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두근두근 문예부
"좀 어색한가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PC방은 전생에는 물론이고 현생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으니까. 저기서 중학생들로 보이는 무리가 신나게 떠들어재끼던, 족히 마흔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가 담배를 뻑뻑 펴대며 훌라훌라를 치던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 몸으로, 그것도 남자와 함께 오게 될 줄이야. 그것만큼은 예상외였다. 사귀지도 않는 이성과 함께 이런 곳을 오자고 하는 괴짜는 그다지 없으니까.
내가 들어오자마자 힐끔대는 시선들 때문인지, 그동안 의식도 않던 최형곤의 동태가 괜히 신경 쓰인다. 옆 좌석에 짐을 내려놓는 최형곤을 힐끔 훔쳐보니, 녀석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역시네. 실은 남자애들끼리 롤 얘기할 때 네가 은근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아서 여기 오자고 한 거야. 같이 한 판이나 땡기자고."
"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봤었구나. 왠지 녀석이 나를 이상한 여자라 여길 것 같아서 살짝 고개를 수그린다.
“별로 이상하다곤 생각하지 않아. 여자도 게임할 수 있지 뭐. 남자애들 얘기에도 네가 끼어들고 싶으면 껴도 돼. 개들도 처음엔 어색하겠지만 일단 네가 말을 걸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지 기뻐할 거야.
하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 부자 학교의 남학생이라고 해서 다른 남자애들이랑 다른 건 아니니까."
"너도 장학생이야?"
부자학교의 남학생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녀석과는 먼 느낌이라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최형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오늘 모임에서 보인 모습도 그렇고, 그저 실속 없이 능글맞기만 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제법 착실한 녀석이잖아.
"응, 솔직히 말해서 가정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야. 여동생 수술비만으로도 빠듯하거든."
"수술비라니, 여동생이 많이 아픈 거야?"
"그래도 지금은 꽤 괜찮아졌어. 아직도 입원중이지만."
푹신한 가죽 의자 위에 털썩 엉덩이를 붙인 녀석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환한 미소에선 약간의 아련한 감정이 배어나왔다고 한다면 그저 내 눈의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게임에서의 최형곤이라는 캐릭터도 그와 같은 뒷배경을 가지고 있었지. 불치병으로 장기입원중인 그의 여동생과 고액의 수술비. 단순한 샐러리맨에 불과한 부모의 월급만으로 감당하기힘든 수준의 비용에 학생인 그마저도 아르바이트 여러 개를 뛴다고 하는 설정이었다.
게임 속에서의 그는 항상 시간에 쫒기는 모습을 보였다. 학교에선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에 전념해야 했고, 주말에는 쉬지도 못한 채 알바를 나가야 했다. 방학 때가 되어서도 아르바이트로 꽉 찬 스케줄. 이렇듯 그의 삶에 여유란 없었다. 오로지 일, 그리고 일과 일……노동의 무한한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세상이나 자신의 여동생을 미워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착한 자신의 여동생을 누구보다 더 사랑했고, 언젠가 행복이 찾아올 거라 믿으며, 항상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었다.
물론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게임 안에서의 이야기, 현실에 완전히 적용하기란 무리일 테지. 하지만 바뀐 것이 있으면 바뀌지 않은 것 또한 있지 않을까? 비록 무대는 PC의 작은 모니터에서 웅장한 현실로 바뀌었다지만, 최형곤은 게임에서의 그와 같이 긍정적이고 마음 넓은 아이로 보인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가 호감을 안을 법한사람.
이것은 게임 속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지켜보아온 녀석의 모습을 통해서 도출해낸 결론. 돌이켜보니 부반장이라는 이유로 싫은 일을 떠맡을 때도 녀석은 항상 웃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었지. 그리고 적어도 내 눈에는, 그 미소에 거짓이란 없었다.
"괜한 얘기를 해버렸나? 미안. 분위기만 어색해졌네."
"그렇지도 않아. 사과할 필요 없어."
"아무튼, 기껏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얘기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얼른 컴퓨터나 키자. 내가 오자고 했으니까 돈은 내가 낼게."
그렇게 길어질 조짐을 보이던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이내 게임 세 판을 잇달아플레이하고, 전적창에 승리 세 개를 기록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컴퓨터를 껐다. 한참 즐기다보니 어느덧 일곱 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
"의외로 엄청 잘하는데? 마냥 범생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헹! 다이아 티어를 물로 보지 말라고, 이 골딱아."
"큭!"
흠뻑 젖은 행주처럼 축축 쳐져있던 아침과는 달리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승리에 도취해서 자만에 찬 대사를 내뱉기까지 한다.
나의 활약으로 게임에서 이긴 것도 기뻤지만, 뭣보다 오랜만에 남자였을 때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서, 그 점이 무척 기뻤다. 얼 굴 위로 헤실거리는 웃음꽃이 저절로 피어날 정도.
"후아…아무튼 덕분에 즐거웠어. 고마워."
"그거 참 다행이네. 돈 내고 올 테니 잠깐 기다려."
얼마 안가 돌아오는 최형곤. 그새 자판기에 들렀는지 녀석의 손에는 캔커피 두 개가 들려있었다.
"목마르니까, 가면서 이거라도 마셔."
"아 땡큐."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뭐 다음에는 내가 쏘면 되겠지. 가볍게 넘기며 뚜껑을 따자 딱, 하는 소리가 경쾌히도 울려 퍼진다.
언뜻 달면서도, 미묘하게 쓴 처음의 한 모금을 음미한 뒤, 우리는 함께 PC방을 나섰다.
"데려다줄까?"
"별로 늦지도 않았는데 뭘."
길이 반대편으로 갈리자, 자연스레 데려준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최형곤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남자라서 그런지 나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커 보인다. 체격도 은근 넓어서 나 같은 건 품 안에 쏙 들어갈 듯 보인다.
어떤 사람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그렇다면 나와 이 녀석의 관계도 마찬가지일까.
처음에 나는 최형곤을 이상한 녀석이라 여기고 피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멍청한 뻘짓이었다. 함께 있다 보니 뚜렷하게 전해지는 이 아이의 장점. 다소 짖궃기는 하지만, 같이 있으면 상대방도 함께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는 아이. 게다가 지금껏 알게 모르게 나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 최형곤을 기피했던 이유도 꽤나 웃기다. 그가 내게 반할 지도 몰라서라니, 게임의 경험이 있긴 하나 솔직히 너무 오만에 가득 찬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여학생일 뿐이고, 그는 만인의 사랑을 차지하는 인기소년이니까.
아무리 이 세상의 베이스가 소녀 취향의 게임이라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매달린다면 모를까. 반대로 그가 내게 매달리는 일은 없으리라.
응, 시원스럽게 인정하자. 내가 바보 같았다. 그리고 최형곤이 어떤 인간인지를 어느 정도 파악한 지금,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
"잘 가. 나중에도 이렇게 같이 게임하자."
"응, 그럼 내일 또 봐."
헤어지기 직전, 나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어서 그도 나와 같이 작별 인사를 해왔다.
'우리 친구 맞지?' 같은 싸구려 대사는 나도 그도 입에 담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란 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친구 아닌가. 성별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도 웃고 나도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니까.
".""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 나갔다.
우선오늘을 즐기자. 그리고 보다 재밌어질 내일을 기약하자.
어둠을 밝히는 화려한 네온사인, 저마다의 바쁨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 홀로 돌아가는 귀갓길의 도중에, 문득 그런 글귀가 떠올랐다.
=
-끼릭
그 시간에도 그녀를 지켜보는 눈은 쉼 없이 번뜩이고 있었다. 도시 한구석의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조차, 그 눈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눈은 다만 언제나와 같이 쭉 그녀를 지켜보았고, 그것은 별 다를 것도 없는 하루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