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1화 이야기의 바다
"글이 손에 안 잡혀."
대기록원의 식당. 내 앞에는 돈가스. 맛있었다. 잘 튀겨졌더라.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글이 손에 안 잡히니 삶에 의욕이 없다.
"그거 때문에 일을 그따위로 해??"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당연히 유리. 지난주부터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말이 너무 험하다. 그따위로 하다니."
"항상 멍하고, 마법도 한 박자 늦게 날아오고, 반응도 늦고, 이야기를 고치려는 아이디어도 안내고. 그따위 맞네."
제기랄. 반박을 못 하는 내가 너무 밉다. 확실히 요즘 사서의 본업에 집중 못 하고 있다.
"왜 그러는데?"
그러게 왜 그럴까. 슬럼프에 빠지기에는 뭔가 이룩한 것도 없단 말이지. 책상에 엎어진 채 한숨만 내쉰다. 유리는 펜을 꺼내 먹은 그
릇들을 치운다.
"어. 내 글을 읽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는다. 말하고 보니 그게 문제인 거 같다. 목표가 없다. 글이 완성되어도 읽어 줄 사람이 없다. 뭐 유리나 다른 사서들은 읽어 주겠지만. 그리고 기록실에 들어가기도 할 거다. 아마.
유리는 한숨을 쉰다. 그리고 측은하게 바라본다. 동정하지 말아줘. 가슴이 시려.
"나랑 어디 좀 가자."
유리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질문은 사절이라는 분위기. 에휴. 따라가야지 별수 있겠나. 의자에서 일어나 유리를 따라 식당을 가로지른다. 밥을 먹는 사람들과 간단한 안부를 나누며 걸어간다. 한 달 동안 친해진 사람이 조금 있다.
행정실의 나카무라 씨. 기록실의 호레이스 씨. 같은 전투팀의 웡레이 씨, 마이클 씨, 하자드 씨.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나이가 많다는 말은 약간 묘한데. 하자드 씨는 열아홉에 사망했다. 즉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그 열아홉 살이 100년 전 이야기라는 게 문제지.
유리는 그동안 식당을 벗어난다. 빨리 가자. 한 소리 듣고 싶지는 않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유리를 따라잡는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나간다. 긴 복도에는 침묵만이 내려앉는다. 왜 화가 난 것인지 모르겠다. 문을 지나 동상들의 홀에 도착한다. 유리가 걸어가는 곳은 베토벤 동상이 서 있는 외부로 나가는 문.
그러고 보니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항상 방안의 창문으로만 해변을 보아왔다. 밖을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큰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Outside`. 외부라는 직설적인 단어가 달려있다. 영어 공부를 한 보람이 있다. 유리가 문을 연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모래사장은 태양을 찬란하게 반사한다. 청색의 바다는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를 몰고 온다. 모래를 밟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신발 밑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새롭다. 파도가 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유리는 모래를 밟고 바닷가까지 걸어나간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오르는 손짓. 말로 하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다니. 발바닥에 느껴지는 모래를 밟으며 유리에게 다가간다.
뒤를 돌아서 대기록원의 외부를 살핀다.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하얀 벽. 파란 지붕. 사진으로만 보았던 풍경. 그런데 작다. 전원주택 정도의 크기. 그 안에는 보이지조차 않는 높이의 책장도 있고, 한없이 이어지는 복도도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다도 한없이 펼쳐져 있다. 좌우 모두 모래사장으로 죽 이어져 있다. 거대한 모래사장에 홀로 서 있는 건물. 대기록원. 풍경을 바라보며 유리의 옆으로 간다.
"바다를 바라봐."
손가락은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일단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다.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바다가 보인다. 하늘에는 태양과 구름. 바다는 파도로 일렁인다.
"바닷속을 바라봐."
유리가 말을 정정한다. 바닷속이라니. 시선을 내린다. 바다의 표면이 보이고 살짝 이지만 안쪽이 보인다. 엄청 맑은 바다네. 무언가 지나간다. 하얀 무언가.
"그건 이야기야."
놀라서 유리를 바라본다. 이야기?
"이곳은 이야기의 바다. 기록탐색실이나 전투팀 사무실과 별개로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곳이지."
"왜?"
"이곳에 모인 이야기는 순환해. 사서들이 쓴 이야기를 바다에 풀어놓으면 아이디어가 되어 지상의 살아있는 작가에게 들어가자."
그 소리는.
"너의 이야기도 지상에 나타날 거야. 누군가는 쓰겠지. 뭐."
내 이야기를 읽을 사람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유리의 말대로라면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내가 생각한 세상을 누군가 이어가 준다는 것이다.
"쓸 생각이 나냐?"
"완전 만땅."
작가의 글은 결국 읽히기 위하여 쓰이는 법. 누군가 내가 만든 세상을 경험한다. 그럼 그걸로 됐다.
"그럼 들어가서 글이나 쓰세요."
"오늘은 일 안 해?"
"휴가받았다."
유리는 다시 문을 통해 대기록원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직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린다. 발밑의 모래는 바스락거린다. 이곳에서 나를 돌아본다.
내가 지금 쓰는 것은 결국 나. 과장도 축약도 왜곡도 있겠지만, 결국 내가 살아온 이야기. 자전적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내 삶을 쓰는 거다.
신발을 벗는다. 양말도 벗는다. 바지를 걷어 올린다. 맨발로 모래를 밟는다. 모래의 까끌까끌한 질감이 느껴진다. 앞으로 걸어나간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밀려오는 파도가 발을 적신다. 차갑다.
정신이 든다. 내가 써야 할 이야기의 맥락이 잡힌다. 나는 작가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다. 나에 대한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바닷속으로 한 발짝 더 내디딘다. 파도가 몰아치면 바닷물은 무릎을 적신다. 내가 살아온 길들. 나의 선택들. 그 선택의 이유와 결과들. 나의 삶을 규정하고, 구성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들이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내 삶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가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한 발짝 더. 차갑다. 온몸을 때리는 냉기. 저 바다 밑에는 이야기들이 헤엄치겠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 이야기들은 다른 작가의 손에 쓰여서 또 다른 세계와 이야기가 되겠지. 내가 쓸 이야기도 그렇겠지.
더 깊이. 바지가 젖는다. 바닷물로. 이야기로. 계속 걸어간다. 완전히 잠길 때까지. 물이 목까지 닿는다. 숨쉬기 불편하다. 사실 죽은 상태라 숨을 쉬는 것은 아니지만.
눈을 뜬 채로 잠수한다. 바다 밑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하얀 종이에 쓰인 채로.
얼굴을 든다. 산소를 들이마신다. 바다 밖으로 걸어나간다. 젖은 옷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대기록원을 향해 걸어간다.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내 이야기를 완성해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