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두근두근 문예부
"와…"
넓은 시야의 저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이어지는 백색의 서양식 건축물. 앞에 '명문' 두 글자가 달린 사립학교라서 그런지 몰라도 크기 하나는 무지막지하다.
고개를 위로 쳐든 채 걸으니 정문 근처에 설치된 소크라테스의 조각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나도 모르게 입 밖을 뚫고 흘러나오는 탄성. 그 옆으로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을 훑어보니 고등학교가 아니라 캠퍼스를 거니는 기분이다.
처음 교내 사진을 봤을 때도 대단하다고는 막연히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웅장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과연 명문사립학교, 후원 재단이 어느 재벌기업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인문학교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나처럼 가정 사정이 넉넉치않은 아이들은 장학생이 아닌 이상 입학을 엄두조차 못 내겠지.
아무튼, 이것이 앞으로 내가 다닐 학교라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지만, 그것도 한참 옛날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다. 게다가 미처 졸업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기도 했고.
뭐라 해도 이곳이 그 '게임'의 본 무대가 펼쳐지던 장소이니까. 나로서는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들어갈까."
얄상한 손목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입학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서서히 발걸음을 떼며 학교 내부로 들어간다. 동시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회상들.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들.
지금은 누가 봐도 평범한 여고생이지만, 본래 나는 평범한 남고생이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별로 깊게 따질 것도 없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니까. 나는 남자였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여자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비밀 조직의 실험이라던가, 이상한 온천탕에 들어갔다든가, 그런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하룻밤 새 완전히뒤바뀌어버린 몸. 그러나 바뀐 게 몸 뿐이었다면 그만큼 혼란스럽지는 않았겠지.
늦가을의 장대비가 추적추적 퍼붓던 날. 어느 때처럼 컴퓨터를 키고서 노닥거리다가, 우연찮게 여동생이 즐기던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호기심에 이끌려서 플레이해보았다. 그러다 어찌어찌 모든 캐릭터의 루트를 엔딩까지 올 클리어 해버렸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나는 아기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래에 달려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채로.
나는 여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마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았던 일.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뤄지지 않으니까 꿈이라 부르는 거라고. 당연히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어서 틈만 나면 자신의 아랫도리를 더듬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빈 손을 덮쳐오는 상실감. 나는 딱히 트럭 같은 물건에 치인 적도 없는 데,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나.
지금은 없어진 고추한테는 미안하지만,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허나 내 몸뚱아리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눈을 뜬 곳이 바로 게임 속 세상이었고, 나는 그 게임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이겠지.
이 세상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건, 너무 3류 소설스럽잖아. 그래서 어느 정도 머리에 피가 마르고 나서도 나는 현실을 부정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미친 듯이 찾기도 했었다.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이 세계를 단지 거짓 뿐의 세계라 치부했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이건 진짜가 아니라고.
그야 이 세계로 전입하게 된 계기도 어이없을 뿐더러, 게임 속 인물에 빙의했단 사실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나의 가족들까지.
하지만 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 일을 계기로 적당히 수긍해버린 지금, 나는 이제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게임 속의 세계가 어떠한들 내가 직접 본 이 세계는 결코 조잡한 프로그래밍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이곳의 사람들도 내가 있던 곳의 사람들과 똑같은 피가 흐르고 똑같은 숨을 내쉬니까.
누구보다도 인간답게 정을 주고받고, 때론 좌절하기도 하며, 때론 기뻐서 웃기도 한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단지 가상의 캐릭터라 치부할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닫게 된 나로서는 도저히, 이 세계를 거짓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곳 사람들의 인생마저도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오랜만에 옛날 일을 얘기하다 보니 잡념이 길어졌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목표로 하던 강당은커녕 이상한 곳에 와있었다.
정원 한 쪽에 놓인 스쿨 맵을 바라본다. 워낙 큰 학교라 그런지 이런 지도가 다 있네. 비교적 간략하게 그려진 약도에서 나는 곧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하아…"
아무래도, 아예 반대로 걸어온 듯하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한다는 수고스러움에 뒷머리를 긁는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버릇.
수더분해 보인다며 언니가 썩 좋아하지 않는 행동거지 중에 하나다. 나로서는 이전의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잔재와 같은 것이지만, 언니는 나의 비밀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아무튼, 좋아. 목적지까지 걸어가면서 할 일도 없겠다. 방금 전 본의 아니게 끊겨버린 시덥잖은 얘기를 계속해보자. 생각해보니 내가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임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내 이름이 게임 속 주인공과 같았으며, 둘째, 나의 유일한 언니의 이름이 게임 속 주인공의 언니와 같았고, 셋째, 17년간 살아오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학교가 전국 석차 3위 이내의 명문학교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는 뭐, 아침에 뉴스로 나온 연쇄 살인마 따위의 사소한 것들.
아주 낮은 확률로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지만, 과연 이 정도까지 겹친다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이 세계의 배경이 된 게임 자체에 대해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미 위에서 말했다시피 여성향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것도 굉장히 노골적인.
조금 빈곤한 가정에서 자란 당찬 소녀가 부자 학교에 입학해 연적들을 이기고 학교의 아이돌 격인 미남들을 쟁취한다, 라는 식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오히려 그 지나칠 정도의 뻔함이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나 뭐라나. 그쪽 세계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나로선 잘 모르는 얘기들뿐이었다.
아, 물론 내가 그런 게임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하더라도, 딱히 남자와 연애 플래그를 세우진 않을 거다. 어머니와 언니의 엄한 교육으로 이젠 나도 여자에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남자는 꺼려지니까. 나보다 더커다란 남자와 키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하다.
게임 내적인 부분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자면, 각 루트마다 정해진 공략 대상이 있으며 그 수는 총 셋. 그에 따른 연적들도 세 명이다. 연적이란 공략 대상을 자신의 남자로 차지하기 위해 주인공과 경쟁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들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 사랑의 라이벌 쯤?
첫 번째 공략 대상이자 플레이의 난이도로 따지면 가장 쉬운 것이 같은 반의 활달한 체육계 남자애. 그리고 그에 따른 연적이 마찬가지로 같은 반에 있는 소심한 여자애.
두 번째 공략 대상은 먼 이국에서부터 전학 온 고위 귀족 출신의 꽃미남 전학생. 그리고 그에 따른 연적이 어릴 때부터줄곧 그를 좋아해온, 마찬가지로 같은 나라에서 건너온 귀족 여자애.
세 번째 공략 대상이자 가장 난이도가 높은 루트로 악명 높은, 재벌가 출신인 학생회장. 그리고 그에 따른 연적이……바로 학생회 부회장. 허나 이 세계에서는 어째선지 학생회장이 되어버린 내 언니.
나는 당연히 이 세 루트를 모두 플레이했고, 종국엔 클리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대충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뒷배경을 가지고 있고, 정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남자가 그런 걸 했다고 해서 이상한 눈길로 보진 말자. 나는 단지 맨날 롤만 주구장창 우려먹다가 질려서, 문득 여동생이 실수로 끄지 않고 간 노트북에 뜬 게임 화면을 보고 호기심에 한번 손을 대보았을 뿐이야. 올 클리어까지 간 건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어떻게든 엔딩을 보고야 마는 내 성미 때문이고.
뭐 어쨌든, 이걸로 설명은 충분하겠지. 대충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그렇고 그런 게임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거기 너, 오늘 입학하는 사람이야?"
"예? 그런데요."
"그래? 그럼 따라와. 입학식 장소까지 안내해줄게."
“아, 감사합니다!”
복잡하게 배치된 여러 개의 건물들 사이에서 헤매던 도중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마도 선배로 보이는 남학생이 밝은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아무래도 입학식의 안내 요원인 듯 이내 천천히 나를 앞서나가는 그.
앞을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등을 따라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입학식 3분 전, 아슬아슬했지만, 다행이 첫날부터 지각하는 것은 면한 듯하다.
그를 따라 커다란 건물로 들어가서 계단을 한 층 내려가자 대강당의 입구처럼 보이는 문이 나왔다.
"저기, 너는 이름이 뭐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 덕분에 겨우 찾아올 수 있었어요!"
"아니 그…"
"그럼, 안녕히가세요!"
도착하자 멈춰 서서 이 쪽을 돌아보는 선배에게 재빨리 감사 인사를 건넨다. 다소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더 이상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까.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강당의 문을 열어제끼고 내부로 들어간다. 안에 들어가기 직전 얼핏 본 선배의 미소가 어쩐지 경직된 것처럼도 보였지만,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정확히 입학식 시작 시간. 정말로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