아냈다.
"네 시간은 겨우 그정도의 가치였어?"
나의 이사벨을 향한 강공이 이어졌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에 냉철하게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지금 이순간 진심으로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네가 여지껏 노력해온 시간을 겨우 테오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에 모든걸 포기한 비루한 여인 그 한줄로 요약되고 싶냐고!"
다시 한 번 강하게 검을 내려치자 이내 그녀의 마법 실드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까진 내겐 그저 세린을 도울 조연이었고, 김수현이라면 그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 다음 수를 찬찬히 모색했을테니.
하지만 어째서인지 난 그녀가 자기가 이룬 모든 걸 던져버리러는 것을 막고자 화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흥분 할 일이었나 이게.......'
내 일갈에 이사벨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뒤늦게 후회가 찾아왔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선택해. 여기서 나랑 같이 죽을 건지 아니면 가서 시험을 볼 건지."
"같이 죽는다뇨."
내 에피소드의 실패 패널티는 강제 회귀.
그리고이사벨이 시험을 보지 않고, 라이즈 아카데미 마법학부 고등부 과정에 입학하지 않았을시의 미래는 어차피 강제 회귀행이다.
실제로 회시법에서 그런 회차가 두 번인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시험을 포기한다면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그녀에게 강요하기 위해서라도 난 도박수를 던진 것이었다.
"네가 아직 그리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가, 우리 둘의 죽음을 보고 폐인이 되는 걸 볼 자신이 있으면."
세느의 검날을 내 목에 가져다 대고, 반대쪽 손에는 에너지 건을 소환해 이사벨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번 시험 포기해도 좋아."
이사벨은 내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마음 같아선 다 포기하고 싶겠지.
하지만 너는 겨우 그런 이유로 거기서 멈춰선 안 돼.
네가 그러면 이 세상은 멸망으로 흘러 갈 테니까.
'제발.......'
사실, 이런 협박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그냥 둘다 같이 죽자고 나오면 그때는 모든 걸 포기하는 수 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난 그저, 내가 아는 방법 중 그저 최선을 택했을 뿐이었다.
"제가, 1순위라고 했나요......?"
"그래."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쯤 제 차례는 지났......."
"안 지났어. 너를 부르는 그 순간부터 내가 시간을 멈춰놨으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넌 시험을 볼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이사벨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다 포기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사벨은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앞으로 튀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빌어먹을 에피소드들을 깨려면, 난 그녀의 마법이 절실 할 테니까.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나서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
"왜 이러시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저는 당신을 오래도록 편히 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바라지도 않아."
* * *
다행히 이사벨은 늦지 않게 시험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테오는 뭐...... 알아서 잘 도착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중등부를 통째로빼먹었기에 시험순서 자체가 뒤로 밀려 있을 터.
애초에 시험 보는 시간 자체가 나보다 훨씬 뒤 일텐데 걱정 할 필욘 없을 것 같았다.
"이사벨 로웰!"
"죄, 죄송합니다!"
"로웰 영애가 늦다니, 별일이군요.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와 그녀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시험장으로 오는 동안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눌 수 없다가 맞는 말이겠지.
시험장에 입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흙먼지가 묻은 세느의 날을 천으로 슥슥 닦았다.
"뭐야, 세린.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거야?"
옆에서 레니가 장난스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그런 레니에게 "그냥."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검을 닦으며 그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본래라면 레니는 소설 속에선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엑스트라다.
그런 그녀가, 내가 이 세계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서브 주인공인 내게 다가와 장난을 걸고 있었다.
거기다 레니는 내가 시간의 힘을 가진 자라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 시작 한다."
레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유리 벽과 그에 덧 씌워진 마나 실드로 보호 받는 시험장 내부에서 상당한 수준의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 마나는 마치 용처럼 보이는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난, 지금 이사벨이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그 마법을 봄으로써 알 수 있었다.
원인은, 방금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내 공격을 방어한다고 쓴마나 실드겠지.
'흠.'
사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내가 수석을 취득하기는 훨씬 수월 할 것이다.
강력한 경쟁자가 사실상 낙오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아까부터 시간의 자아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 이건 정당하지 못 해. ]
[ 넌 도와 줄 수 있잖아. ]
[ 그냥 보고 만 있을 거야? ]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이사벨 주변에있을 마나를 끌어모아 그녀의 마법에강제로 불어넣어 주었다.
마치 터보가 달린 차 마냥.
순식간에 과량의 마나를 공급받은 이사벨의 마법은 순식간에 거룡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커졌고 주변에서는 이사벨에 대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
"역시 로웰 영애답군."
"클라쓰는 어디 안 간다는 건가......."
정작 그녀의 얼굴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뭐, 아까 억지로 마나 쓰게 만든 것에 대한 나름의 빚은 갚았다고 생각하며 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 시험의 최종 수석은 내가 될 테니까.
"자, 다음!"
이사벨의 시험 순서가 끝났는지 이내 진행자가 나와 다음 순서의 사람을 데려갔다.
그동안 난 체내에 마나를 붙잡아 놓는다고 집중하고 있었고, 레니는 자신 나름대로의 준비를하는지 자신의 지팡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힐끗힐끗 본 내앞선 시험자들은 다들 제법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역시나 이사벨에게는 미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메이나가 왜 제자를 안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메이나의 시선을 만족할만한 인재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결국 내가 넘어야 될 산은 이사벨이란 소리네.'
지금도 메이나 특유의 그 시선에는, 무언가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는 듯한 불만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가에 집중하기 보다는 바깥에 있을 날 향해 살짝씩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집어 넣고서, 조용히내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음, 세린...... 아리스!"
이내 내 이름이 들려왔다.
눈을 뜨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라이즈 귀족계에서 제일 핫한 키워드는 세린 아리스 그 다섯 글자였으니까.
벽에 기대 서 있던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자, 주변에서 나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마법사 맞아?"
"기사 같은데?"
"기사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기사일 걸?"
"아리스 기사단 단장이라잖아."
"왜 검술 학부로 안 갔대?"
......뭐 대충 저런 내용의.
어딜 가나 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 녀석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렇게 거리를 두고 측정 인형과 마주서자 진행자가 이내 내게 제지를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내 세느를 유심히 바라보며 완강한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 시험은 마법 능력 시험을 보는 만큼, 측정 인형을 검으로 직접 베거나 하실 수 없습니다."
"괜찮아. 그냥 진행시켜."
"네?"
"그냥 진행 시키라고. 검으로 베거나 그러진 않을 거니까."
메이나가 적절히 끼어들어 진행자의 행동을 제지하자 그는 못미더운 눈으로 날 보면서도 뒤로 물러섰다.
이내 메이나가 "어서 해봐."라고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앞선 이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만큼, 내게 뭔가 큰 기대감을 품고 있는 눈이었다.
"후우."
난 한숨과 함께 세느를 뽑으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
체내에 응축시켜두었던 마나를 시간의힘으로 가속시켜 세느에 모음과 동시에, 만들어 두었던 마법 수식을 속으로 떠올렸다.
"어.....?"
마법 언어의 베이스인 영어를 아는 것과, 마나시의 조합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마법 수식을 만들어냈고, 그에따라 가속 된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둘.'
검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이는 것을 느끼면서, 허리춤에서 세느를 천천히 뽑아들자 이젠 아예 세느가 손 안에서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킥킥. 그래, 보여주라고."
메이나쪽으로 마나가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그것에 개의치 않고, 양 손으로 세느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셋.'
속으로 셋을 마저 셈과 동시에 원거리에서검을 휘둘렀다.
메이나의, 실드 전개 영창이 들려온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홀딩 에어리어!"
측정 인형이 정확히 내 검의 궤적에 따라 반토막이 난 것과 동시에 그 중심에서 이내거대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발은 이내 주변까지 휩쓸어나가기 시작했고, 엄청난 빛 사이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 스킬 - 시간 방벽이 자동으로 발동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