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두근두근 문예부
“아…그, 라면 많이 먹지 마세요. 체질이란 게 바뀝니다.”
나의 엉성한 소감 발표와 함께 입학식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각자의 교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가 배정받은 반은 1반. 다른 반들과 달리 1층에 위치해 있어서 다니기 편하다.
강당 건물을 나서 본관 정원을 지나치는데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주위를 둘려보자 원래 아는 사이인 듯 벌써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애들이 함께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지금껏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뭐, 성격상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남자가 여자가 된 반동이라고 하자. 걸즈토크 같은 거, 나에겐 너무 레벨이 높으니까.
"여긴가?"
'1-1'이라고 적힌초록 명패가 달려있는 교실의 문을 민다. 교실 안에는 이미 몇몇 애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빈자리를 찾다가, 창가 쪽의 맨 뒷자리에 가서 엉덩이를 붙인다.
얼마 안가 다른 아이들도 줄줄이 들어와서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는 끝까지 앉는 아이가 없었는데, 남자애들은 그렇다 치고 여자애들이 내 옆에 앉으려다가도 막상 나를 보면 뭔가 부담스러운 듯 자리를 피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급하게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보지만 언제나의 멀쩡한 얼굴만이 보인다. 결국 내 옆자리는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아무도 앉지 않았다.
"자 조용, 조용히!"
집중을 끌기 위함인지 교탁을 내리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성인 여성. 옅은 화장으로 더욱 돋보이는 성숙한 미모. 탄탄한 오피스 룩이 그녀의 볼륨 있는 몸매를 꽉 죄이고 있다.
뭐랄까, 선생님께 실례지만 그녀를 보면 이런 게 바로 여자라는 거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만다. 다른 사람 앞에서 하면 경을 칠 소리. 다소 헤벌쭉해져서는 학사 일정에 관련해서 설명을 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다행이 나의 음흉한 시선은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녀는 쭉 태연한 얼굴이었다.
"질문 있으면 하렴."
"이름이 뭐에요?"
"맞다, 깜빡하고 그만 말을 못했네. 선생님 이름은 나도연이야."
"애인 있어요?"
"안타깝게도…아니 그런 건 물어보지 말고."
나도연…응응, 외모와 걸맞게 예쁜 이름이다. 되도록 외워둬야지. 아니, 꼭 외워야지. 그리고 애인 없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꼭 필기해두도록 하자.
내가 드물게 진지한 태도로 열중하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교실 뒷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것은 가쁜 숨을 내뱉는 여학생한 명.
"하아…하아…죄송합니다."
"첫날이니까 괜찮단다. 길이라도 잃은 거니? 저기 가서 앉으렴."
"네…하아"
내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여학생. 그것은 고양이처럼 늘씬한 몸매가 인상 깊은 소녀였다. 소심하게 줄인 치맛자락이 무릎께 조금 위에서 살랑거리는.
눈매는 고양이처럼 앙큼한 모양새로 치켜 올라가 있었지만, 그녀가 얌전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인지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는다. 어깨 부근에서 자른 적갈색 머리칼은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상큼하게 빛나고 있다. 미소녀라 부르기에 적합한 그 아이는 어지간히도 급하게달려온 듯 상기된 뺨으로 고된 숨을 잇달아 토해냈다.
"안녕?"
"아…"
그녀가 손을 뻗기 전에 의자를 내빼주며 인사를 건넨다. 그제 서야 나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는 얼굴. 이윽고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매우 기쁜 듯한 얼굴로 나의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응, 안녕."
=
"들어올 때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뛰어온 거야?"
“응…일이 밀려서 말이지.”
"일? 알바라도 하는 거야?"
"응. 원래라면 어젯밤까지 마쳤어야 되는 일인데 너무 졸려서 그만…"
“뭐, 그럴 수도 있지.”
고개를 주억거리며수줍은 투로 말하는 그녀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다. OT 시간이 지나 종이 울리고 지금은 쉬는 시간. 나는 처음 보는, 하지만 어딘지 묘하게 익숙한 이 소녀와 간단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이 아직 맘이 맞는 친구를 못 사귄 건지 계속 혼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나도 알바는 방학 때 몇 번 해봤지만 학기 중에까지는 손댄 적이 없는데, 그걸로 입학식 날까지 지각하는 걸 보면 그녀도 어지간히 바쁜가보다. 혹시 나처럼 가정 사정이 영 좋지 않은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새하얀 피부와 마른 몸매가 이렇게 보니 영 안쓰러워 보였다.
"힘내자. 너도, 나도."
"으, 응? 어째서?"
말 안 해도 이해해. 그러니까 굳이 애써서 말할 필요 없어. 당황하는 그녀의 연약한 어깨 위로 턱하고 손을 걸친다. 앞으로는 내가 많이 도와줘야겠다. 이런 미소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도 기쁨이지. 싱긋하고 웃자 그녀도 나를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그나저나 시아가 수석입학자 맞지? 애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들었어."
"뭐…일단은 말이지."
"역시 시아는 대단하구나. 그 어려운 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하고…"
찬사에 가까운 그녀의 말과는 달리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에겐 전생의 경험이 있었고, 언니의 도움도 있었으니까. 그것들과 약간의 노력에 힘입어 원래의 주인공보다 한층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뿐이다. 아, 게임 속 주인공의성적은 중상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가 학교이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만.
그보다 '역시'라니, 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텐데, 내 이름을 아는 건 출석부를 봤을 테니 그렇다 치고 그녀는 이미 나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역시라니, 원래부터 날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네.”
"아 그, 그, 그건 말이지……그, 시아는 워낙 유명하니까 말이지. 인근 학교 애들이라면 다 알고 있거든."
어째선지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 하지만 그 의미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한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유명해?"
"응."
"어째서?"
"그야 엄청 공부 잘하고…엄청 모범생이고…또…엄청, 예쁘니까."
인근 학교에 소문이 날 정도로 자신의 능력이나 외모가 대단치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그렇다면 역시 내가 언니의 여동생이기 때문일까. 나보다 훨씬 머리 좋은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단 한 번도 시험에서 만점을 놓친 적이 없으니까. 공부만 빠삭한 나와 다르게 미술 음악 같은 예술 과목마저도 모두 만점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천사 같고, 엄청 귀엽기까지 하다. 이 무슨 완벽 초인. 솔직히 언니만 아니었다면 이미……아, 방금 전 발언은 실언.
뭐, 일단 칭찬은 고맙게 받도록 하자.
"고마워. 하지만 내 생각엔 네가 더 예쁜 걸."
"그, 그런…아니─"
-댕, 댕
"아, 종 쳤다."
때마침 울리는 수업 시작종에 이야기를 마친다. 자연스레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힐끔힐끔 내 쪽을 흘겨보았다.
아직은 살짝 어색한 사이. 그래도 계속 얘기를 나누다 보면 차차 좋아지리라. 그렇게 믿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수줍게나마 마주 웃어주는 그녀.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네.
"맞다.너는 이름이 뭐야?"
"나? 나는…"
다음 순간, 기분 좋게 퍼진 울림. 강선아.
그것은 게임 속 연적의 이름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