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두근두근 문예부
"반장 그거 알아? 부반장 갑자기 전학 갔다는데?"
"…뭐?"
다음 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나에게 찾아온 것은 모르는 여자애의 호들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선생님이 지나가시면서 그렇게 말했어. 부반장이 전화로 선생님한테 갑자기 전학 가겠다 말하고 뚝 끊었다나봐. 선생님이 놀라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없는 번호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구. 바로 어제 만났던 애인데, 말도 없이 하루 만에 전학을 가버렸다고? 말이 안 되잖아."
이 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워낙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짜증 섞인 물음. 이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서도 사소한 행동거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낸 다음, 어제 같이 놀면서 건네받은 최형곤의 번호를 찍는다. 곧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연결되는 통화.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보아도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부재를 알리는 안내음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
처음엔 무슨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줄 알았다. 하지만 통화를 건 직후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문구가 들려왔을 때, 나는 비로소 현실을 자각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반을 둘러보자 모두 아직 경악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아마 지금의 나도 저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설마 연락되는 애가 아무도 없는 거야?"
"응…"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녀석, 최형곤은 가버린 것이다. 이렇게나 홀연히, 고작 하룻밤 사이에, 모든 자취를 감추고서.
"이게 뭔…"
전날의 선명한 기억들이 거품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같이 조별 과제 토의를 하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그랬던 게 불과 하루 전인데.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녀석. 심지어 연락처마저 지워버리며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어제는 토의에도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던 애가 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러는 건지. 이사실을 알려준 여자애한테 힘없이 '고마워'라고 말한 다음 교실 뒤쪽의 자리에 가 털썩 엉덩이를 붙인다.
"…하아."
정말로 전학 가버린 거야? 기존에 쓰던 전화번호까지 없애가면서? 혹시 몰라 다시 한번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봐도 뚜뚜뚜 거리는 기계음만이.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터럭 같은 한숨.
내가 그렇듯이, 그에게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 그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떠나기 전에 한 마디 언질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좋을 걸. 나름 친구가 되었다 생각했었는데, 겨우 그 정도도 못 해주는 걸까. 아무리 하루 만에 급격히 친해진 사이라 하더라도 제법 죽이 잘 맞던 녀석이었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작별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사람의 정신을 빼앗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방심하던 사람의 뒤통수를 쾅 때리는, 그런 못된 귀신에게.
"어, 시아는 이제 왔네?"
"…응, 안녕. 선아야."
"히힛"
놀람을 삭히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와중 선아가 내게로 다가왔다. 화장실에 갔다 온 건지 손에 축축한 물기가 남아있는 선아는 내 옆자리에 앉자마자 내 품에 장난스럽게 안겨 들어왔다. 배꽃 같은 웃음을 배시시 걸친 그 얼굴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개운하고 환해 보였다.
평소라면 나 또한 그런 선아를 기쁜 얼굴로 마주 안아주었을 텐데, 지금은 입꼬리를 올릴 만한 기력조차 없다.
"아, 그 소식은 들었어?"
"형곤이 말이야?"
여기서 던질 화제가 무엇인지는 뻔하지, 다소 침체된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답한다. 반면 선아의 어조는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연어처럼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형곤이라니, 어느새 그렇게……뭐, 아무튼, 영문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 짜증나는 새끼가 빨리 꺼져줘서 다행이야."
"뭐라고?"
익숙한 목소리에서 튀어나온 이질적인 단어에 순간 경악해서 선아의 얼굴을 쳐다본다. 짜증나는 새끼라니…그 표현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혐오를 넘어서 경멸에 가까웠다.
선아가 애초부터 최형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아가 이렇게 대놓고 그를 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더더욱.
경악 어린 내 얼굴에도 아랑곳 않고 나의 품에서 참새처럼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선아를 내려다본다. 선아는 그 순간에도 환히 웃고 있었는데, 평소와 같은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사방에는 따듯한 봄기운이 만연한데도 어째선지 우리 주변의 공기만이 에어컨을 세게 튼 듯이 차가웠다.
"아──정말, 얼마나 짜증났는지 몰라. 시아가 빤히 싫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자꾸 집적대고, 귀찮게 하고, 거슬리게하고."
"저기, 선아야."
"뭐 그 나이 때 남자애들 속셈이야 뻔하지. 시아가 예쁘니까, 한번 꼬셔볼라고 그렇게 들이댄 거 아니겠어? 꼬셔서 어떻게 해볼라고."
"선아야…"
"그런데 웃기다. 지가 좀 잘 생겼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머리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설마 시아가 자기 따위랑 급이 맞는다고 생각한 거야? 그딴 능글맞은 변태새끼, 지랄 맞은 양아치 따위가 감히 나의 시──"
"강선아."
힘을 담아 부르자 그녀의 이야기가 뚝하고 끊긴다. 이윽고 떨리는 눈동자가 내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떠들었으면서 지금은 대체 뭐가 그리 불안한 것인지, 적갈색의 동공이 한없이 요동치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은 채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시선 역시 위로 옮겨졌다.
"…나 왠지 몸이 아파서, 이만 조퇴할게. 선생님한테는 잘 말해줘."
"아, 으응."
"그럼 안녕."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가뜩이나 불타고 있는 마음에 기름을 부은 느낌. 열기가 지나치자 오히려엄습하는 한기에 가방을 다시 어깨 위에 둘러맨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선생님한테 말도없이 조퇴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됐던 간에……지금의 그녀와는 별로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 지금의 그녀를, 선아를 보고 있노라면 어째선지 속이 무척이나 메슥거렸다. 앞에 변기만 있다면 붙잡고 바로 토해버릴 정도로, 메슥거렸, 아니 역겨웠다.
"…한 마디, 딱 한 마디만 얘기하고 갈게."
"…"
"네가 내 절친한 친구라서 하는 얘기야."
그렇지만,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 아직 그녀에게 전해야할 말이 남아있으니까.
교실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발을 멈추고 떠나가는 내 등을 아마 지켜보고 있을 그녀를 향해 말을 건다.
"확실히, 그 녀석은 귀찮고 거슬리고, 쓸데없이 능글맞기까지 해서 처음에는나도 피했어. 하지만 녀석은 끈질기게도 계속 달라붙어왔지. 어쩌면 그 속에는 네 말대로 나쁜 의도가 숨어있었을 지도 몰라."
"역시 그렇──"
"하지만 네가 그 녀석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래? 물론 네 말처럼 그런 나쁜 애일 수도 있어. 사람의 본성이란 부모조차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개하고 말 한번 안 섞고, 눈 한번 마주치기 싫어했던 네가 개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잘난 듯 떠들어? 응? 아니면 네 안목이 그렇게 대단하기라도 하니?"
"시, 시아야…?"
평소라면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불렸을 내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축축하다.그에 약해가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의 안에서는 동정심보다 분노가 더 컸다.
"그리고 적어도…내가 봤던 그 녀석은 썩 나쁜 애가 아니었어. 오히려 남들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다니는 너 같은 애들보다는 나을 거야."
"아…"
선아의 험담은 듣는 사람의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도가 지나쳤다. 비난 자체의 수위도 그랬고, 남 앞에서 그 사람의 친구를 욕하다니,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아니, 친구이고 아니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그러한 비방을 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만한 일이 아니다. 설사 비난의 대상이 최형곤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 한들 나는 어김없이 나서서 그녀를 다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충격을 받은 부분은, 그런 비겁한 행위의 주체가 바로 선아라는 사실. 이따금씩 사소한 질투심을 내비칠지언정 그녀의 본성은 상냥한 것이라고 줄곧 믿어왔는데, 그 믿음이 오늘 산산조각 깨져나간 기분이다.
지금의 선아는그 정도로 이상했다. 동시에 다가가기 꺼릴 정도로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미련 없이 문을 닫고서 정적에 휩싸인 교실을 빠져나온다. 뒤에서 눈물을 참는 듯 끙끙대는 신음소리가 애처로이 들려왔으나, 지금 그녀의 곁에는 정말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