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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14화 이의 있음! (15/144)



〈 15화 〉14화 이의 있음!
늙수그레한 노인 하나가 산호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있다. 그 양옆에는 각종 물고기와 바다 생명체가 줄을 이루고 있다. 노인, 용왕의 앞에는 토끼가 포박된 채로 무릎을 꿇고 있다.

"아니! 갑자기 나한테  이러시오!"


용궁의 학사가 될 꿈을 안고 온 토끼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토끼를 데리고 온 자라는 토끼의 뒤에 서서 머리를 후려친다.

"무엄한 것! 감히 용왕 폐하 앞에서!"

토끼의 두 눈에 억울함의 눈물이 맺힌다. 한유리와 김유빈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바라본다.

"아직은 악마가 안 왔나 본데?"

지금까지는 원래대로 흘러간다. 용궁으로 잡혀 온 토끼가 간을 적출당할 위기에 놓인 장면. 이제 토끼는 자신의 입담으로 이 위기를 탈출할 것이다. 정상대로라면.


"얼른 저 토끼 녀석의 간을 빼내라!"

"아이고! 용왕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토끼의 간구한 부탁과 발버둥에도 톱상어가 토끼에게 다가온다. 토끼는 밧줄에 묶인 상태로 소리를 꽥꽥 지른다. 두 명의 사서는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다. 토끼가 그저 살려달라고만  뿐이다. 한유리가 무언가 하기 전에 김유빈이 뛰쳐나간다.


"잠깐! 나는 하늘의 사자다!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든 행동이 멈춘다. 한유리도 잠깐 버벅거리다 금세 김유빈의 행동에 동참한다.


멈춰버린 용궁은 용왕의 말로 다시 움직인다.

"하늘의 사자께서 왜 일을 막는 건가."

물고기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나간다. 김유빈은 침을 삼키고 입을 연다.

"용왕! 그대의 병은 하늘이 내린 것! 감히 죄 없는 생물을 해하려 하다니!"


논리라고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말. 한유리는 그 어이없는 말에 김유빈을 바라본다. 김유빈도 자신의 입 밖에 나온 말에 당황한다. 그런데도 용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하늘의 사자여, 내가 살아야 바다의 질서가 유지 되지 않겠는가."

김유빈의 말에 비해 용왕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김유빈은 눈동자와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그렇다고 죄 없는 생물을 죽이는 것이냐!"


결국, 김유빈이 밀 수 있는 주장은 그것뿐. 용왕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한유리가 나선다.

"용왕이여. 사실 토끼는 간을 배 밖에 보관하는 생물이다. 그러므로 저 죄 없는 생물을 죽이지 말고 육지에 가서 가져오면 되지 않겠는가?"

원래 이야기에 나오는 토끼의 주장이 한유리의 입에서 나온다. 육지 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바다 생물들은 쉽게 반박을 하지 못한다.

"폐하. 어떤 생물이 간을 배 밖으로 꺼내고 다니겠습니까. 저자들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자라는 한유리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다. 해부학을 공부했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용왕이 그런 학문을 배웠을 리가. 뜻밖에 자신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자 한유리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대들이 육지 생물에 대해 무얼 아는가!"

지식의 유무는 주장의 설득력을 높인다. 사실과 다른 주장이더라도. 바다 생물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나간다.

"그렇다면  토끼의 배를 갈라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의 있음!"


김유빈이 자라의 말을 끊는다. 한유리는 갑작스러운 김유빈의 반응에 눈을 크게 뜬다. 김유빈은 머리를 긁적인다.

"한번 해보고 싶었어."

한유리는 한숨을 쉰다.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이의를 제기한 건지 김유빈은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지금 무고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데, 생명을 죽인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사실 그다지 논리가 들어있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김유빈은 한 건 했다는  가슴을 당당히 편다. 한유리는 한숨을 쉬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바다 생물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고."

자라와 사서들의 이야기를 듣는 용왕은 선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라와 토끼가 같이 육지에 올라가 토끼의 간을 찾으면 되지 않나?"


한유리의 말에 용왕은 고개를 끄덕인다. 점점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용왕의 명에 따라 자라와 토끼는 육지를 향한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김유빈과 사서도 자라를 따라간다. 다른 바다 생물에게는 자라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변명을 내놓았다.


육지. 토끼가 자라의 등에서 내린다. 두 명의 사서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육지로 올라온다. 토끼와 자라는 사서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면 토끼. 얼른 간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처음 둘이 만났을 때 토 선생이라 하며 존대를 했던 것과는 확 달라진 상황. 토끼는 자라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잽싸게 모래사장을 달린다. 자라가 육지에서 빠른 편이라고 해도 토끼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자라는 멀찍이 도망가는 토끼를 보고 무릎 꿇는다.

이야기가 원래대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 사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유리는 펜을 꺼내 들고 이야기를 조금 고친다. 자신들이 말한 말들을 토끼가 말한 것으로. 이것으로 이야기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가자."

"잠깐."

김유빈은 한유리의 손에 들린 황금 펜을 잡는다. 한유리는 눈동자에 의문을 가득 담고서 펜을 건네준다. 김유빈은 펜을 잡고 이야기를 덮어쓴다. 김유빈의 앞에 작은 풀이 돋아난다.

그 풀을 뽑은 김유빈은 자라가 있는 곳으로 힘껏 던진다. 풀은 하늘을 날아 자라의 눈앞에 떨어진다. 자라는 풀을 줍고 좌우를 둘러본다.

"그 풀이 용왕의 병을 고칠 것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낮게 깐다. 자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세 번 절을 하고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한유리는 살짝 웃으며 손을 뻗는다. 뻗은 손을 김유빈이 잡는다. 들어오기 전의 어색한 상황들은 잊혔다. 한유리가  황금의 펜이 움직인다.

그리고 사서는 그곳에 없었다.





어지럽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괜찮다. 여러 번 해보니까 익숙해졌나.


"어. 손 좀 놔줄래?"

이동하면서 붙잡은 한유리의 손. 화들짝 놀라며 때어낸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윽. 이야기 속에서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는데.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저번에는 미안했어."


먼저 입을  것은 한유리.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온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상당히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사과를  받을 수도 없다.


"아니. 내가 미안해. 사서에 대해 잘 모르는데 함부로 말했어."

허리를 숙인다. 다시 어색한 침묵. 죽을  같은 어색함이 나를 짓누른다. 아마 한유리도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어. 그럼. 밥 먹으러 갈까?"

"그래. 그게 좋겠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이걸로 조금 관계에 진전이 있는 것 같다. 한유리의 뒤를 따라 책들이 가득한 곳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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