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70화 뜻 밖의 휴식
청하는 돌아오자마자 의무실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세실라 박사의 말로는 나흘 정도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예정에도 없는 휴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동물원.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건지."
옆에서 유리가 투덜거린다. 갑작스러운 휴가라 계획을 짜지 못한 유리는 어쩌다 보니 나랑 같이 있게 되었다. 자기가 따라오겠다고 해놓고는 불만이라니.
"재미없으면 방으로 돌아가던가."
"그게 더 재미없어."
칫. 불만도 많아요. 유리의 불평은 무시하고 철창 너머로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바라본다. 좋기만 하고만.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에서 따뜻한 태양이 내리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하얀 구름도 보인다. 평화롭다. 매일 이러면 좋을 텐데.
"자지 마!"
"흐헛!"
잠이 싹 달아났다. 옆에서 유리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본다. 눈매 봐. 진짜 무서워. 유리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쉰다. 또 왜 저래. 몰라 몰라.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언제 다른 사람 신경 쓰면서 살았다고.
배가 고프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만. 생각해보면 웃기는 몸이란 말이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몸이라서 밥을 먹을 필요는 없는데 배는 고프다. 그렇다고 안 먹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세실라 박사는 육을 가졌던 존재의 정신적 괴리라고 설명하는데, 뭔 소린지 이해 못 했다.
황금의 펜을 꺼내 휘두른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으면 먹어야지. 곧 손에 노란색 도시락통이 나타난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곱게 잘 말려진 김밥이 나타난다. 소풍에는 김밥이지.
"나도 줘."
유리가 손을 내민다. 자기가 만들어서 먹지 왜 나한테 달라고 하냐. 그렇다고 거절할 정도로 용기가 많지 않다. 도시락을 내밀자 유리가 김밥을 하나 집어 먹는다. 잠시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김밥만 씹는다.
도시락통이 비었다. 펜을 휘둘러 도시락통을 지운다.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몸에 안 좋다지만, 사서는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당연하지만.
"좋았냐?"
자리에 드러누우려는데 갑자기 유리가 물어본다. 유리를 바라본다.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분명 저건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표정! 그런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저 질문의 요지도 모르겠고.
"여자랑 춤추니까 좋았냐고."
뭔 질문이 그래? 신데렐라의 무도회에서 그 여자랑 춤춘 거에 대한 질문인 건 알겠다. 그런데 뭔 질문이 그래?
"좋긴 뭘."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풀린다. 뭔가 짜증이 확 밀친다.
"너는 좋았냐?"
아. 실수. 순간의 짜증을 이기지 못했다. 말투가 너무 사나웠다. 당연히 유리의 표정도 사나워졌고.
"좋았다. 왜?"
"아니. 그냥. 네가 먼저 물어보니까."
표정이 장난 아니다. 역시 잘못된 질문이었어. 한동안 나와 유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다 유리 잘못이야. 암 그렇고말고. 그런 질문을 하니까 갑자기 어색해지잖아?
10분 정도 앉아서 철창 너머의 사슴들을 바라봤다.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유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딘가로 가면 날 죽이려고 들것 같단 말이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짐작이 간다.
"춤 좀 추던데 어디서 배운 적 있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은 유리의 질문으로 깨어진다. 아직 고개를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풍기는 분위기는 누그러들었다.
"연극부 하면서 사교댄스를 배웠었어."
"연극부?"
유리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길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도 연극부 활동했었어."
"헤에. 그래서 연기가 되는구나?"
연기가 된다니. 사실 연기를 못 해서 극본 담당으로 쫓겨나고 극본 쓰다가 소설로 넘어온 건데. 연기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법이더라.
궁금한 것은 다 질문했는지 유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러간다. 이런 거 진짜 싫은데.
"으아아. 힘들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기록실의 빨간 머리 놈. 유리와 나의 시선 그 녀석에게 집중된다. 그놈은 문 앞에 서서 나와 유리를 번갈아 본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찡그린다.
"그래. 여기가 데이트 명소이긴 하지. 방해는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방금 뭔가 엄청 신경 쓰이는 단어를 들은 것은 느낌 탓이겠지?
"데이트 아니거든!"
유리가 빨간 머리 놈한테 소리 지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놈을 노려보며 씩씩거린다. 확실히 데이트는 아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빨간 머리 놈은 유리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이며 안쪽으로 걸어온다.
"미안. 미안. 내가 착각했네."
유리는 빨간 머리 놈의 사과에 고개를 들고 놈을 째려보며 콧방귀를 뀐다. 빨간 머리 놈은 유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둘을 바라보고 있고.
"다시는 착각하지 말라고!"
빨간 머리 놈에게 소리치고 유리는 동물원을 떠난다. 빨간 머리 놈은 멀어져 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 본다.
"너! 그때 근신!"
제기랄. 기억하는구나. 별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상대인데.
"맞다. 빨간 머리야."
놈과 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힌다. 갑자기 시작된 눈싸움. 이건 단순한 눈싸움이 아닌 남자의 자존심 대결이다. 눈이 따끔거리지만 감지 않는다. 빨간 머리 놈의 눈동자도 빨갛게 변하지만, 눈을 뜨고 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온다. 빨간 머리 놈은 눈꺼풀이 벌벌 떨린다. 어디 가서 눈싸움 지고 다니지 않았는데, 저 자식은 좀 한다. 이제 눈이 아프기 시작한다. 놈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내가 졌다!"
빨간 머리 놈이 패배를 시인하고 눈을 감는다. 나도 시린 눈을 감고 눈물로 눈을 적신다. 1분 정도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놈도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눈을 뜬다. 빨간 머리 놈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은 흔적이 남아있다. 놈은 살짝 웃는다.
"눈싸움으로 나를 이기다니 독종이네."
"내가 독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뻥이다.
"난 로이스 엘리오스."
빨간 머리 놈, 로이스 엘리오스가 손을 내민다. 악수를 청하는 거겠지. 내뻗은 그 손을 붙잡는다.
"김유빈. 로이스라고 부르면 되지?"
"편하신 대로."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 기록실에도 친구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당구 좀 치냐?"
"간신히 100 나오는 정도."
"따라와라."
문을 열고 나가는 로이스를 따라간다. 남은 휴가 기간, 재미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