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두근두근 문예부
다음날 아침. 발치에 널부러져 있는 치맛자락을 허리춤까지 끌어올리고, 풀어헤쳐진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근다. 이윽고 군청색 마이를 걸치고 옷매무새를 조금 정리하면 외출 준비도 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실로 퍼펙트하다.
한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 위에는 먼저 등교한 언니가 차려놓은 아침밥이 있었는데, 갓 구운 토스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의자를 끌어당기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것을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비강 깊숙이 스며드는 고소한 버터향.
[어젯밤 OO구 근처에서 남녀 2명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살해 방식과 시체 손상도로부터 이번 범죄를 최근 날뛰고 있는 연쇄 살인범의 소행으로 특정.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쏴아아
아침의 뉴스 프로에선 언제나처럼 암울한 소식을 전하고 있고, 창밖에는 무거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나 보다. 평소보다 우중충한 일상의 풍경을 한구석에서 멍하니 지켜보면서 간단하게 식사를마친다. 입가에 묻은 버터 자국을 혀로 핥는다.
양치질을 하고, 파란색 장우산을 하나 챙긴 다음 밖을 나선다. 짙은 회색으로 뒤덮인 하늘에선 마치 길다란 대롱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다시피 하였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에겐 꽤나 큰일이겠네. 태평하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우산을 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아…"
현관 밖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 다친 동물이라도 주변에 있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문 앞에 기대어 쓰러진, 나와 비슷한 체구의 소녀였다. 흠뻑 젖은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는 그 모습에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
짜기라도 한 듯이 서로의 시선이 교차되고, 서로를 인식한다. 나는 그녀, 강선아를 내려다보았고, 그녀 역시 탁해진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찰나라고 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침묵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언제부터 이러고있었던 거야?"
툭하고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실은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뱉는 선아가 무엇보다 걱정되었지만, 동시에 분노라는 감정이 샘솟았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보다, 어째서 이런 꼴로 있는지가 훨씬 더 화났다.
"어젯밤부터…여기에 있었어. 그,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겨우 그 한 마디를 위해, 여기서 긴 시간을 죽치고 있었던 걸까. 그것도 흠뻑 젖은 생쥐 같은 몰골로, 아픈 장대비를 맞아가며.
아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나 보다. 소담한 양 어깨가 움찔하며 이 쪽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한다. 마치 소동물 같은 그 모습에 나는 피가 배이도록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정말이지, 정말로 바보 같은 아이다.
"겨우 미안하다 이 한 마디로 화가 풀릴 것 같아?"
"미안해…제발 어제 일은…"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어제 선아의 말도 심했지만, 나의 말 역시도 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뭐라 해도 그녀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며…처음으로 진정하게 사귄 친구이다. 분명 좀 더 좋은 말로 타이를 수도 있었는데, 나도 한순간 흥분해서 선을 넘고 말았다. 뭐가 됐건 간에 화는 냈겠지만, 그것이 이 아이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 줄이야.
아무튼 어제의 일과 지금의 이 분노는 무관계. 내가 지금 그녀에게 화난 이유는 온전히 다른 이유에서이다.
"너 바보야?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졌어? 어제부터 쭉 이러고 있었다고? 그거 참 대단하네! 그래서 이딴 몰골로 남의 집 앞이나 지키고 있었던 거야?"
"…"
"왜, 말 좀 해봐. 그렇게 변명거리가 없니?"
"…미안."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자연스레 거칠어진다. 얇은 교복 한 장 걸치고 그렇게 긴 시간을 비속에서 있다니, 장난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아프다고 울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선아가 고된 시간 끝에 날 보자마자 꺼낸 말은 어제의 사죄였다. 그것이 못내 화가 나서, 나는 선아에게 대뜸 성을 냈다.
"너 진짜─"
"미안…정말로 미안해."
"…하아"
쥐꼬리만한 목소리에 활화산 같이 터지던 분노도 단번에 사그라든다.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고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성질을 애써 잠재운다. 왠지 화를 내고 있는 내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다.
일단 여기서 계속 화를 내는 것도 멍청한 짓일 뿐더러, 한 시라도 빨리 선아를 집 안으로 들이고 싶다. 우산을 저 편에 치우고서 두 팔로 선아의 몸을 안아든다. 워낙 가녀린 몸에다 여자치고는 튼튼한 나라서 들어 올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반건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몸이 무척 뜨거웠다.
"시아의 품…"
이상한 소리를 지껄임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던 얼굴이 헤실거린다. 이걸 한 대 쥐어박을 수 없는 노릇이고, 이 대책 없는 것을 어찌 한담.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한 응징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선아를 안아든 채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래도, 오늘도 학교를 빠져야할 것 같다.