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두근두근 문예부 (8/73)



〈 8화 〉두근두근 문예부

"하아…"

반장이 되어 처음으로 맡은 임무가 이런 귀찮은 것이라니, 손에 들린 공백의 A4 용지를 바라보니 절로 뿜어져 나오는 한숨. 현실 도피하듯 눈을 깜빡여 보지만 맨 위의 대문짝만한 궁서체는 싫어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국어문학 조별 과제 조 편성'.


'다음 주부터 조별 과제 할 거거든. 반장이니까 애들 조 좀 짜서 리스트 나한테 줘. 할 수 있지?'


아직 학기 초, 벌써부터 이런 수행평가를 하기 에는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거야  선생님의 생각 나름이겠지. 방금 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국어선생님의 말을 되새기며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필 담당 과목 선생님이 유행병에 걸려 병가를 낸 지금 통제인자를 잃은 교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저기, 애들아…"

교탁 앞에 서서 그렇게 운을 떼지만,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기울이는 아이는 없다. 심지어 이 쪽을 바라보는 아이조차 없는 판국.

으응, 역시 큰 소리를 내야 되는 걸까. 그런  별로 익숙지 못한데 말이지. 살짝 망설이며 교실 안을 둘러본다. 그때 내 역할을 대신하듯이 울려 퍼지는 다른 목소리.


"애들아! 반장이 할 말 있단다!"


…의외인데. 마냥 이상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조금은 수정해야 될 것 같다.

방금 전 대신 큰 소리를 내어준 남학생, 최형곤을 보며 살짝 미소 지어준 다음, 확실히  애들이 주목하는 것을 느끼면서 느릿하게 입을 뗀다.

"그…국어 선생님이 다음 주부터는 발표를 수업 대신으로 하신다네. 그래서 지금부터 조 편성을 우선 할까 하는데, 출석 번호 순서대로 이름 부를 테니까 불린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조 말하면 돼.
아, 그리고 한 조엔 최대  명까지고, 조 순번대로 먼저 발표하니까 알아두고."


1번, 강선아. 그렇게 설명하고는 맨 먼저 선아의 이름을 부른다.  씨인 만큼 당연한 순번이었다. 선아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막힘없이 1조를 말했고, 나는 다음 번호의 아이들도 일일이 출석부를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박  성인 아이들의 호명이 끝나고, 이 씨의 맨 첫 번째인 내 차례가 왔을 때 슬쩍 반쯤 채워진 명단이 적힌 칠판을 엿본다. 2조부터 8조까지는 인원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지만, 1조의 아래에는 가장 먼저 발표를 해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여전히 선아의 이름만이 있었다.

"나는 1조."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선아의 이름밑에다 내 이름을 적어둔다. 매도 빨리 맞는 편이낫다고, 굳이 나중 가서 조별 과제로 전전긍긍하기 싫을 뿐더러……무엇보다 내 쪽을 죽어라 쏘아보는 선아의 눈빛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재가 저렇게 의사 표명이 확실한 애였던가.

 그래도,  직후 선아의 만족한 듯한 미소를 볼 수 있어서 나 역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26번, 최형곤."

"1조."

…칼 같이 튀어나오는 대답.  녀석은 나에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으로 최형곤을 바라보지만, 그는 다만 언제나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저 녀석은 마냥 이상한 녀석이 맞았다. 수정해두었던 생각을 다시금 재수정한다.

"31번, 하현아."

"1조로 갈게."

그리고 흘러흘러 거의 마지막 순번에 다다랐을 때, 여성스러운 허스키 보이스가 고막에 와 닿았다.

조금 전에 입을 연 소녀를 쳐다본다. 짧게 친 단발에 중성적인 생김새를 갖고 있는 아이. 선이 얇은 얼굴은 미소녀보다는 미소년에 가깝다. 탄탄한 슬렌더형 체구와 여자치곤 큰 키가 그런 인상에 더더욱 힘을 실었다.

하현아. 털털한 성격과 수려한 외형으로 반의 인기인인 그녀는 며칠 전의 반장 선거에서 어쩌다 입후보한 나에게 밀려난 아이였다. 그녀 입장에서는 갑자기 난입한 부외자에게 반장 자리를 빼앗긴 셈이니 나한테 썩 좋은 감정을 안진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 다른 한 조가 남았음에도 굳이 나와 같은 조가 되겠다니.

심경의 변화인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람을 너무 옹졸하게 해석한 건지,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덤덤한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무언가 읽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번호를 호명한다. 그 번호가 마지막 번호였기에 조 편성은 다소의 곤혹감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그러면 이제 조끼리 앉아볼까? 1조나 2조는 좀 빨리 준비해야 될 테니까."

내 한 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며  또한 내 자리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조원들이 모여 앉아있었는데, 어째선지 선아는 입술을 삐쭉 내민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아야,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생리라도하나보다. 평소보다 탁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선아를 더 이상 자극 않기로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날의 여자는 같은 여자인 나로서도 무서우니까.

대신 다른 조원, 하현아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녀는 무언가 신기하다는 듯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현아 맞지?"

"의외네."

"응? 뭐가?"

"너 말이야."

내가? 의외?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구심이 표정 위에 드러났나 보다. 현아는 낮잠 직전의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샐쭉하게 휘며  의문에 답했다.


"처음엔 도도한 완벽주의자인줄 알았는데, 계속 보니 썩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생각보다 귀엽네."

내가 도도한 완벽주의자라니……순간 고풍스런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오호호 웃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뭐라 해도 지나치게 왜곡이 심하다. 그보다 마지막의 귀엽다는 말,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데.

양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현아를 보자, 그녀는 어느새 평소의 쿨한 미소 대신 꼭 여우같은 웃음을 나를 향해 짓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데?"

"뭐랄까, 콱 잡아먹고 싶은─"

"시아야, 조별 과제 얘기는 안해?"

"어? 응, 이제 해야지."


현아가 뭐라 말했으나 도중 치고 들어온 선아 때문에 듣지 못했다. 뒤에 말이 뭐였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에 다시 물어보기도 뭐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흐음…뭐, 아무튼 잘 지내보자."

"나도  부탁해."

얄상한 입술이 둥그스레하게 접힌다. 털털한 웃음과 함께 건네 오는 악수를 마주 웃으며 받아친다. 약간 서늘한 손이 나의 손을 맞잡는 게, 왠지 친구  명을 더 사귄 것 같은 느낌이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눈치 없이 번쩍 팔을 쳐드는 사내  놈.


"저기─"

"왜 그래?"

"나도 악수 좀…"

"싫은데?"

"…"


너는 좀 빠져 있으렴. 어울리지도 않게 삐진 표정을 짓는 최형곤을 무시하며 과제에 관한 내용을 입에 올린다.

"뭘 발표할 지에 대해선 대충 다 알지?"

"교과서 부록에 있는 내용 아냐? '20세기의 한국시인들' 이거."

"맞아. 그래서 우선 역할 분담을 하려고 하는데, 혹시 너희들 중에 ppt 만들 수 있는 사람?"

"아니, 못하는데."

"나도야. 한글이라면 모를까."

"…미안."

"괜찮아. 그럼 ppt는 내가 준비해오도록 할게."

다른 아이들 모두 내 물음에 난색을 표했지만, 딱히 예상외의 일도 아닌지라 태연하게 넘어간다. 아무래도 다들 고등학생이고 아직 이런 건 익숙지 않겠지. 오히려 겨우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하는 선아의 반응이 더 어색했다.

앞으로 만들 ppt의 대략적인 형태를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자기가 도움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인 선아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손바닥에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심신을 안정케 해준다. 그렇게 계속 쓰다듬자 하얀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어쩐지 애완동물 같다. 조금만 더 하면 왠지 야릇한 신음이라도 튀어나올  같아서 손을 거둬들인다. 그제서야 선아는 고개를 쳐들고선 아쉬운 듯이 내 손끝을 바라보았다.


"이제 발표자만 정하면 되나?"

"아, 발표도 내가 할게."

"뭐? 하지만 그럼 네가 거의 하는 건데?"

"그래도 ppt 만든 사람이 발표도 하는 게 제일 낫잖아.“

이러면 내가 혼자  떠맡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이다. 아직 고등학생인 애들한테서 대학생들처럼 능률적인 협업(딱히 그렇지도 않지만)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서는 그나마 내가 나서는 편이 낫겠지. 그저 대놓고 먹튀하려는 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쁜 걸.

"안 돼."

"선아야?"

"너한테 다 떠넘기고 맘이 편할 것 같니? 뭐라 해도 너만 힘든 것은 싫어."

"정 그렇다면 자료 조사같은 걸…"

"자료 조사라고 해봤자 별로  일은 없잖아. 어차피8할 이상은 네가 다  걸?"


선아와 현아한테서 차례대로 들어오는 원투 펀치. 나는 그냥 내가 마음 편한 방식을 제안한 건데,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곤란한 기색을 표하자 조의 유일한 남자인 최형곤이 나섰다.

"자자, 모두 진정하고. 확실히 우리들이 ppt를 못 다루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시아 양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것도 무리라고 나는 생각해. 아무래도  혼자 하는 것이니 불안하기도 하고."

"그런…"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건데, 우선 ppt와 발표는 반장 혼자서 준비하고, 나머지 애들이 발표문을 써오는  어때? 어차피 주제가 ‘20세기의 한국시인들’이니 굳이 어렵게 분량 나눌 필요 없이 각자 한 명씩준비해 오면  아니야.“

"나쁘진 않은데…"

녀석이 내놓은 것 치고는, 아니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안이다. 만일 녀석의 말 대로 한다면 팀 내 공헌도가 한 사람에게쏠리는 일도 없을 테고, 나도 한결 편해진다.

그건 그렇고…이시아 양이라니, 나를 쪽팔리게 해서 죽일 셈이냐.

"그럼 모두 교과서도 좀 읽어보고, 다루고 싶은 시인 하나씩 준비해와. 자세한  다음에 따로 만나서 얘기하자. 시간과 장소는 결정되면 카톡으로 쏠게.
그리고 제안은 확실히 좋지만, 그런 호칭은 그만둬."

"아, 그럼 이름으로 불러도 돼?"

"…맘대로 해."

그러자 '아싸!'하고 소리치면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드는 녀석. 괜히 띄워준 건가 싶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에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 또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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