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3화 〉102화 검투사의 노래 (103/144)



〈 103화 〉102화 검투사의 노래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수정하고 방으로 돌아와  잤다. 소녀에게 느꼈던 죄책감은 전부 사라졌다. 이야기의 인물 하나하나에 몰입하면 사서 생활 오래 못 한다.

그렇게 찾아온 아침.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 햇살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다. 「오르니아의 왕」 3권은 거의 완성 되어가고 있다. 이것만 쓰면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다.

"김유빈. 나와라."

문이 두드려지며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시간이 된 건가. 옷은 일어나자마자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는 끝이 났다. 바로 현관으로 걸어가 나무로 된 문을 연다.

"오. 일찍 나왔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문 앞에 서 있는 유리.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청하. 청하의 표정이 약간 어둡다. 눈에 근심이 가득하다.


"청하는  저래?"


유리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유리는 살짝 고개를 돌려 청하를 바라보고 작은 한숨을 쉰다.

"어제 성냥팔이 소녀 때문에 생각이 많았나 봐."


생각이 많을 이야기였지. 우리의 행동으로 한 소녀의 인생이 망가졌다. 그것이 원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번 일로 사서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건 시간이 지나면 정리된다.

유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특별히 청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유리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간다. 청하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유리를 뒤따라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전투팀 사무실은 항상 그러하듯 책장이 가득하다. 그리고 책도 가득하다. 우리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책장을 노려보며 악마를 찾는다.

"찾았어요."

청하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책장의 높은 곳. 흐릿하게 검게 변해가는 책이 한  보인다. 펜의 힘으로 날아올라 책을 꺼내온다. 바닥에 내려앉자 유리와 청하가 다가온다.

"「Ballad of Gladiator」."

검투사의 발라드? 묘한 제목이다. 지은이는 `I Cheongha`. 이청하? 나와 유리의 눈이 청하에게 향한다. 청하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반응을 보아하니 저 이청하가 맞는 듯하다.

"어. 그러니까. 제목은 「검투사의 노래」고."

청하는 뭔가 말하려 하지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빨개진 얼굴로 보건대 부끄러워서 저런다. 유리도 자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저랬었지. 나중에 내가 쓴 소설도 나오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다.

"그게. 제가 병실에 있을   시인데. 그러니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지 두서없이 말을 한다. 유리는 그런 청하를 보고 한숨을 쉰다.

"한 번 읊어 봐."


유리의 말에 청하의 입이 멈춘다. 읊으라니, 그렇게 어려운 주문을. 청하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유리의 시선을 피한다.

"넌 지금 설명도  하잖아. 차라리  번 읽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유리는 「봄」 이야기를 고칠 때 절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다. 끝까지 대충 설명하면서 넘겼지. 이걸 걸고 넘어가고 싶지만 나는 맞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유리의 표정을 보니 시를 읊으라는 것은 단순히 청하를 놀리기 위해서다. 한 1할 정도는 기운을 차리게 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청하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열심히 굴린다.

"으으. 그러니까. 저기."


청하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다. 저러다 울겠다. 말려야지. 청하를 놀리는 유리의 어깨를 두드린다. 유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리고 다시 청하를 본다. 자기도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뺨을 긁적인다.

"그냥 들어가자. 울지 마."


유리의 말에 청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시를 읊는 게 울기까지 할 일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 치자.


훌쩍이는 청하를 보고 한숨을 쉰 유리는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낚아챈다. 그대로 펼치고 자리에 앉는다. 아마  번 읽어보려는 듯하다. 그런데 한글로 쓴 시를 영어로 번역한 다음 다시 한글로 해석하면 이해가 되나?  알아서 하겠지.


나는 청하나 달래야지. 청하는 아직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 있다. 황금의 펜을 휘둘러 캔커피를 만들어낸다.

"뭘 그렇게 울어."

청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눈이 완전히 부어 있다. 들고 있는 캔커피를 던져준다. 청하는 공중에 뜬 캔커피를 잡지 못한다. 청하가 휘두르는 손을 피한 캔커피는 청하의 머리에 부딪힌다. 놀라운 운동신경이군. 어떻게 칼을 들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힝. 아파요."


머리에 캔커피를 맞은 청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눈물은 멎었으니. 바닥에 떨어진 캔커피를 들어 청하의 손에 쥐여준다.

"그래서 왜 운 거야?"

나무라지 않는다는 말투로 말한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것이 예의니까 라고 느끼게. 사실 엄청나게 궁금하다.


청하는 캔커피를 양손에 쥔 채 머뭇거린다. 잠깐의 적막이 흐른다. 청하는 결심한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연다.


"처음 시를 쓴 게 중학생 때였는데."

다행히 입원해 있을 때는 아니네.


"반 애들한테 시 쓴  들켜서 교실 앞에 나가 읽어봐. 읽어봐. 소리를 듣다 보니 트라우마가 조금 있어서."


제기랄. 청하는 뭐만 하면 심각한 일과 연결되어 있다. 물어본 내가 나쁜 놈이다. 청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


"좋아! 다 읽었다!"


유리가 펴 놓았던 책을 덮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유리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켠다.

"하나도 모르겠다!"


역시나.  번이나 번역한 글을 이해하는 건 힘들지. 특히 시라면. 유리는 웃고 있지만, 화가  있다. 저런 분위기를 풍기면서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

"어차피 청하가 내용 아니까 들어가서 생각하기로 결정!"


유리의 말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나온다. 저럴 때 건드리면 나만 손해. 청하도 그걸 느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리의 눈치를 본다.


"빨리 가자!"

들고 있는 책을 펼치는 동작에서도 분노가 느껴진다. 책이 찢어질까 걱정될 정도로 힘차게 펼친다. 나와 청하는 재빨리 펼쳐진 책의 귀퉁이를 잡는다.


황금의 펜을 꺼내 든 유리는 펜을 힘차게 휘두른다. 부러질까 두렵다. 부러질 리는 없겠지만. 유리가 들고 있는 책에서 강한 빛이 일어나 우리를 감싼다.

"이야기여 사서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바닥에는 책 한 권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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