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두근두근 문예부 (5/73)



〈 5화 〉두근두근 문예부

고개를 쳐들면 푸른 색이 하늘 가득히 차있다.  중심에 있는 태양은 한없이 드높고, 흘겨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올 만큼 빛난다. 시간은 정오, 한창 바쁘게 쏘다니던 사람들도 마음을 가라앉힐 때.

오늘은 입학 첫날이었기에, 수업은 점심시간 직전에 끝났다. 명문고 치고는 꽤나 널널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적한 거리를 거닌다.

게임 속의 거의 모든 이벤트가 일어났던 곳, 이른  주 무대, 그 학교를 주인공의 몸으로서 처음 가보았다. 역시라면 역시랄까. 하교할 때까지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외톨이가 되는 건가라고 생각하면 보통으로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바로 그 친구가 게임 속의 연적 캐릭터였다는 점. 단지 얼굴만 보고서는 몰랐는데, 그녀의 입에서 이름을 듣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강선아. 게임 상으로는 첫 번째 공략 대상의 연적 캐릭터. 설마 등교 첫 날부터 조우해버리고, 친구 사이가 될 줄이야. 분명 게임에서의 그녀는 긴 앞머리와 두꺼운 안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오늘  그녀의 모습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화려하기까지 했다. 특유의 소심한 성격만큼은 그대로였지만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런 것보다 그녀의 밝은 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게임 속에서, 강선아라는 아이는 본래 그렇게 눈에 띠는 아이가 아니었다. 거기에 특유의 소심한 성격까지 더해져 그녀는 항상 자신을 숨기고만 살았다. 타인과의 접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그런 외로운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남자애가 한 명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친애와 호의라는 감정을 받아본 그녀는 바로 그 남자애에게 반해버렸으나, 불행하게도 그 남자애는 주인공의 공략 대상 중 하나였다.


지극히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그녀가 연적으로 속한 난이도의 루트는 모든 루트 중 최하였다. 오죽하면 그녀라는 존재가 말소되어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문제가 없을 지경이었다. 설사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유혹당하더라도, 그녀는 끝내 사소한 발악 한번 못해본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만다. 주인공을 질투하지만, 주인공이, 아니 타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 차마 다가가지도 못한다. 그녀는  정도로 폐쇄적인 인간이었다.


물론 내가 오늘 본 그녀 역시 소심하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병적일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내가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그녀는 웃으며 반응했고, 이후 다른 애들이 종종 말을 걸어왔을 때도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현실과 게임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겠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단지 그녀라는 번데기가 답답한 외피를 부수고 나비가 되어 직접 세상과 대면한 것뿐이다.  계기는 직접 물어 보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변화를 축하해주고 싶다. 뭐라 해도 그녀, 선아는 지금 나의 첫 번째 친구니까.

"다 왔네."


선아에 대한 것, 앞으로의 학교생활, 따위의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도착한 익숙한 현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문을 연다. 나보다 앞서 온 사람이 있는 건지 익숙한 신발 한 짝이 놓여져 있다.

신발을 벗은 다음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다. 매번 귀찮긴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언니나 엄마한테 혼난다.




"왔니?"

"응, 다녀왔어."



현관을 나서자마자 도도도 달려오는 발소리. 방금 돌아온 나를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는 언니에 나 역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학생회장인 언니는 보통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편인데, 드문 일이다.

설거지 중이었는지 언니는 빨간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분홍 앞치마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학교는 어땠어?"

"뭐…썩 괜찮았어."




점잖은 표현과는 달리 기분은 제법 들떠있었다. 처음에는 부자 학교라 해서 지레 겁을 먹었지만, 딱히 질 나빠 보이는 애도 없었고, 모처럼 귀여운 친구도 사귈 수 있었으니까.


……한  뿐이지만.



"그래? 다행이네. 점심 준비했으니까, 얼른 갈아입고 나와."


"배고파. 먼저 먹고 옷은 나중에 갈아입을래."




스윽 앞서나가는 언니를 따라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에는 소박하지만 맛나 보이는 가정식  상이 차려져 있었다. 화악하고 풍겨오는 군침 도는 냄새.

학교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점심부터 이러기는 힘들었을 텐데 말이지. 나와 같은 학생 신분이면서 언니는 거의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요리부터 청소, 세탁까지 언니가 손을 안 대는 영역이 없을 정도. 엄마가 있긴 하지만 직장을 다니느라 많이 바빠 집에 돌아오는 일 자체가 적으니까. 오늘 아침도 어제가 주말이었기에 얼굴이나 겨우  수 있던 것이다.

다행이 힘든 내색을 거의  비치는 언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에게만 모든 가사를 맡긴다면 나는 인간말종이겠지. 부족하나마 나도 틈틈이 언니를 도와주고 있다.



"어디 가?"


"설거지 다하고 먹을 거야. 그러니까 먼저 먹…"

"아, 안 되지, 그러면."

"꺄! 자, 잠깐 시아야…!"


차려놓은 밥은 거들떠도  보고 다시 싱크대로 향하는 언니를 붙잡고, 안아 올린다. 이른 바 공주님처럼 안겨진 언니의 하얀 두 볼이 새빨개졌으나, 아랑곳 않고 언니를 의자 위에다 조심스레 앉혀놓은 뒤 나 자신도 맞은편에  앉는다.

아무리 언니의 체구가 작다지만, 그래도 4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텐데 말이지. 쓸데없이 튼튼한  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육상부 같은 곳에서 권유를 받은 적도 꽤 있고.

"나머지 설거지는 내가 할게. 언니가 밥했으니까."

“굳이 네가 그럴 필요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됐지?"



그제 서야 침묵하고 수저를 들기 시작하는 언니. 그러고선 작게 한 입, 입에다 넣는데 마치 햄스터가 모이를 먹는 것 같다.


이렇게나 귀여운 사람이 사실 자신을 어찌 되어도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슬플 것 같은데, 상상만으로도 울렁이는 가슴.


오늘 게임의 무대가 되는 곳에 갔다 와서일까. 왠지 모르게 혼란스러워졌다, 라기 보단 불안해졌다. 밥을 먹다말고 괜히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언니를 빤히 쳐다본다. 살짝 빨개지는 언니의 양 볼가.

그녀도 선아와 마찬가지로 바뀌었을까?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저기 언니, 언니는 나를 좋아해?"

툭하고, 그런 말을 던진다.


"…"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역시  먹다 말고 이런 물음을 던지니 다소 뜬금없었겠지.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의 말을 내뱉으려 할 때.


엄마를 닮아 처진 눈매가 둥그스레 곱게 휘었다.




"──응, 좋아해. 세계의 모든 사람이 죽는다 해도, 시아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좋아해."


"…그래?"



어쩐지 조금 섬뜩한 답변이지만, 단순한 과장이겠지. 사실 쓸데없이  말도, 유려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겨우 눈웃음  번이었지만 충분히 전해진 언니의 마음에 눈 녹듯이 사르르 해소된 불안감.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한다. 그거면 됐지. 그거면 족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환히 웃어 보이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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