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두근두근 문예부 (3/73)



〈 3화 〉두근두근 문예부

강당 안에 들어서자 개성이라곤 요만큼도 없이 감색 교복을 똑같이 차려입고서 바글거리는 학생들. 마치 바다표범 무리 같다는 감상을 뒤로 한 채, 나는 빈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쏘다니던 나는 이윽고 오른쪽 뒷편의 끝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생판 처음 보는 여학생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잠을 설쳤나 보다. 그녀의 눈가 아래에는 거무죽죽한 기미가 깊게 파여 있었다.

"그럼, 이것으로 월향 고등학교 입학식의 개회를 선언하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정좌하여 주십시오."


이제 시작인가? 교사로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울리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앞을 바라보자 대강당이라는명칭에 걸맞게 거대한 강단이 있었다. 아마도 저 위에서 입학식을 진행하는  하다.

…그보다 월향 고등학교라니. 아무리 연애 게임이라 하더라도 어떤 미친 인간이 작명을이따위로  거야.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출신 학교를 밝혀야 되는 학생들의 입장도 좀 생각해주지. 대학교 면접 볼 때는 '안녕하세요 월향 고등학교의 OOO입니다~(찡긋)'이라고해야 되는 건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무심코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내젓고 만다.


"이어서 교장 선생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대충 짧은 개회 인사가 끝나고, 뚱뚱한데다 머리도 벗겨진, 영 어울리지도 않는 보라색 양복을 걸친 노년의 남성이 강단 앞으로 걸어 나온다. 아무리 명문사립학교라도 교장은 어느 곳과 다르지 않다는 걸까. 생각보다 평범한 교장선생님의 외형에 나는 조금이지만 놀랐다.

솔직히 배경이 되는 게임이 게임이니만큼 금장발의 화려한 미남이노래라도 부르며 멋드러지게 등장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을 산산조각 깨부숴준 교장선생님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하지만 그의 지루하고 기나긴 연설에는 도저히 감사하지 못하겠다. 대체 저 '마지막으로'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지? 나이 들면 다 저런거짓말을 좋아하게 되는 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족히 5번은 더 들은 듯하다.

처음엔 집중해서 듣던 나도 급격히 졸려왔고, 그것은 비단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곧 새액거리는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의 입은 닫힐 줄을 모르니,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알고서 저러는 건지.어찌 됐건  일관성 하나만큼은 가히 존경을 표할만 하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세상에, 우리 교장선생님께서는 입학해서 축하한다 한 마디로 정리될 말을 무려 30분이나 늘인 것이다. 실로 무서운 능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이 학교에 재학하고 있으면 이 연설을 언젠가  듣게  거라는 것.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자퇴하고 싶은 기분이 샘솟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학생들이 가득하다.

"흠, 그럼 이걸로 연설을 마치며, 다시  번 여러분들의 입학을 축하드리겠습니다."

모두 골아 떨어졌기 때문에 으레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희미했다. 사실 나도 아슬아슬했다.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부릅뜬 수준.평소라면 나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진즉에 골아 떨어져버렸겠지. 그럼에도 내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다음으로 제 22대 학생회장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바로 이것. 연설을 마친 교장이 퇴장하자마자 입장하는 작디작은 소녀의 신형에 꾸벅이던  눈이 번쩍 뜨인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턱을 괴고 꾸벅거리던 녀석들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보기위해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윤기가 감도는 검은색 생머리가 뒷자리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께까지 오는 강연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랑스러운 얼굴. 마치 천재화가가 손수 붓을 놀린 듯한 아름다움. 그저 연상만으로도 입가에 군침이 도는 것은 어째서일까.

 여기저기서 탄식소리가 이어졌다. 아마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귀여운 모습에 매료된 자들이 내뱉는 것이겠지. 물론 나도 그중  사람이었다. 비록 지난주에도 보고, 그저께도 보고, 어젯밤에도 보고 지난 몇 십 년간을 쭉 보았으나,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 당당히 서있는 그녀를 보는 건 이번이처음이니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이 핀 그 모습은 정말로 고귀해보였다.

그래, 그녀야말로 내가 이 꺼려지는 학교에 입학지원서를 넣은 이유.


"안녕하십니까? 학우 여러분."

맑고 낭랑한, 그러나 동시에 충분한 힘이 담겨진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려 퍼진다. 방금  교장선생님의 연설 때와는 달리 모두가  작은 소녀가 펼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마치 사람의 혼을 들이마쉬는 마성과도 같고, 밤하늘보다 새까만 두 눈동자는 천장의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난다.

 어려보이는 소녀가 바로 나의 언니다. 그리고 게임의 연적들  한 명이기도 했고.

굳이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나는 딱히 언니와 대립할 생각이 없으니까. 이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언니인데, 고작 남자  명 차지하고자 그런 언니와 대립한다고? 코웃음도  나올 헛소리. 설령 이 감정이 연정이 나리 하더라도 나는 깊은 애정을 언니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가족이라서 그러한 것일 지도 모르지만, 내게 있어 언니는 단순한 가족보다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는 내 언니이기 이전에, 나의 은인이었으니까.


"학교의 기상을 드높여라, 사회에 나가 성공해라, 따위의 시시한 소리들을 늘여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학창시절은 여러분이 지난 청춘의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의 인생은 고된 노력과 경쟁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법이니까요."


사실, 게임에서 나, 그러니까 주인공과 언니인 그녀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 아니, 좋지 못했다  한 마디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나빴다.

표면상의 관계는 다정한 자매 사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관계.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거슬리는 장애물쯤으로 여겼으며, 그렇기에 항상 두꺼운 가면을  채로 동생을 대했다. 바보 같은 주인공은 그 위장에 깜빡 넘어가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마냥 그녀를 동경하기만 했고.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동생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였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이상적인 누군가를 연기한다. 이상적인 언니, 이상적인 학생, 그리고 이상적인 연인.

게임 속의 그녀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제외한 타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첫사랑은 흑백의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다채로운 것. 따라서 그녀의 사랑은 지극히 의존적이었고, 광적인 집착이었다.

그런 비틀린 성격으로 인해 게임에서 그녀가 도맡은 역할은 광기였다. 점점 자신과 멀어지고 여동생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사랑을 질투해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자기 자신을 죽여버리는, 그런 비참한 결말이 그녀의 최후였다.

"따라서 저는 신입생 여러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학창시절을 부디 자유롭게 즐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물론 학생이니 마냥 노는 것도 그렇지만, 젊은 날의 시간은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처음에는 나도 언니를 경계했었다. 굳이 나서서 거짓의 관계를 쌓아올리고 싶진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언니를 피하고 멀리 했다.

적어도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때 언니가 달려드는 승용차로부터 날 밀치고 대신 치이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쭉 그런 어색한 관계를 유지해왔겠지. 그 일은 우리 자매사이의 전환점인 동시에, 내가 이 세계가 단순히 게임 속 세상이 아님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삶은 엄연한 현실이다. 확실히 게임 속 캐릭터인 그녀는 미쳐있을 지도 모르나, 나는  이상 그따위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바라본 언니는 누구보다도 상냥했고, 따스했으며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고 있었다. 뭣보다 그녀가 정말로 소시오패스였다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나는 내 언니를 좋아한다. 그것도 매우.


"…이상으로 연설을 끝마치며, 저의 비루한 말들을 끝까지 참고 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과거 생각에 젖다 보니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갔다. 어느덧 언니의 연설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울려 퍼진다.

전국의 재벌 2세들로 넘쳐나는 이 학교에서 특출난 배경도 없는 언니가 학생회장 자리에 오르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겠지. 하지만 언니에게는 그 정도 위치에 서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언니와 같은 나이에 그만한 인품과 카리스마를 갖춘 사람은 단언컨대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신입생 대표자의 장학 증서 수여와 입학 소감 발표가 잇따르겠습니다."

신입생 대표? 입학식에 그런 것도 있었던가? 들어본 적 없는 차례에 나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단상 위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교장이아닌 학생회장이 직접 하사하는 듯 아직 단상 위에 남아있는 언니가 상장 비스무리한 것을 들고 얌전히 서있었다. 과연 저 위에서 장학금을 전달받는 걸까. 모두의 시선이 한 점에  박히는 것이니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못할 일이다.

 그 대표가 나는 아닐 테니 그다지 상관은…

"입학생 수석, 이시아 학생은 단상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근데 저거,  이름 아니야?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시아 학생은 단상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또 한 번 이름이 불렸다. 그러나 그에 응해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싸한 정적이 흘렀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태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이시아 학생?"

──저거 나 맞잖아! 아니 무슨 학교가 사전 통보도 없이 이런 일을 시……되짚어보니 입학 수석 어쩌구하는 문자가 왔던 적은 있었다. 그런데 대충 보고 넘겼던  문자가,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나란 녀석은 대체 얼마나 바보인 건지. 자신의 한심스러움엔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다.

자책은 그만두고 일어나서 앞으로 달려나간다. 하필 뒷자리에 앉아서 단상 앞까지 오는 데만 해도  세월. 이내 계단을 밟고 헐레벌떡 올라가자 나를 본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예, 그…그럼 예정대로 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이런 사고를 예상치 못한 듯 사회를 맡으신 교사 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미안함과 쪽팔림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단지 쪽팔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준비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소감문 발표를 하는가.


"응, 응."


그때 아래서부터(위가 아니다)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의아함에 살짝 고개를 쳐들자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언니가 보는 순간 울어버릴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지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언니는 그 성모와 같은 미소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좋아. 여기서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해쳐나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