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두근두근 문예부 (10/73)



〈 10화 〉두근두근 문예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짤랑거리는 종소리. 작고 한적한 카페 안, 적당히  곳을 찾아 앉는다. 손목에  시계는 오후 2시의 20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너무 빨리 와버렸나?"


오늘은 주말, 평소보다 여유로운 분위기의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있다. 이런 좋은 날에 어째서 내가 집 안에서 뒹굴거리지 않고 밖에 나와있느냐면, 바로 조별과제의 모임 때문. 하지만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좀 빨리 집을 나선 모양이다. 방금 전 주문한 에스프레소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스르륵 두 눈을 감는다.

도서관에서  남자, 김성현과 만난 것 때문인지 어젯밤은그만 잠을 설치고 말았다. 덕분에 엄청 피곤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보다 나른한 몸. 늘어지는 하품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딱히 그 남자에게 설렘을 느껴서 잠을 설친 것은 아니다. 게임 속의 캐릭터와 마주칠 때마다 정신 소모가 큰 것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물론 선아나 언니는 이제 예외지만.

그나저나 이렇게 오랜만에 카페를 찾아오니 옛 생각이 나네. 카페에 처음 왔을 때, 그때는 멋도 모르고 대충 있어보이는 이름의 커피를 주문했었지. 아무튼 너무 써서 바로 뿜어버렸지만. 다시는 카페인 따위를 섭취하나봐라 하고 아득바득 이를 갈았었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화가 났고 곤혹스러웠던 경험.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것마저도 곧 추억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부족한 기억력은 대체 어디까지 과거를 미화시키는지, 이제는 까마득 해져버린 전생까지 떠올리며 내가 시킨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진한 흑갈색 표면 위로 그런 나의 얼굴이 잔잔히 떠올랐다.

"앗"

그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볼가에 와닿는다. 휙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언제 온 건지 모를 선아가 얼음조각이 동동 떠있는 아이스티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정말, 사람이 온 것도 모르고."

"미안, 잠시 멍때리고 있었어."

그렇게 사과하면서 선아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결코 음란한 뜻으로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 선아가 입고 온 옷 때문이었다.

오늘의 선아는 언제나의 교복 대신 치맛단에 레이스가 달린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선아의 가녀린 몸매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코디. 거기다 고양이 같은 얼굴에 걸친 옅은 화장이 상큼함을 한 스푼 끼얹어준다.

"응, 귀엽네."

"으, 응? 뭐가?"

"네가."

"…"


아, 또 빨개졌다. 새하얀 살결 때문에더욱 두드러지는 색 변화.


"그, 그러는 너는 옷차림이 그게 뭐니?"

갑작스런 지적에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그러자 보이는 현재 나의 옷차림. 목이 늘어난 검은 티셔츠 위에는 중학교 때부터 입고 다니던 국방색 점퍼가 걸쳐져 있고, 밑엔 헐렁한 츄리닝이 길쭉한 다리를 가리고 있다.

확실히 너저분한 차림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바꿀 수도 없는 게, 이건 어릴 때부터 이어져  버릇 같은 거라서 말이지. 아마 얼마 남지 않은 남자로서의 잔재이겠지.

내가 이런 꼴로 외출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언니가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기껏 언니가 골라준 옷들도 입기만 하면 어딘가 불편하고 답답하기 일쑤라, 아무튼 평범한 여자옷은 여러모로 무리.


"다음에 쇼핑이라도 같이 가자."

쇼핑, 특히 여자와의 쇼핑은 많이 서툰데.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선아의 얼굴이 너무 비장해보여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다 와있네?"


다음에 온 것은 현아와 최형곤,  둘이었다. 카페 앞에서 마주친 것인지 유리로 된 문을 밀면서 거의동시에 들어오는 둘.

현아는 거친 느낌의 청자켓에 허벅지 아래가 다 드러나는 짧은 핫팬츠를, 최형곤은 밀리터리 빛깔의 야상에 무맆이 찢어진 흑색 진을 입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 꽤나 멋을  듯한 옷차림. 그게 아니면, 모델이 워낙 좋아서일까? 마치 화보 속의 사진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둘의 모습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최형곤이야 원래 성격은 둘째 치고 외모만큼은 좋은 녀석이었다지만, 오늘의 현아는 기존의 중성적인 이미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여성스러웠다. 그것도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어른 여성의 느낌.

…으음, 확실히 나만 이렇게 입고 있으니  그렇긴 하다. 다음부터는 옷차림에도 좀 신경을 쓰도록 할까나. 교복이 아닌 치마는 아직도 부끄럽지만.

"…다음에 같이 옷이나 사러가자, 우리."

"…아무리 원판에 자신이 있다지만,  옷은 좀 아니지 않아, 반장?"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있는 자리로 다가오자마자 선아와 비슷한 말을 건네는 둘. 그보다 원판에 자신있다니……과한 발언이야. 나는 그냥 차려입는게 남들보다 서툴 뿐인 걸.

하여튼 옷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이 삐까뻔쩍 빛나는 무리 사이에 껴있으니 괜히 기가 죽는 느낌이다. 그동안 적어도 평균 이상은 가는 외모라고자부해왔지만,  알량한 자존심도 이렇게 있으니 산산조각.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져온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얼른 과제나 마치자."



=



"후우…"

노트북의 뚜껑을 탁 소리나게 닫으며 기지개를 쭉 켠다. 오랫동안 컴퓨터를 붙잡고 있다보니 어깨가 땡겨온다. 뒷목도 함께 쑤셔와서 목을 빙빙 돌린다.


"으아, 드디어 끝났네."

"예상보다 오래 걸렸네?"


차례대로 최형곤, 현아가 지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반면 선아는 아무 말도 없이 새로 주문한 딸기 스무디의 빨대를 쪽쪽 빨았다.

조별 과제는 3시간만에 마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PPT 작업만. 그 일은 조에서 유일한 PPT 경험자인 내가 맡아야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내일 해야될 것만 같다. 어젯밤 잠을 설친 것도 있고, 모두 같이 모여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조금, 아니 많이 피곤하다.


"모두 수고했어. 수정한 파일은 나중에 단톡방에 올릴 테니까, 그때까지 푹 쉬어도 돼."

"괜찮겠어?"

"어차피 별로 시간이 걸리는 일은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마."


걱정스러운 듯 물어오는 최형곤을 안심시킨다. 뭐 어차피 학생 PPT니까. 그냥 대충 깔끔하게만 다듬으면 되겠지. 괜히 휘리릭거리는 요상한 애니메이션을 넣는다거나, 번쩍거리는 효과를 준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뜻.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저녁은 외식하기로 했거든."

"…나도,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는 현아와 선아.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그녀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뒤,  또한 주섬주섬 내 짐을 챙긴다. 나야 딱히 예정된 약속은 없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쉴 생각이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하지만 그 순간, 가방을 잠그는 내 손목을 딱 잡아채는 최형곤의 손. 크고 따스한 느낌이 손목 아래의 동맥을 스쳐지나간다. 남자의 손이란 게 이렇게나 컸던가?

외간 남자에게 손이 잡힌 격이었지만 어째선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라 팔을 뒤로 당긴다. 그러나최형곤의 손아귀는 그리 간단하게는 풀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불쾌하게 느꼈다면 미안해. 그래도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여전히 손목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는 최형곤에게 으르렁대듯이 말한다. 나름 위협을 가하고자 목소리는 일부러 낮게 깐 채.

하지만 나의 위협 따위는 그저 귀엽다는  녀석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고, 이내 능글맞은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하는 녀석.

"솔직히 말해서, 나 오늘 과제 열심히 참여했지? 의견도 제일 많이 내고, 분량도제일 많이 짜내고."

"…뭐어, 그런데?"


어딘가 한량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늘 토의에서 최형곤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들을 밝혔고,  대부분이  나쁘지 않은 안들이었다. 녀석을 다시 보게 된 계기이기도 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래도 갑자기 남의 손을 붙잡고서 이런 말을 하는 저의는 도무지 모르겠는데 말이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그렇다면 퍽이나 귀엽겠다.

"그렇다면, 조장이자 반장인 네가 있는 힘껏 노력한 나에게 포상 하나 쯤 선사해주는게 어때?"

"하아?"

뭐, 포상? 이게미쳤나, 라는 뜻을 담아 최형곤을 노려보지만 되려 제 얼굴을 더 들이대는 녀석.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무심코 고개를 뒤로 빼고 만다. 뭐, 뭐야. 지금 내가 자기보다 못 생겼다고 외모 과시라도 하는 거야?


"별 거 아니야. 그냥 함께 가서 어울려 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

"하아…일단 들어나 보자. 그게 어딘데."

여기서 계속 이녀석과 입씨름 해봤자  머리만 아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체념한 기색을 내비지차 한결 짙어지는 최형곤의 웃음. 왠지 낚시꾼이 말하는 '걸려들었구나~!'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떨떠름해진다.

"PC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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