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113화 토끼와 거북이
못 잤다. 한숨도. 눈은 말똥말똥하고 심장은 쿵쾅쿵쾅. 가끔 이불도 발로 차고. 그렇게 밤을 보냈고, 아침이 되었다. 한숨도 못 잤지만, 피곤하지 않다. 정신이 너무 날카로워 문제지. 제기랄. 유리 얼굴을 어떻게 보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어차피 오늘도 일하러 움직여야 한다. 그럼 유리도 만날 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유리가 찾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다. 어젯밤에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시지 못하겠지.
"으아아! 제기랄!"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생각을 지우기에 글쓰기만큼 도움되는 것은 드물다. 글을 쓸 때는 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까.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퇴고. 이미 쓰인 글을 다듬고, 가지 치고, 깎아서 아름답게 만드는 일.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유빈! 나와라! 술 좀 마셨다고 아직 뻗어 있는 건 아니지?"
올 것이 왔다. 문밖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목소리에는 근심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난다. 문으로 걸어가서 열어버린다.
문 앞에는 유리와 청하가 서 있다. 유리의 얼굴에서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점은 없다.
"가자!"
평소보다 들떠 보이기는 하는데. 설마. 어제 일은 그저 술김에 일어난 사고인가! 필름이 끊겨서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건가! 뭔가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나는 고민하느라 한숨도 못 잤는데. 또 다른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신나서 복도를 걷는다.
"선배."
유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청하가 나를 부른다.
"유리 언니 이상하지 않아요?"
"약간?"
"아까 저 마중 나왔을 때 갑자기 노래를 불렀어요!"
확실히 이상하다. 지금 유리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심히 걱정된다.
"빨리 와!"
복도 저편에서 유리가 나와 청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일단 가야겠지. 청하와 잠깐 시선을 나누고 유리를 따라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는다.
전투팀 사무실은 언제나 그러하듯 거대한 책장으로 가득하다.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이 우리를 반겨준다.
"좋아! 빨리빨리 하자고!"
확실히 유리가 너무 들떠 있다. 경험상 저렇게 들뜬 사람은 실수를 자주 한다. 봐봐. 달려가다가 넘어지잖아.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바닥에 부딪힌 유리는 웃으며 일어난다. 꽤 아팠을 텐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정신 상태가 의심된다.
한숨을 내쉬고 유리가 뛰어간 책장 사이로 걸어간다. 청하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온다. 유리의 모습은 솔직히 조금 무섭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악마를 찾아본다. 유리는 계속 웃는 표정이다.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꼭 어딘가의 어릿광대 같다. 그래서 무섭다. 청하도 같은 생각인지 유리에게서 살짝 떨어져 있다.
"유리 언니 왜 저래요?"
"글쎄다."
진짜 모르겠다. 어제 일이 원인이라기에는 뭔가 티를 내지도 않고. 그냥 불안한 상태로 지내는 게 정답인 듯하다.
"찾았다!"
유리가 소리치며 날아올라 책을 한 권 꺼내온다. 하얀 표지가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다. 쓰여 있는 제목은 「The Rabbit and Turtle」.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 고전 동화중에서도 고전인 작품.
"다들 내용은 알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질문하는 유리. 솔직히 거북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청하도 마찬가지. 유리는 들고 있는 책을 펼친다. 나와 청하가 책의 귀퉁이를 잡는다.
"그럼 가자고!"
유리가 황금의 펜을 꺼내 휘두른다. 그 자그마한 동작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펜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경쾌하다. 이러다가 이야기 속에서 실수를 남발할까 걱정된다.
"이야기여, 사서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바닥에는 책 한 권만이 남는다.
사서들이 도착한 곳은 어딘가의 숲. 이야기에 도착하자 김유빈과 한유리는 곧바로 펜을 휘두른다. 마법서와 기타를 손에 들고 주변을 살핀다.
"일단 토끼와 거북이를 찾자."
"좋아! 가자고!"
소리치는 한유리를 보고 김유빈이 한숨을 쉰다. 김유빈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히 담겨있다. 한유리는 홀로 숲을 가로지르며 걷는다. 김유빈과 이청하는 한유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은 상태로 천천히 따라간다.
"언니. 사고 치지는 않겠죠?"
"나도 그게 걱정이다."
김유빈과 이청하는 콧노래를 부르며 숲길을 걷는 한유리를 빤히 바라본다. 5분쯤 걷자 숲이 끝나는 지점이 나타난다. 사서들은 적당한 수풀에 몸을 숨기고 숲 밖의 상황을 바라본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앙? 이 자식이! 진짜 한 번 붙어봐?"
"둘 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라!"
잔디가 잔뜩 깔린 벌판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있다. 그런 그들을 말리는 너구리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너구리의 제지에 토끼와 거북이는 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댄다.
"좋아. 아예 담판을 내자고!"
"바라던 바다!"
"다음 주 아침 해가 뜰 때 여기로 나와! 달리기 시합이다!"
"하? 너 같은 느림보 거북이랑 달리기를?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토끼는 거북이의 시합 선언에 콧방귀를 뀐다. 거북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떤다. 옆에서 보고 있던 너구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쉰다.
"왜? 쫄리냐?"
"하! 달리기 최강자인 이 토끼님이 쫄릴리가 없지! 다음 주 이 자리다!"
할 말을 다 한 토끼는 그대로 벌판 너머를 향해 달려간다. 거북이는 이를 갈며 토끼가 달려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괜찮은 거야? 너 토끼랑 달리기해서 이길 수 있겠어?"
거북이의 뒤에서 너구리가 걱정이 묻어나는 말투로 질문한다.
"저런 털북숭이 자식이야 껌이지!"
그렇게 말한 거북이는 네 발로 기어 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토끼가 뛰어간 속도보다 현저히 느리다. 너구리는 그런 거북이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쉰다.
"거북이를 따라가자."
"그래! 거북이를 따라가자!"
김유빈은 한유리의 말에 한숨을 쉬며 마법서를 펼친다. 주문을 읊어 사서들을 투명하게 만든다.
"나 먼저 간다!"
자기 몸이 투명해진 것을 확인한 한유리는 거북이가 걸어간 방향을 향해 달려나간다. 김유빈과 이청하는 잠시 시선을 나누고 탄식을 흘리며 한유리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