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두근두근 문예부
'신입생 대표, 이시아.'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에서. 많은 청중들 앞에서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당시 한가로이 시간이나 때우던 나의 눈에 단연 띠었다.
내려다보는 듯 무심한 눈길, 강당 안에 울려 퍼지는 뚜렷한 목소리. 비록 아주 멀리서 바라본 것에 불과했지만, 하얗고 작은 얼굴과 검고 검은 세미롱은 지금껏 봐왔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에게 문학적 재능은 없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전율이요 뇌리에 박히는 총격이라 할 만하리라. 태생적인 우아함, 그 순간부터 내 눈은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학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도하고 어딘가 시크하기까지 한 인상의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아이들은 꺼렸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모여 있으면 자주 그녀의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렇듯 그녀에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학생회장인 언니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하지만 자세히 지켜보면 그녀도 의외로 실수가 잦고 꽤나 어수룩한 사람이었다. 워낙 사소한 결점이라 다른 사람들은 잘 눈치 채지 못했지만, 평소 그녀를 관찰하다시피 한 나에게는 그녀의 그런 일면이 확실히 두드러졌다.
첫인상과는 꽤나 달라진 인상. 허나 오히려 그녀에 대한 관심이 커진 나는 마침내 그녀에게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점심시간, 급식을 먹고 있는 그녀의 옆에 스리슬쩍 가 앉았다.
그러나 돌아온 그녀의 반응은 내 하잘것없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마스크는 꽤나 좋다고 자부했었는데, 역시 그녀의 기준에는 미달이었던 것일까? 평범한 반응은커녕 경계심만 잔뜩 사버렸다.
내색은 안 했지만 괜한 심술이 들어서 다음 시간반장 선거 때 그녀를 추천했다. 그에 당황하는 그녀. 그리고 나 자신은 그녀와 한 발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반장 자리에 입후보했다.
'뭐…잠깐 정도라면 어울려도 나쁘지 않잖아? 공 줘봐.'
그렇게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는 정말로 만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완벽에 가까운 인간.
여기까지만 서술하면 그리 다가가고 싶은 부류의 인간은 아니겠지. 하지만 은근히 덜렁대는 성격이 그 인형 같은 정교함에 인간미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외모와는 정반대로 털털한 성격.
여러모로 재밌는 사람. 조금 어리숙해도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는 사람. 겉뿐만 아니라 속도 아름다운 사람. 그렇게 그녀를 지켜보면 볼수록 그녀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더 이상 관심이라는 한 단어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썩 좋지 못한 첫인상을 심어준 듯했지만, 뒤늦게나마 그 평가를 뒤집고자 했다. 그래서적당히 1인분만 하면 될조별 과제 때도 굳이 열심히 참여했고, 부반장으로서도 맡겨진 일을 빠지지 않고 다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문제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불빛에 홀린 나방이 겨우 나 하나만은 아닌 듯, 언제는 나의 동급생이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따로 날 불렀다.
'저기, 더 이상 시아한테 접근하지 말아줄래?'
'시아가 요즘 널 무지 귀찮아하거든…알면서도 꼭 걸리적거려야겠어?'
'알아들었으면 앞으로는 부디 시아한테 다가오지 말아줘. 어차피 네 뒤 졸졸 따라다니는 골빈년들은 차고 넘치잖아? 정 여자가 고프면 그중 아무나 골라서 따먹어버려. 엄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싸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옥상 위에서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거센 바람결에 따라 그 사람의 화려한 적갈색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흩날렸다. 나를 보는 그 표정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앞에서 내비치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두고서 그녀는 옥상을 떠났다. 또 한 번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아갔다. 그리고 조별 토의 이후, 운 좋게도 다른 조원들이 빠진 덕분에 둘만 있을 수 있는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엄한 의심을 사는 것은 피하기 위해 일부러 친숙한 pc방을 골랐다. 남자애들이 게임 얘기로 열띤 토론을 열 때마다 귀를 쫑긋대던 그녀는 역시 싫어하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살짝 안절부절 못하는 그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아 씨바! 봇라인 병쉰생퀴들!시발새끼들이 발로 게임을 하나!'
함께 한 pc방에서 나는 또 그녀의 새로운 일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경계를 내려놓은 그녀에겐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더 남자다운 일면도 있었다. 어느 남자애들이 게임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그런 모습은 여자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묘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고 생각한다. 같이 놀면서, 그냥 이대로 친구 사이로 남아도 좋다 생각할 정도로 즐거웠다. 만약 그녀가 남자였더라면, 우리는 꽤나 좋은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 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잘 가. 언제 한번 또 만나서 롤이나 몇 판 때리자."
몇 번의 격전 끝에 우리 둘은 pc방을 나왔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 속에서 그녀는 이 쪽을 바라보며 싱긋이 미소 지었다. 연분홍빛 입술의 양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예쁜 호선을 그렸다. 마치 새벽녘에 맺힌 이슬 같이 청아한 미소.
잠시 넋을 잃었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그녀의 미소 앞에서 활화산처럼 격렬하게 들끓는 심장의 고동을 간신히잠재웠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서도 멎지 않는 가슴의 떨림.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 그녀의 얼굴. 과연 이것을 바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걸까? 경험이 부족해 마땅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내가 그녀에게 안는 감정은 어딘지 애매하고 다소 막연하다. 그저 왠지 모르게 그녀가 끌릴 뿐, 문득 깨닫고 보면 본능적으로 그녀의 모습을 찾고 있는 자신이 있을 뿐.
그럼에도 하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럼 내일 또 보자."
그녀와 있으면 즐겁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다.
=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고? 어디 가서 이상한 소설이라도 읽고 온 거 아니야, 오빠?"
"아니, 정말이야."
"흠…"
아니, 정말이라니까. 아직도 이 쪽을 의심스레 바라보는 눈초리에 손사래를 내젓는다. 나는 단지 내가 직접 보고 느꼈던 사실을 전한 것뿐이다.
"뭐, 됐어.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그래야 내 착한 동생이지. 환자용 침대 위에 드러누운 여동생의 작은 머리통 위에 손을 싣는다. 수술을 위해 잘랐다가 덜 자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럽게 엉겨왔다. 다행이 내 손길이 불쾌하진 않은지 여동생은 작게나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놔두고서, 학교도 다 내팽개치고서, 갑자기 전학을 가겠다고 한 거야?"
"글쎄, 왜일까."
'저기, 최형곤 맞지?'
날 부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가슴깨나 닿을 법한 작은 체구. 여동생의 물음에 한순간 떠오른 그때의 장면에 목이 턱하고 막혔다. 울컥하고 먹먹해지는 가슴. 마땅한 변명을 짧은 시간에 짜낼 수도 없었기에, 결국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여동생은 참지 못하고 자신을 탓하겠지. 몸이 아플지언정 폐는 덜 끼치겠다며 굳게 사는 아이였다.
다만 나는 미련 남은 쓴웃음을 지었고,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은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오빠? 뜬금없이 오글거리는 말은 왜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많이 아파하지도 말고, 날 두고 죽지도 말아달라고. 그럼 내가 너무 불쌍해질 테니까."
당황하는 아이를 쓰라린 가슴 속에 안는다. 심장 너머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눈가가 살짝 아릿해져온다.
비록 다시는 그녀와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그래도, 여동생만 살아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이제 그만 시아에게서 떨어져줬으면 해서 말이야. 너, 계속 지켜보면서 무지 거슬렸거든.'
'싫다고? 그럼 곤란한데 말이지…아! 그러고 보니 형곤이한테는 아픈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이름이 분명…최하나였던가? 현재 OO병원에 입원해있다지?'
'너무 흥분하지는 마. 나도 딱히 그 작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은 없어. 여동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거든.
다만…다만, 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잘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야. 어떤 수를 써서든 우선 그것부터 배제해야 성이 풀리는 타입.'
'조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려나? 뭐 그럼 어때, 어차피 사랑이라는 개념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비이성적으로 변하잖아?'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부디 시아의 곁에서 떨어져줄래?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시아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만일 네가 사라져주지 않는다면…내가 네 여동생을 어떻게 할지도 몰라.'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가녀리고 훨씬 작았다. 표정 또한 지금 위협을 하고 있는 건지 권유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평온했다. 목소리도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무기를 든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참을 수 없으리만치 소름끼쳤다. 마치 나라는 인간을 길가의 개미새끼 이상으로 보지 않는 듯, 초점이 흐릿한 그 눈동자가 나의 정신을 옭아매었다.
그녀의 가족인 그 사람이 어째서 나를 그녀에게서 떨어트리려 하는지,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눈, 그 눈 때문에 이 사람이라면 제 말마따나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사람이란 걸 깨달아서, 같잖은 거짓말까지 해며 최대한 빠르게전학 수속을 밟았다.
그래, 나는 도망쳤다. 그 사람으로부터, 그 눈동자로부터. 그리고 도망친 패배자 따위에게 사랑을 얻을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