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1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끝났다!"
책상에 엎어진다. 토할 거 같아. 안 먹어도 되는 몸이라지만 3일이나 굶으니 정신적으로 고통스럽다. 잠도 안 자도 되는 몸이라지만 3일 동안 밤을 꼬박 새우니 죽을 것 같다. 죽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 앞의 모니터에는 검은 글자들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으흐흐. 완성이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살아있을 때 못 해본 완결을 죽어서 하다니. 인생은 진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 같다.
저 글의 정체는 나의 일대기. 정확히 말하면 자전 소설이 되겠다. 지상에 살던 시절부터, 사서로 사는 삶까지 모두 녹여낸 작품. 살아있을 때 발표했으면 노벨문학상 감이다. 이 소리를 들은 유리의 표정이 상상이 되므로 방금 한 말 취소.
어찌 되었든 나의 글은 완성되었다. 기분이 묘하다. 살아서 못한 것을 죽어서 했다. 음. 그렇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일단 지금 너무 피곤하다. 당장 쓰러져서 자고 싶지만, 휴가는 오늘로 끝. 유리는 휴가를 맞아 다른 차원으로 여행. 나는 정식 사서가 되기 위한 몸부림. 뭐랄까. 내가 비참해지는 느낌이다.
창밖으로는 해가 떠오른다. 이제 유리가 나를 데리러 올 시간이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먹어줘야겠다.
"김유빈! 나와!"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른다. 누구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유리지 뭐.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연다. 역시나. 문 앞에는 유리가 서 있다.
"너. 얼굴이……."
3일 만에 만나자마자 한 말이 얼굴 평가라니. 뭐. 솔직히 심하긴 할 거다. 3일 동안 안 먹고 안 잔 사람의 얼굴을 짐작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런 표정은 아니지.
유리는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다. 너무했다.
"너 밤새웠어?"
"결국, 마무리했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유리는 미친놈을 봤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숨을 쉬고 들어 올린 손가락을 접어준다.
"밥 먹어야 돼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유리는 다시 한숨. 한숨 쉬면 복 나간다는데 복 많이 나가겠다.
유리는 등을 돌리고 걸어나간다. 평소에는 그냥 순간이동으로 가는 편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걸어가네. 걸을 힘도 없지만 따라가는 수밖에.
식당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다들 아침을 챙겨 먹나 보다. 나나 유리나 아침을 챙겨 먹던 사람이 아니라서 점심으로 첫 끼를 때운다. 사실 안 먹어도 되지만, 기분이 있지 않은가.
간단하게 토스트를 먹고 전투팀 사무실로 걸어간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거대한 책장들.
"팀장실로 가자."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겨난다. 유리는 질문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걸음을 선보인다. 머리를 긁적이고 유리를 따라간다. 유리는 자연스럽게 팀장실의 문을 두드린다. 요한 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연다.
"왔나?"
요한 씨는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그래서 바로 문을 열었나? 요한 씨의 말에 놀란 유리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또 상사의 사무실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고 들어간 거구나. 넌 진짜 성격 고쳐야겠다.
"김유빈이 정식 사서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거 때문에 왔구나. 요한 씨는 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정식으로 입단식을 해야겠군."
자신의 할 말을 마친 요한 씨는 손을 휘휘 내젓는다. 유리와 나는 꾸벅 묵례하고 방을 나선다.
"좋아. 그럼 넌 방으로 가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 중요한 행사니까 준비 확실히 해라."
갑자기? 상당히 당황스럽지만, 유리는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책장들 사이에 나 혼자 남겨졌다. 머리를 몇 번 긁적인다.
일단 방으로 돌아간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니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자. 중요한 행사랬으니 씻어야겠지. 사실 씻지 않는다고 모에서 냄새가 나거나 티가 나지는 않는다. 죽었으니까 노폐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으니.
욕조에 물을 가득히 담고 몸을 담근다. 따스한 물속에 머리까지 푹 집어넣는다. 정식 사서라……. 나도 황금 펜이 생기겠군.
가장 좋은 옷이 뭐일까 생각하며 옷장을 뒤적인다. 그리고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장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솔직히 당황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입어야지.
약간 어색하지만, 몸에 꼭 맞는다. 마지막에 정장을 입은 것이 사촌 누나의 결혼식 때. 3년도 더 된 이야기다. 양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기다린다. 뭘 해야 할지 모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방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팀장급뿐. 당연히 요한 씨다.
요한 씨는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채로 양복을 입고 있다. 원래도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달라 보인다.
"가자."
나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어리둥절해 하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요한 씨를 따라 걸어간다. 동상들의 홀을 지나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연다.
따가운 햇볕이 눈을 찌르고,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다. 저번에 왔을 때 이곳에 오는 것은 내 이야기를 전부 썼을 때라고 다짐했다. 그것은 이루어졌다.
해변에는 양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이 죽 늘어서 있다. 전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얼굴만은 알고 있다. 전투팀의 사서들. 오가며 본 얼굴들. 요한 씨와 함께 그들 사이를 지나간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거나 가볍게 눈인사를 한다. 다들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걸려있다.
요한 씨를 따라 걸어온 길 끝에는 차려입은 유리가 서 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로. 유리는 한 손으로 치마를 잡고 우아하게 인사한다. 유리의 다른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다.
"사서 김유빈."
"네!"
옆에 서 있던 요한 씨가 갑작스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그대는 사서로서, 작가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 공로를 인정하며 김유빈을 정식 사서로 임명한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색하다. 뒤통수를 긁고 싶지만, 여기서 그러면 안 되겠지. 유리가 나에게 다가와 책을 건네준다.
검은 표지. 금색으로 수놓아진 제목과 작가. 「대기록원의 사서」 김유빈.
약간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든다. 내가 쓴 이야기.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이렇게 책으로 나온 것을 보니 뭐랄까. 말로 못할 심정이다. 내가 적은 이야기들.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이 이 책에 적혀있다.
"이제 이야기의 바다에 그 이야기를 풀어주도록."
요한 씨가 파도치는 바다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떠다니는 바다를.
한걸음 씩.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구두를 바닷물이 적신다. 살포시 책을 바닷물에 담근다. 책은, 이야기는 바다와 접촉하자 살아있다는 듯 움찔거린다. 잡은 손을 놓자 책이 산산이 흩어진다. 이야기가 이야기의 바다로 돌아갔다.
"축하해."
유리가 내 어깨를 잡는다. 그리고 다른 손을 펴서 나에게 내민다. 그곳에는 황금으로 빛나는 펜이 놓여 있다. 펜을 잡는다. 유리의 펜은 사용해 보았지만, 이건 내 펜이다. 나를 위한 사서의 상징. 작가의 상징.
"좋아! 그럼 다들 해산! 일이나 해라!"
요한 씨가 박수를 치며 외치자 모여있던 사서들이 흩어진다. 요한 씨도 대기록원으로 돌아간다. 유리는 나를 보고 살짝 웃더니 다른 사사들을 따라간다. 이제, 이곳에는 나만 남았다.
내가 쓴 이야기가 헤엄쳐간다. 다른 작가가 쓸 수 있도록. 지상의 작가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도록.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내가 저 책을 썼지만,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저 바다를 헤엄치는 수많은 이야기처럼. 나의 이야기도, 나의 사서로서의 삶도, 나의 작가로서의 생명도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