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두근두근 문예부
"야, 반장!"
수업이 다 끝나고 학교를 나오는 중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운동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녁놀의 햇살이 비치는 농구코트에는 공략대상 삼인 중의 일인, 최형곤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친구들을 데리고 농구 중이었는지 그의 다른 손에 들려있는 농구공 하나.
내 옆에서 같이 하교하고 있던 선아가 돌연 찾아온 그에 경계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들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초리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몸. 사랑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 혹시나 했지만 선아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아니, 오히려 대놓고 싫어하는 듯 보였다.
"왜 불렀어?"
"응? 그냥 반장이라서 부른 것뿐인데? 나 부반장이잖아. 아, 같이 농구나 할래?"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오늘 반장 투표 다음으로 이루어진 부반장 투표에서 당선된 사람은 바로 이 녀석이었다. 정작 반장 투표 땐 나를 추천해놓고 자기는 부반장 자리에 입후보하다니, 어지간히도 속모를 녀석이다.
그나저나 겨우 그런 이유로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를 불러 세운 건가? 하긴 이 녀석은 게임에서도 주인공한테 먼저 호감을 갖고 접근했지. 이 녀석을 보면 게임과 현실이 아주 다른 것도 아닌가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한테 같이 농구하잔 말을 던지다니, 대체 얼마나 천연인 거야.
그의 뒤편에서 같이 농구를 즐기고 있던 남자애들을 슬쩍 흘겨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모두가 나를 보고서 뻘줌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내가 남자애들 틈에 끼는 것은 좀 그렇지.
"시아야, 그냥 가자."
"뭐…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공 줘봐."
"여기."
옆에서 선아가 만류해왔지만 굳이 녀석이 주는 농구공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부반장인 녀석이라 승낙한 제안이었다. 적어도 사소한 친분쯤은 갖춰져 있어야 앞으로가 편하겠지. 서로 어색해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이런 몸으로 땀내 나는 수컷들 놀이에 참가할 생각은 없다. 문자 그대로 잠깐, 정말로 잠깐 어울려 줄 뿐이다. 무작정 녀석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뭐하고, 뭣보다 오랜만에 뜨거운 코트를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녀석에게서 받아들인 농구공을 땅바닥에다 몇 번 튀기며 코트의 3점 라인 근처에 선다. 그 다음 흐릿한 기억에 의지해서 슛 자세를 취한다.
왼손은 거들 뿐. 농구를한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기초적인 슛 방법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모 만화의 명대사를 되새기며 손목을 꺾고, 굽혔던 팔꿈치를 순간적으로 쫙 펴면서 손 안의 공을 던진다. 이내 깨끗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농구공은 슛대의 한중간에 맞더니 튕겨나가 그물 안에 안착했다.
"와…"
설마 연습도 없이 3점슛에 성공하리란 예상은 못 했는지, 최형곤과 주위 남자애들의 얼굴이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가자. 선아야."
"아…응."
언니한테서 오늘 학생회 일이 빨리 끝나서 일찍 돌아온다는 문자를 받았으니, 집에 가면 언니가 먼저 와있겠지. 더 이상의 시간을 그들에게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마찬가지로 얼이 빠진 선아를 데리고 재빨리 코트를 빠져나왔다.
=
"하아…"
무심결에 한숨을 내뱉자 뜨거운 김이 되어 퍼져나간다. 헐벗은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스한 물줄기. 전신을 감싸는 노곤함에 잠시간 멍을 때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샤워기를 잠근다.
여자가 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온몸이 찝찝하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보통 하루에 두 번은 샤워를 하고는 한다. 물론 밤에 하는 샤워는 머리까지 감지 않지만.
수증기가 잔뜩 낀 거울은 흐릿하게나마 내 알몸이 비추고 있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잘록한 허리 라인, 그리고 평탄한 하체 부분. 한동안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혀끝이 씁쓸해져온다. 이제 남자로서의 자신은 전부 망각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그런 것도 아닌 걸까. 몽실몽실, 구름처럼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의 잔재들을 지워내듯 나는 애꿎은 내 머리통에 대고 마른 수건을 박박 문질렀다.
대충 몸을닦은 다음 편한 옷을 걸치고 방으로 나온다. 거실에선 언니가 소파에 편히 앉은 채 재미도 없는 예능 프로를 시청하고 있었다.
언니는 대체 뭘 먹고 있는지 작은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는데,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노란 푸딩이었다. 일전에 내가 사준 고양이 잠옷을 걸친 채 푸딩을 떠먹는 그 모습이 정말로 어린애 같아서 픽하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샤워는 다 했어?"
"응, 그보다 한 입만 줘."
"자"
"핫!"
언니의 얼굴 바로 옆에서 아하고 입을 벌리자 물컹한 무언가가 곧장 입 안으로 들어온다. 혓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단맛의 유체. 비록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푸딩이지만 마찬가지로 저렴한 내 입맛엔 충분하다.
어느 성현의 말을 빌리면 자고로 단 것은 진리라 하였으니. 물론 실제로 그딴 말을 지껄인 사람은 없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것도 전부 다 여자가 되었기 때문, 그러니무심코 야릇한 신음이 튀어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원래 푸딩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언니의 옆에 자리를 잡고 몸을 내던진다. 소파 쿠션 위로 엉덩이가 맞닿자 그 반동으로 언니의 몸이 살짝 들썩거린다. 놀란 눈치의 언니. 작디작은 손이 뻗어져 군살 없이 매끈한 내 복부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무 챙겨줘서 돼지가 된 걸까…"
"돼지라니, 언니가 너무 미성숙한 거겠지."
이래봬도 몸매 관리는 완벽하게 한다고. 사실 쪼들리는 사정에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는 거지만,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할 얘기가 따로 있었지.
"요즘 학생회 생활은 어때?"
"언제나 똑같지 뭐.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니?"
"음…질문을 너무 포괄적으로 했나."
무심코 뒷머리로 손이 향한다. 그 순간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언니에 재빨리 손을 거둬들인다.
"정확히 그 부회장은 어때?"
"부회장? 성현이를 말하는 거니?"
"그래. 김성현, 그 선배."
김성현, 두 번째 공략 캐릭터. 수려한 외모와 길쭉한 신장, 특유의 냉정한 성격으로 인해 학교 내에선 얼음 왕자…로 통하고 있는 인기남이다. 허나 불행할 거 하나 없어 보이는 배경과는 달리 꽤나 아픈 과거를 가진 캐릭터인데, 이 상처 입은 늑대 같은 면모 때문에 아녀자들의 무리에서는 가장 큰 인기를 호가했었지.
아무튼 게임 속의 언니는 이유는 몰라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그의 옆에 서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학생회 부회장이 되었고,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은 모두 잔혹한 방법으로 쳐냈다. 이지메, 협박, 강간, 기타 등등. 살인만 하지 않았지 그 수단은 심할 땐 중범죄의 영역에 이르렀고, 심지어 그의 도촬 사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도를 지나친 열렬한 사랑. 아니, 그것은 사랑도 뭣도 아닌 광신이라고 밖에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열렬한 사랑의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당연하게도 비참한 최후뿐이었다. 이미 돌려본 비디오테이프처럼 결말이 뻔한 필연. 질리는 것을 넘어서 언니에 공포하게 된 그는 언니를 매도하고, 대신 지친 자신의 마음을 달래준 주인공을 선택한다. 그 결과 생애 처음으로 절망이란 감정을 깨달은 언니는 종국에 자신을 죽인다. 학교 옥상에서, 슝하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게임 안의 이야기.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언니를 누구보다 믿지만 서도, 그래도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진다면, 그때는 너무 뒤늦을 테니까.
그러니까 폐를무릅쓰고 언니에게 직접 물었다. 큼직한 까만 눈동자를 직시하며, 그녀의 진심을 유도했다.
이제 와서 언니를 떠나보내기에는 내 안에 있어 그녀라는 존재가 너무 커지고 말았다.
"성현이는…좋은 동료야. 응, 좋은 동료지. 일을 맡기면 조금이라도 싫은 티 없이 척척 해내고, 일처리도 굉장히 깔끔하니까. 아, 또 같은 학생회 여자애들한테 이상한 추파도 걸지 않아서 좋아."
"또?"
"또…라니, 정말 그것뿐인 걸?"
하지만 순진한 그 얼굴에 어떤 강한 감정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읊는 언니.
…다행이다. 그녀도 선아와 마찬가지로, 공략 대상에 대한 연정은 없나보다.
가족애가 지나쳐서 언니의 사랑을 가로 막으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남자와의 사랑만큼은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제발 바라건대 언니는 그런 남자에게 반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왕 반할 거라면, 그래. 자신의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싸줄 수 있는 남자에게 반했으면 한다. 그런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할까 의문이 들지만은.
뭐, 언니는 게임 속의 그 민폐성 캐릭터와는 다르니까. 요즘 보기 힘든 그런 남자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울 일은 아닐 테지. 상냥하고 귀여운 언니를 싫어하는 남자가 있을 리 만무하잖아.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너 혹시…"
"하? 아니야 그런 거! 나는 그냥 그 놈팽이가 혹시라도 내 언니를 채갈까 봐!"
"흐응…"
그래도 영 미심쩍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하는 언니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든 다음 내 무릎 위에다 앉힌다.
"잠깐, 시아야, 나도 이제 곧 성인인데…"
"기껏 걱정해줬는데 이상한 의심이나 하고 말이야. 그 벌이야."
괜히 삐친 척을 하면서 무릎 위의 언니를 곰인형처럼 꽈악 껴안는다. 그러자 처음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언니도, 곧 편안한 얼굴로 내 가슴팍에다 뒤통수를 기대왔다. 따듯한데다 푹신푹신하기까지 하니 정말로 인형을 안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벌이라기 보단 포상에 가깝지만, 뭐, 기분은 좋으니까 그걸로 만족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