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2화 모순의 칼라모일
"비상!"
방안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에 잠이 달아난다. 기지개를 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하품 한번 하고, 눈을 비빈다. 쿵쿵쿵쿵. 누가 문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누구긴 구구겠어. 유리겠지. 뭔가 급박한 상황인듯하다.
평소보다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글을 쓰다 키고 자 버린 컴퓨터를 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연다. 문밖에는 유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째려본다.
"빨리 안 움직이냐!"
소리를 지른다. 으 시끄러워.
"미안. 미안."
이럴 때는 유들유들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유리도 더 화내지 않는다.
"빨리 가자. 전투팀 전원 집합이야."
전원 집합? 무슨 일이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한유리가 빠르게 복도를 걷는다. 상당히 급한 듯하니 나도 빨리 가자.
동상들의 홀을 지나 전투팀 사무실로 들어간다. 책장들이 치워져 있다. 어떻게 치웠는지는 궁금하지만, 답은 알고 있다. 이야기 덮어쓰겠지. 뭐.
비어버린 공간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서 요한 씨를 바라보고 있다. 요한 씨는 나와 유리를 바라보고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얼른 달려가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요한 씨가 목을 가다듬는다.
"너희를 여기 모은 이유를 설명해주마."
모인 사서들 사이에 긴장이 감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럿 들려온다. 긴장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 유리도 긴장했는지 심호흡을 한다.
"초월자가 방문한다고 한다."
한숨과 한탄. 초월자. 말 그대로 무언가를 초월한 존재. 주로 시간 공간 같은 걸 초월한 존재다. 내가 만난 초월자라고는 대기록원의 원장인 하라익 뿐. 그나저나 초월자가 막 돌아다녀도 되나?
"이번에 올 녀석은 모순의 칼라모일. 알다시피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라니. 평가가 참. 사서들 사이에서 유명한지 한숨이 더 커져만 간다.
"목적은 관광. 아시다시피 초월자가 차원에 방문하려면 사서가 동반한다. 칼라모일은 성격상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동행으로 선택하니 선택 안 당하도록 조심해라."
선택당하면 곤란하겠구나. 모인 사람들 사이로 기운 빠진 함성이 울려 퍼진다. 요한 씨는 그거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자. 해산!"
박수를 치고 팀장실로 들어간다. 사서들도 각자의 임무, 책 관찰에 들어간다. 유리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서재를 바라본다. 몇몇 사서는 사서의 상징인 황금 펜을 꺼내 들어 바닥에 무언가를 적는다. 좌우로 물러서 있던 책장들이 원래의 자리를 찾는다.
역시 놀랍다. 일단 나도 업무에 복귀하자. 높이 솟은 책장을 바라본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수정했다. 수정했던 이야기에 또 들어가서 수정하는 일도 있었고, 이야기상 1년 동안 갇힌 적도 있었다. 으. 그때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친다.
"뭐하십니까?"
누가 내 어깨를 잡고 질문한다. 남자의 목소리. 뒤를 돌아 얼굴을 확인한다. 안경. 양복. 중절모. 넥타이. 인상은 선해 보인다. 눈꼬리가 내려가 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웃고 있는 건가? 그전에 이 사람은 누구야? 그리고 갑자기 존댓말?
"악마를 찾고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나쁜 사람은 아닐 거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서겠지. 복장을 보아하니 전투팀은 아닐 테고.
아. 이번엔 웃는 거다. 내 대답에 그 사람은 확실히 웃는다. 하얀 이빨도 살짝 보인다. 뭔가 부담스럽다. 그냥 존재 자체가 나에게 부담감을 준다. 일단 다시 책장을 바라본다.
......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도 강하고 뜨거운. 식은땀이 흘러나올 것 같다. 유리는 집중하고 있는지 책장만을 바라본다. 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니. 대단한 집중력이군.
"사서 일은 어떻습니까?"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
"만족하고 있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다. 눈은 책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모든 신경은 남자에게 쏠려있다. 남자는 나의 대답에 턱을 쓰다듬는다. 제발 나에게 신경을 꺼주세요.
"좋아요. 당신으로 하지요."
뭘? 뭘 나로 해? 남자는 그대로 뒤를 돌아 책장 사이를 빠져나간다. 내 눈은 그 남자를 따라간다. 아니. 사람 불안하게 만들고 어딜 가는 거야. 설명을 다 하든가. 남자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박혀있다.
어떻게든 생각에서 떨쳐내고 책장을 바라본다. 당연하게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김유빈. 한유리. 잠깐 와라."
악마를 찾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다 요한 씨가 우리를 부른다. 어리둥절해 하며 따라간다. 팀장실이 아니라 동상들의 홀. 문을 열고 나선다.
샹들리에 밑에 한 명의 여자와 아까 만난 남자가 서 있다. 뭐야. 왜 저깄어. 불안이 온몸을 휘감는다. 이래 봬도 수많은 책을 읽어 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저 남자는 사서가 아니다.
"저쪽은 초월자 모순의 칼라모일. 너희가 안내를 해줘야 할 존재다."
역시나. 제길.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칼라모일은 반가운지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너무 반가워 보이는 그 표정에 손을 흔들어준다. 유리는 나를 째려본다. 아마 나 때문에 불려 온 걸 눈치채서겠지.
요한 씨는 칼라모일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전투팀 사무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간다. 동상들의 홀에 남은 것은 넷.
"김유빈 사서! 저에게 지구 관광을 시켜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내 손을 잡고 격하게 흔든다. 하하하하.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유리도 내 옆에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버님. 슬슬 움직여야 합니다."
칼라모일 옆의 여성이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딸? 나잇대가 같아 보이는데? 뭐 초월자라는 존재가 나이를 먹을 리는 없지만.
"이쪽은 제 딸인 고을입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미녀. 고을은 나에게 손을 내민다.
"잘 부탁합니다. 아버님과 함께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겠지만……."
뒷말은 못들은 걸로 하고 싶다. 고을의 손을 잡고 짧게 악수를 한다. 칼라모일과 고을이 유리를 바라본다. 아마 나에게 소개를 부탁하는 거겠지.
"이쪽은 한유리. 저의 파트너입니다."
한유리는 살짝 웃으며 가볍게 목을 숙인다. 칼라모일은 박수를 한번 치고, 팔을 벌린 채 과장되게 뒤로 돈다.
"그럼 가봅시다!"
그대로 미켈란젤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차원이동실의 문을 연다. 저 방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고을도 그 뒤를 따른다. 나와 유리는 눈빛을 교환하고 문지방을 넘는다.
차원이동실은 컴컴하다. 사방이 검다. 그런데도 보인다. 가시광선이 들어올 구멍이 없는데 모든 물체가 훤히 보인다. 사실 이 방에 물체라고 불릴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칼라모일, 고을, 유리의 모습만이 어둠 속에 존재한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작은 목소리로 유리에게 속삭인다.
"차원을 넘나드는 곳. 이라는데 나도 처음이야."
"그럼 지구로 갑시다!"
칼라모일이 양팔을 벌리고 소리친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