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두근두근 문예부 (9/73)



〈 9화 〉두근두근 문예부

"여긴가?"


눈앞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펼쳐지는 내부의 공간. 사방에 가득한 책의 무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학교 자체가 커서 그런지 도서관도 그 규모가 방대하다. 대충 훑어보아도 웬만한 지역 도서관 수준. 이 정도면 원하는 책을 찾는 데만 해도  걸리지 않으려나. 감탄성 하나를 내뱉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하교 시간이라 크디큰 도서관의 공간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일을 보고 있어야할 사서 선생님도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오니 옛날 일이 떠오르네…아, 이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조별 과제 때문이다. 나는 일단 발표 파트를 맡고 있지만,PPT를 만들 때 어느 정도는 자료 조사를 해오는 편이 좋을 테니까.

도서관의 내부 정경을 쭉 훑어보다, 이내 시문학 관련 코너를 발견하고서 다가간다.  키를훌쩍 넘는 책꽂이를 아래서부터 천천히 훑어본다.

"앗, 찾았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서재의꼭대기 층을 올려다본다. 그곳을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어 보지만, 까치발까지 들어도 닿지 않는다. 지금의  눈높이로서는 그저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높이.

나는 여자 치고 작은 편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헛바람이 들어가 빵빵해지는  볼가. 166센치, 여성으로서는 이상적인 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건장한 남고생이었던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작다.

아무튼 지금의 내 신장으로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하다못해 밟고 올라갈 것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주변에 그런 물건은 눈에 띠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선 다른 서적을 찾아보려 할 때,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낮선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아니, ‘낯선’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 몸이 굳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기시감때문이었으니까.

움직이는 다리, 두근대는 심장, 미약한 짜증 때문에 조금 흐트러진 호흡,  모든 것들을,  묘하게 귀에 익은 소리는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정지시켰다.

"신입생 같은데,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본다. 지나치게 느끼하지도 굵지도 않고 딱 듣기 좋은 중저음. 조금 전은 무심코 낯설다고 표현했지만, 이 소리는 분명 귀에 익은 소리다. 단지 그것이 화면 너머의 음성이었기에, 잠시 현실과 혼동한 것뿐이다.

그래,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껏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그의 은밀한 비밀들도.

"아…"

"너는…"

가늘지만 뚜렷한 눈썹, 그래서인지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할 것 같다.깊게 패인 인중 밑의 얇디얇은 입술은 선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다. 첫눈처럼 하얀 피부는 웬만한 여자들보다  투명했으며, 목울대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흑발은 분명 남자의 것인데도 요염하기 그지없어서 손끝이라도 잠깐 닿고 싶어진다.

마치 설산 꼭대기의 만년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냉혹하리만치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모. 차디찬 아이스블루빛의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김성현. 분명 게임 상으로는, 얼음 왕자라고 했던가? 본래 이런 식의 호칭은 오글거리고 유치해빠졌다 생각했었지만, 그것을 무심코 인정해버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다.

가출한 정신을 다시금 제자리에 집어넣고서, 똑바로 그의 눈빛을 직시한다. 내가 잠시 넋이 나갔나 보다. 아니면 귀신에 홀렸거나.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얼굴 따위를 멍하게 쳐다보다니.

지금껏 쌓아온 16년간의 알량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 왠지 모르게 초조해져서 입술을 이빨로 씹어 누른다. 입술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얕은 고통.


"그렇군. 네가 바로 그녀가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말하던……혹시 너, 나를 아나?"

대체 뭔가요.  3류를 넘어서 저질스럽기까지 한 작업 대사는.

하지만 그 따위 대사도 그가 말하니 마치 영화 속의 배우가 대사를 읊는 듯 멋지게 들린다. 과연, 이것이 바로 외모의힘인 걸까? 더러운 세상.

어쨌든 여기서는 그를 모른다고 해야겠지. 부학생회장인 그는 워낙 유명한 존재이니 이름과 얼굴쯤이라면 알아도 상관없겠지만, 그와는 아예 접점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다. 최형곤 때도 그랬지만, 그는 더더욱 말이다.


"모르는데요."

"그래? 흐음, 나는  알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 그래서 지금 어쩌라는 겁니까, 저보고. 미묘하게 미간을 좁히자, 그는 그런 날 보고서 픽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시현의 동생 맞나?"

"맞는데 그걸 어떻게…"

이시현은 내 언니의 이름. 허나 그것이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한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회장이 자주  얘기를 했거든. 자랑스러운 여동생이라면서 말이지. 사진도 가끔 보여줬다."

"…"


웃음기 섞인 그 말에 단번에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 아니 언니…, 그런 팔불출 부모 같은 짓을 남 앞에서 하다니. 집에 돌아가면 그런 짓은 자제해달라고 말해야겠다.


"저위에 있는 책을 가져가려 하는 건가? 여기 있다."

게임의  만남에서 김성현은 그 별명답게 주인공을 까칠하게 대하는 걸로 기억하는데, 나의 언니 덕분일까. 나라는 이방인에게 접하는 그의 태도는 내가 아는 그와는 달리 물렁했다.

사실 말이 얼음왕자‘지’. 그는 원래부터 차가운 성격의 캐릭터는 아니었다. 오히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옛날에는 꽤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단지 어린 시절에 생긴 컴플렉스가 그 장점을 덮어버릴 정도로 컸던 것뿐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어린 날의 악몽을 떨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캐릭터가 바로 그라는 남자.

까놓고 말해서 그는 성숙한 사람은 못 되었다. 설사 겉이 성숙해 보일지언정 속은 어디까지나 어린 사람이었다.따라서 그와의 연애는 실상 고난에의 루트였다. 컴플렉스 때문에 자만감과 열등감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그의 성격은 확실히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으니까. 결국 그 삐뚤어진 가학심 때문에 루트 진행 내내 쉴 새 없이 구르게 되는 주인공.

더군다나 선택지 난이도도 세 루트 중 가장 높다. 처음에 일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선택지를 고르면 호감도가 되려 떨어지는 현상. 그렇다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면, 나중에는 그것대로 호감도가 떨어진다. 뭐 어쩌란 거야.

무엇보다 그의 가정사는 그라는 개인보다 훨씬더 정상이 아니다. 만일 게임에서처럼 나와 그가, 혹은 언니와 그가 이어진다면 그거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우선 나는 문제없다. 아직은 남자에 대한 꺼림칙함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일은 만약에라도 없으나, 문제는 내 언니.

저번에도 이야기를 나눴듯이 둘 사이에 연애 감정은 없어 보이지만, 단지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언니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른다.

일전에는 이 세상은 한낱 게임 따위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럼에도  남자만큼은 피하고 싶다. 왜냐면 아직은 그의 존재에 대해서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 어찌 보면 이것도 노파심이다.

…사고가 너무 딴 곳으로 샜다. 언니와 선아가 바뀌었다면, 그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 대해서 다급한 속단은 좋지 못한 걸.

게임 내에서, 그와 함께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결국 파멸밖엔 없으니까. 그 사실에 조금 흥분해버려서, 그만 애꿎은 땅에 삽질을 하고 말았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불과 며칠 전에 재확인한 진실이 아닌가. 적어도 인간관계에 있어서까지 그런 데이터 쪼가리 따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감사합니다."

뭐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용무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나는 그. 그제서야 사라지는 모종의 불안감에, 이제껏 참고 있던 숨을 푸욱 내쉰다. 뭐라 지껄이던 간에 역시 불편하다.

홀로 남게 된 나는 그가 뽑아준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우연찮게 펼쳐진 페이지에선 소담한 필체로 이런 시가 적혀있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솔직히,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가끔은 이런 감성에 젖어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가만히 서있는 건, 멋드러진  때문이라기 보단 폭풍처럼 스쳐지나간 그의 존재에 대한 미량의 의혹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